다시 찾은 만화방

오늘의 만화방은 ‘휴식’이라는 단어에 기대하는 환상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쿠션 깔고 누워 과자 까먹으며 만화책 쌓아놓고 뒹굴뒹굴. 주인장이 엄선한 셀렉션이 펼쳐진 공간에 독자, 출판사, 작가가 ‘좋아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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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지나다니던 가로수길에 ‘만화’라는 두 글자가 보이기 시작한 건 정말 얼마 전이다. 그동안 왜 못 봤을까 생각해보면 ‘아모르 드 코믹스’라는 한 번에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가로수길다운 상호 때문일 것이다. ‘커플룸 제공’ ‘점심 이벤트’ ‘식사 후 무료 만화 30분’과 같은 자극적인 홍보 문구가 적힌 POP 전단을 지나쳐 들어선 공간. 그곳에 천국이 있었다. 다 읽으려면 10년은 족히 걸릴 벽장을 빽빽이 채운 만화책, 다리에만 담요를 감고 싶어지는 추정 온도21℃의 에어컨 바람, 미드 <프렌즈> 조이네 집에서 가져온 듯한 리클라이너 소파, 그리고 짜파게티. 에메랄드빛 몰디브 바닷가 해먹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는 무결점 완벽한 휴식, 만화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늘의 만화방은 ‘그땐 그랬지’ 식의 장기 기억 저장소에 저장되어 있는 만화방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합정역 인근에 위치한 ‘즐거운 작당’은 만화방의 이상향이자 모범 답안 같은 공간이다. 즐거운 작당 ‘당주’ 김민정은 학창 시절 여가 시간을 만화방에 바친 만화방키즈였다. 당시 만화방에서 아저씨들 담배 냄새, 땀 냄새 참아가며 만화책을 읽던 여중생은 “왜 이런 곳밖에 없을까?” 투덜거리며 언젠가 꼭 만화방 주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직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작년에 비로소 그 꿈을 펼쳐냈다. 최대한 테이블을 많이 놓기 위해 두세 겹씩 겹쳐둔 기존 만화방 책꽂이 대신 네 벽면과 계단에 3만1,000여 권의 만화책을 가득 꽂았고, 카페 메뉴는 물론 맥주, 음식 만화 레시피로 음식을 준비했다. 즐거운 작당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공간 구성이다. 뒹굴 수 있는 방 한 칸, 작당을 모의하는 기지, 두런두런 얘기할 수 있는 객석. 김민정 당주 머릿속에 있던 공간을 하나하나 풀어냈고, 즐거운 작당은 좌식 만화방의 원조로 떠오르며 거대한 놀이터가 됐다. “기존 만화방은 남자들을 위한 문법으로 만들어졌어요. ‘덕심’이나 장르의 다양성을 누리기엔 부족한 환경이었죠.” 덕심으로 차린 즐거운 작당의 만화 셀렉션은 그 어떤 만화방보다 깊고 넓다. 그래픽 노블은 물론 만화 무크지까지 구비되어 있다. 음식 만화, 고양이 만화 등 주인장이 좋아하는 장르는 출간된 거의 대부분의 책이 들어와 있을 정도. 사장님 추천작은 믿음직스럽고, 도서 검색대까지 갖춰져 있다.

두 달 전 오픈한 ‘연남동 만화왕’ 역시 만화를 좋아하는 부부가 자신들의 로망을 실현한 공간이다. “둘 다 만화를 워낙 좋아해서 연애할 때 만화방에 자주 갔어요. 남편이 만화과를 나왔고 소장하고 있는 만화책만 600권이 넘어서 친구들이 자주 놀러 왔어요. 둘 다 만화책 좋아하고, 맥주 좋아하고, 고양이를 좋아해요. 그 삼박자가 잘 맞는 만화방이 세상에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편집 디자이너였던 온세미 대표 말이다. 처음엔 실제로도 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타쓰를 들여서 오손도손 둘러앉아 만화책을 보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지만 여건상 포기했다. 20평 남짓한 공간은 넓진 않지만 없는 건 없다. 1만7,000여 권의 만화책은 지금도 계속 엄선하는 중이다. 손님들 반응을 살피며 재미없거나 완성도 떨어지는 책은 걸러내고 그 자리엔 새로운 책을 채워 넣는다. 병맥주 종류는 다섯 가지 정도지만 맛 없는 맥주는 없고, 쥐포, 소시지볶음 등 내놓는 음식도 평소 주인장 부부가 좋아하는 안줏거리다. 겨울에는 군고구마도 구워볼 참이다. 인근 만두 맛집 이품만두를 포장해와서 맥주와 즐기며 만화책을 보라는 것이 한동안 홍보 포인트였다니, 만화방에서 유희가 뭔지 진짜아는 주인장들이다. 놀 거리가 너무 없어서 과거 경험의 즐거운 한 부분을 현실로 불러온 온세미 사장은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주며 손님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게 가장 즐겁다.

‘망원만방’에도 만화를 사랑하는 주인장이 있다. 한 달에 만화책 구입에만 20만원씩 쓰던 전직 플로리스트 임은정 대표가 여기에 조금만 더 보태면 만화방에 컬렉션을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심으로 시작한 공간이다. 홍대엔 왜 만화방이 없을까 스스로 품은 허기에 2년전 ‘상수동 만화방’을 차렸고, 좀더 넓은 공간에서 만화를 진짜 좋아하는 동네 주민들과 호흡하고 싶어 망원동으로 이전을 준비 중이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만화방을 찾는 일상형 손님들에게 좀더 조용하고 편안한 만화방을 제공하고 싶어 선택한 변화다. 심플한 의자와 소파, 한 권도 빠짐없이 정복하고 싶은 만화책, 진득하게 만화만 파고드느라 타인에게 불필요한 소음을 내지 않는 사람들. 망원만방은 여기에 만화를 알리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살롱으로의 변신도 준비 중이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작가와 친해지기도 하고, 좋은 책은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벤트를 열기도 했는데, 아예 만화가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로 한 것. 만화가들의 강연과 독자와의 만남, 작은 음악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즐거운 작당’ 역시 출판사와 영화사의 요청으로 신간 이벤트나 영화 상영회 등을 열곤 하니 만화방의 변신은 마치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다시 돌아온 동네 작은 책방의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책이 덜 읽히고 덜 팔려도, 더 깊고 더 다채롭게 즐기고 싶어 하는 수요가 분명히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충북 괴산에 차린 ‘탑골 만화방’이 문화·예술 공동체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한 걸 봐도 그렇다. 19금 만화를 비롯, 2,000여 권의 만화책을 구비하고 맛있는 커피를 내려 먹을 수 있는 산골짜기 시골 만화방에 사람들이 자꾸 모이고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메가박스 코엑스에도 계단 아래 만화방이 들어서고, 술집이나 카페에도 필수품처럼 만화책이 꽂히며 곳곳에 만화방이 유행처럼 생기고 있지만, 만화방의 금의환향은 더 큰 흐름으로 이어지진 않을지 모른다. 만화라는 콘텐츠의 힘은 여전하지만 감상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신간까지 챙겨 보는 마니악한 독자들보다 아직까진 이색 체험으로 만화방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의 만화방에는 만화책만 있는건 아니다. 만화책 보는 행위를 더욱 편안하게 해줄 공간이 있고, 출출한 배를 채워줄 주전부리가 있고, 만화 세계의 깊이를 더해줄 안내자가 있다. 1980~90년대 만화방 키즈가 ‘덕업일치’를 이루며 양지로 풀어낸 오늘의 만화방은 향
수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휴식’이라는 단어에 기대하는 환상을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어슬렁거리다 뒹굴뒹굴 누워 낄낄낄 웃을 수 있는 곳. 예나 지금이나 만화방에는 세상 걱정근심 깜빡 잊게 해줄 재미가 바글바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