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살라 마을의 컬러 이야기

잘 익은 밤, 윤기 나는 가지, 숙성된 와인… 더없이 식욕을 자극하는 색깔이 떠올랐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마르살라’ 마을에서 유래한 컬러 이야기.

!Marsala Plastic Chip

지난해 말, 색채 전문 기업 팬톤(Panton)은 ‘마르살라(Marsala)’를 2015년 ‘올해의 컬러’로 공식 발표했다.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작은 마을 마르살라에서 영감을 얻어 붙인 이름으로 시큼한 포도 향이 날 듯한 은은한 적갈색을 지칭한다. “시칠리아 여행 중 와인을 마시다가 ‘마르살라’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팬톤을 대표하는 컬러리스트 리트리스 아이즈만의 설명이다. “만족스러운 식사의 풍성함을 상징하는 적포도주색이죠. 2014년 ‘올해의 컬러’ 레디언트 오키드(Radiant Orchid, 난초를 닮은 적보라색)가 기운 넘치고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느낌이었다면, 마르살라는 우리의 심신과 영혼에 자신감과 안정감을 주는 온기 넘치는 색입니다.” 팬톤의 발표 이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를 비롯해 여러 레드 카펫에서 와인색 드레스를 즐겨 입던 비욘세는 그야말로 트렌드를 한두 발 앞서가는 패셔니스타로 인정받았다. 그러더니 패션, 뷰티, 리빙을 아우른 영역에서 마르살라 아이템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팬톤 ‘올해의 컬러’가 대체 얼마만큼 영향력이 있기에 이 야단인 걸까? 1963년 인쇄 기사 로렌스 허버트는 ‘팬톤 매칭 시스템’을 고안했다. 색에 관한 범세계적 기준을 제시해 예술, 디자인 분야에 사용된 색을 다른 산업에서도 동일하게 쓸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지난 50여 년간 팬톤에서 이름을 붙여 새 생명을 부여한 색상은 무려 2,310가지! 1990년부터 매년 연말 발표한 ‘올해의 컬러’는 다음 해 디자이너와 소비자 사이에 가장 인기를 끌 색상을 예측한 것이다. 가령 2011년 허니서클(Honeysuckle), 2012년 탠저린 탱고(Tangerine Tango), 2013년 에메랄드(Emerald), 2014년 레디언트 오키드 등등. 이 색상은 실제로 여러 분야에서 사랑받으며 팬톤의 예측에 힘을 실어주었다(물론 팬톤의 예측이 정확한지, 혹은 팬톤이 지목한 컬러가 피그말리온 효과 덕분에 트렌드가 됐는지 그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건 애매한 일이다).

그렇다면 올해 우리가 마르살라에 열광할 거라는 팬톤의 예측은 뭘 근거로 한 걸까? 팬톤 컬러 연구소에서는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당대 모든 분야를 면밀히 검토한다. “패션, 뷰티, 리빙, 예술 분야는 특히 중요합니다. 얼핏 관련 없을 듯한 자동차 산업, 혹은 건강식품조차 유심히 지켜보죠.” 리트리스 아이즈만은 예측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시대정신(Zeitgeist)’이기에 정치, 사회적 이슈 역시 중요하다고 전한다. 가령 브라운의 경우, 15년 전만 해도 진흙이나 먼지처럼 주로 낡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색상이었다. 하지만 커피 문화가 일상화되고 화려한 초콜릿 브랜드가 등장하면서 요즘은 고급스러운 색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전에 없이 호전되면서 쿠바 문화에서 출발한 생기 넘치는 색상과 문양이 패션계에 침투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사례. “전 세계적 경기 불황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을 웃게 해줄 문화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색상 역시 마찬가지예요. 차분하지만 낙천적이고 온기 있는 색을 원하는 거죠. 그게 바로 마르살라입니다!”

 

물론 팬톤의 ‘마르살라 예찬론’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뉴욕 매거진>의 ‘The Cut’에선 마르살라가 왠지 ‘기분 나쁜(Icky)’ 색상이라고 혹평했고, <The Atlantic>은 ‘‘올해의 컬러’의 치명적 문제”라는 기사를 통해 마르살라가 ‘남자 기숙사 화장실의 때 묻은 바닥’, 혹은 ‘공기 중에 오래 노출된 피’를 연상시킨다며 비난했다. 포도보다는 고깃덩어리 색깔에 가깝다는 평도 있었다. 그러나 몇몇 반대파의 혐오에 가까운 평가와 관계 없이 이번 시즌 핵심 컬러가 마르살라인 건 분명하다. 2015 F/W 패션 위크가 열리는 한 달 내내 셀 수 없이 많은 런웨이에서 마르살라가 발견됐으니까(스웨이드, 니트, 가죽 같은 겨울 소재와 만날 때 더 빛을 발했다). 루이 비통의 날렵한 가죽 팬츠, 샤넬의 트위드 스커트 앙상블, 에밀리오 푸치의 시폰 점프수트, 프로엔자 스쿨러의 컷아웃 니트 드레스, 알렉산더 맥퀸의 오리가미 장식 가죽 원피스, 타미 힐피거의 모피 스웨트 셔츠와 플리츠 스커트, 마크 제이콥스의 세퀸 코트, 동양적인 패턴을 더한 드리스 반 노튼의 울 소재 재킷과 스커트 등등. 런웨이 자체를 마르살라 카펫으로 꾸민 지방시는 모델들이 모피, 벨벳, 실크, 자카드, 시폰 등 온갖 소재의 마르살라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채 등장했다(여기에 마르살라 페이스 주얼리까지). 또 잭 포즌 쇼의 피날레에는 말쑥한 수트 차림의 디자이너와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나오미 캠벨이 함께 등장했다. 정말이지 마르살라 커플 룩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면 마르살라 컬러로 빼입고 싶은 당신이 맨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뭘까? 리얼웨이에서 상·하의를 모두 마르살라로 선택한다면 지나치게 ‘깔맞춤’인 데다 할머니 옷장을 뒤진 듯 고리타분하게 보일 수 있다. 현실에서는 마르살라가 어떤 색상과 어울릴지 고민하는 게 관건(잘못된 색상 조합이야말로 ‘패션 테러리스트’로 가는 지름길임을 우리는 잘 안다). 다행히 마르살라는 거의 모든 색상과 잘 어울린다(어떤 피부 톤에도 마르살라가 잘 어울린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스카이블루와 산뜻한 조화를 이룬 안토니오 마라스, 네이비 레이스 드레스 위에 마르살라 프린지 케이프를 더한 버버리 프로섬, 인디 핑크 위에 톤온톤으로 연출한 구찌, 퍼플과 오렌지 등 선명한 색상과 매치한 록산다, 자연을 닮은 브라운과 함께한 메종 마르지엘라 등등. “마르살라는 은근하게 내재된 색상이 여러 가지여서 셀 수 없이 많은 색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금빛 옐로, 그린, 블루 등.” 리트리스가 마르살라의 놀라운 친화력에 대해 전했다. 무한한 조합 가운데 누구나 소화할 수 있는 색깔은? 단연 그레이와 베이지(라코스테와 에르메스 런웨이의 스타일링을 참고하시길)!

 

평소 무채색 위주의 안전한 룩을 추구해왔기에 강렬한 와인색 옷 앞에서 여전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여러 브랜드에서 구두, 가방, 장갑, 모자처럼 자그마한 아이템으로도 준비했으니 뒷걸음치지 않아도 된다. 질 샌더의 벨벳 플랫폼 슈즈는 별 특징 없는 데님 원피스조차 멋스럽게 변신시켜줄 테고, 토가의 날렵한 스웨이드 로퍼는 가죽 레깅스와 완벽하게 짝을 이룰 테며, 생로랑의 숄더백은 어떤 룩에든 산뜻한 포인트. 오드리 헵번의 우아한 손짓을 연상시키는 랑방과 발렌티노의 장갑은 또 어떤가?

메이크업 역시 마르살라를 소소하지만 멋스럽게 즐길 방법이다. 팬톤과 함께 ‘마르살라 스페셜 컬렉션’을 출시한 세포라를 비롯, 수많은 패션 하우스의 뷰티 라인에서 마르살라 메이크업 아이템을 선보였다. 마르살라 메이크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보그> 뷰티 에디터의 조언은? “완벽하거나 자연스럽거나!” 다시 말해 힘을 줄 땐 확실히 주고, 뺄 땐 확실히 빼는 게 핵심이라는 얘기다. “마르살라 메이크업의 특징은 눈매와 입술, 양 볼을 한 톤으로 일치시킨다 해도 올 핑크, 올 오렌지 메이크업처럼 촌스럽지 않다는 겁니다. 부위별로 색감의 강도에 차이를 주거나 강약을 조절하면 모노톤 메이크업의 매력을 발산할 수 있어요.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붉은 계열의 옷을 입은 여성에게 더 매력을 느낀단다. 동물의 세계에선 빨간색이 암컷의 생식력을 상징한다(침팬지 암컷은 배란기에 에스트로겐 수치가 올라가면서 혈관이 확장돼 얼굴이 붉은빛을 띤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다양한 톤의 붉은색이 우리 여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건 사실. 그러나 마르살라는 유난히 차분하고 풍성하며 우아하다. 직접적으로 성적 매력을 내세우는 대신, 은근하게 숨겨둔 느낌? 팬톤은 2016년 ‘올해의 컬러’ 후보로 장밋빛 ‘로즈 쿼츠(Rose Quartz)’, 복숭앗빛 ‘피치 에코(Peach Echo)’, 청명한 하늘빛 ‘세레니티(Serenity)’ 등을 공개했다. 모두 마르살라와 잘 어울릴 만한 색깔. 그러니 당분간 마르살라를 가까이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