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서의 역할과 힘들게 성취한 성공, 깨진 약혼, 파파라치와 소송. 지난 몇 년 동안 시에나 밀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친 과거에서 벗어나 엄청난 스타덤에 오르기까지 그녀는 뒤보다는 앞을 봤다. 시에나 밀러는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절대 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일하다 흥분한 두 살짜리 아이를 침대에 밀어 넣고 나온 시에나 밀러는 여느 젊은 엄마와 다르지 않았다. 피곤하고 지친 그녀의 머리는 약간 헝클어져 있었고, 아이섀도는 쌍꺼풀 안에 뭉쳐 있었다. 주말에는 아침 9시부터 패션 화보 촬영장에 있었고 그 후엔 서퍽에서 열린 친구의 결혼 파티에 참석하느라 잠이 부족했다는 설명을 들려줬다. 일요일에 시에나 밀러는 배우 톰 스터리지의 어머니인 배우 포비 니콜스가 돌보고 있던 딸 말로를 데리러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어깨가 드러난 블랙 & 화이트 줄무늬 톱을 입은 시에나 밀러는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맨발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와인 마실래요? 난 좀 마셔야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로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가끔 제 와인 실력이 걱정돼요. 하지만 와인이 너무 좋아요!” 시에나 밀러는 예쁜 잔에 와인을 따라서 내게 건넸다.

그녀의 웨스트 런던 집 부엌은 통풍이 잘되고 밝다. 부엌 테이블 위에는 가족사진 액자가 걸려 있고 거실에는 벨벳 소파가 놓여 있다. 책장에는 테네시 윌리엄스와 토비아스 울프의 책을 비롯, <웨스트 윙(The West Wing)> 박스 세트가 빽빽하게 꽂혀 있다. 아늑하고 평범한 공간이다. 그러나 밤이라고 해서 소파에 늘어져 있을 시간은 없다. 내일이 딸 말로의 세 번째 생일이라 지금 톰은 햄리스(Hamleys, 장난감 백화점)에서 딸의 선물을 고르고 있다. 미슐랭 스타 셰프 마커스 웨어링(Marcus Wareing)이 현관문의 벨을 눌렀고 시에나 밀러의 휴대폰에선 우아한 문자 알림 소리가 났다. 신작 <더 셰프(Burnt)>에서 재능 있는 수석 요리사로 보이도록 필요한 기술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웨어링이었다. “하루에 가자미 70마리는 요리했을 거예요. 일주일 내내 손에서 생선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어요.” 시에나 밀러가 웨어링으로부터 힘들게 배운 테크닉을 기억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보그>는 스승과 제자를 재회하게 했다.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웨어링을 맞이했다.

<더 셰프>에서 시에나 밀러는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 미슐랭 스타 셰프의 연인이자 그에게 극적인 좌절감을 안겨주는 인물을 연기한다. “영화를 찍다 보면 어느 순간 허영심을 버리고 진짜 그 인물을 연기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에선 화려해 보이지 않는 게 핵심이기 때문에 다행이에요.” 준비 과정에서 배우들은 런던에 있는 웨어링의 팀에 합류했다. “웨어링은 훈련하는 내내 제게 소리를 질렀어요. ‘숟가락을 삽처럼 쥐면 안 돼!’” 그녀는 웨어링을 향해 미소 지으며 그의 흉내를 냈다. 우리는 그녀에게 영화에서 만들던 바로 그 가자미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더 많은 와인이 필요했다. 음식을 위한 와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와인 말이다. 시에나 밀러는 넉넉하게 잔을 채웠다. 그리고 와인이 너무 싸구려이고 칼이 충분히 날카롭지 않다고 걱정했다. 그녀의 타고난 자기 비하적 성격에 짓궂은 약간의 허술함이 더해지면서 따뜻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생선 살을 발라낼 때 그녀는 손을 약간 떨며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셰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거든요.” 희끗희끗 수염을 기른 웨어링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시에나 밀러를 응원하는 멘트를 날렸다. “이건 포를 뜨기 힘든 생선이에요.” 마침내 마지막 작은 조각을 떼어냈을 때 그 유명한 예쁜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웰스는 “시에나 밀러는 늘 완벽하게 일할 준비를 하고 세트장에 왔어요. 그녀는 셰프처럼 보이기 위해 정말 열심히 훈련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를 지원하기 위해 전날 LA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시에나 밀러가 부드러운 거품을 떠서 생선 살 위에 얹는 과정에서 실수는 없었다. 살이 익었는지 테스트할 때 손가락을 살짝 데었지만 이글거리는 열기에도 민첩하고 차분하게 생선 살을 뒤집었다. 시에나 밀러는 “영화 촬영이 끝났을 즈음 뜨거운 열에도 끄떡없는 손을 갖게 되었어요”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웨어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밀러에게 언제든 제 부엌에 취직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나 지금 당장 시에나 밀러가 직업을 바꿀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커리어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한 해 그녀는 할리우드 평론가들이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일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행보를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짧게 요약해보면, 먼저 베넷 밀러의 <폭스캐처(Foxcatcher)>에서 그녀를 재발견하게 해준 작은 역할이 있었다. 마크 러팔로의 방어적인 아내 역에 아주 멋지게 녹아들었기 때문에 그녀임을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연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쿠퍼가 분한 미국 네이비 실의 유명한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상대역을 맡았다. 끝없는 살육 지대에 있다가 집에 와서도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내 타야의 감정을 깊이 있게 표현함으로써 이 작품에 필요한 뭉클함을 더했다.

이 영화들은 샘 멘데스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카바레>가 주목받은 시기에 개봉되었다. 시에나 밀러는 지난 6주 동안 흥행 몰이를 하던 엠마 스톤이 연기한 샐리 바울스 역을 이어서 맡았다. “성취감이 큰 작품이었어요. 저 스스로 최고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요!” 런던으로 돌아온 지 2주 만에 밀러는 코엔 형제와 제이크 질렌할과 함께 심사를 하기 위해 칸으로 떠났다. 평소 위트 있는 성격과 자신감으로 심사위원 역할을 해냈다. “대작 중 한 편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사람이 저였어요. 입을 다물고 있진 않았다는 뜻이에요.(웃음)” 그리고 늘 그렇듯이 발렌티노, 구찌, 발렌시아가를 입고 레드 카펫 위에서 고전적인 매력을 뽐냈다. 친구이자 디자이너 스텔라 맥카트니는 “시에나 밀러는 늘 자신에게 충실합니다”라고 말한다. “본능적으로 무엇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지 압니다. 어떤 옷을 입어도 근사하지만 아무거나 입진 않죠.”

올가을에는 독립영화 감독 애너 보든과 라이언 플렉의 <미시시피 그라인드(Mississippi Grind)>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 감독인 벤 휘틀리(Ben Wheatley)의 <하이-라이즈(High-Rise)>도 있다. 삭막한 고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J. G. 발라드의 1975년 소설을 개작한 어둡고 폭력적인 작품이다. 연기보다는 남자 친구, 타블로이드 신문과의 싸움 등으로 더 유명한 예쁜 잇 걸, 모델, 패셔니스타라는 인식을 없애기에 위에 열거한 작품으로도 충분치 않다면 다음 작품들은 어떤가. 8월, 밀러는 제임스 그레이의 <잃어버린 도시 Z(The Lost City of Z)>를 찍기 위해 벨파스트로 떠났다. 그리고 12월에는 벤 애플렉의 <라이브 바이 나이트(Live by Night)>를 찍기 위해 LA로 떠난다. 이 작품은 오스카상을 수상한 벤 애플렉 감독의 <아르고(Argo)> 후속 편이다. 제인 폰다와 함께하는 윌리엄 H. 메이시의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신경 쓰지 마라. 하지만 이들 중 어느 작품에서도 시에나 밀러는 주인공이 아니다. 아직은. 그러나 존 웰스는 그녀가 주연을 맡을 날이 곧 올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똑똑한지 모르는 것 같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대중에게 노출된 삶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에게 경솔한 면이 있다고 추측하는 것 같아요.”

절친한 친구 브래들리 쿠퍼는 이메일에 “그녀는 자신감과 취약함을 모두 가진 사람이에요”라고 적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오디션 테이프를 봤을 때 시에나 밀러라는 걸 눈치조차 채지 못했어요. 그녀의 연기는 정말 끝내줬어요. 현장에 항상 일할 준비를 하고 오지만 자신도 즐기면서 주변의 사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스타 공식을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타고난 자질은 말할 것도 없다. 언니 사바나는 “꼭 한 사람 안에 10명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시에나 밀러는 20대에 언니와 함께 트웬티에잇트웰브(Twenty8Twelve)라는 패션 레이블을 공동으로 디자인했다. “아주 쾌활하고 즐겁게 노는 데도 일가견이 있어요. 내적으로 아주 행복한 사람이에요.” 사바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전성기였던 2015년에 대해 시에나 밀러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제게 의미가 있는지 좀더 분명해졌어요”라고 말한다. “아마도 작은 역할들에 출연하면서 세련된 역할들을 하기로 결심한 게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를 인터뷰할 당시에는 그저 자축만 할 때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후속 인터뷰를 하러 아침 9시 30분에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PR 담당자는 그녀의 가족 중 한 사람이 몹시 아파서 스케줄을 다시 잡을 수 있을지 메일을 보냈지만 나는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녀를 만났다. 이제 막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온 그녀는 프라다 스트라이프 톱에 진 차림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빨갰다.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천성을 감추지 못했다. 약속에 대해 사과하면서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언니 사바나는 시에나 밀러가 디바처럼 행동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여덟 살 때부터 기숙학교에 다닌 것이 그런 근성을 길러준 듯하다.

현재 그녀에게 아픈 가족이 유일하게 힘든 점은 아니다. 톰과의 파트너십 역시 허우적거리고 있다. 며칠 전 포르멘테라 해변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파파라치 카메라에 잡히긴 했지만 톰이 준 약혼반지는 없었다. 가까운 지인들은 그들이 지난 5월에 헤어졌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두사람은 여전히 좋은 친구이고, 헌신적인 부모이며, 말로를 위해 휴가도 함께 가는 사이이다. 내가 그 얘기를 꺼내자 그녀는 주저하다가 말했다. “당신이 저의 완벽한 삶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그녀가 테이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한 전부이다. “우리는 가족이에요. 그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없어요.”

그들이 부모로서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는 건 전날 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시에나 밀러가 “정말 진국이에요. 사려 깊은 아빠고요. 사람들이 배우 하면 떠올리는 그런 성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라고 묘사한 톰 스터리지는 얼마 전 데미안 루이스와 출연한 데이비드 마멧(David Mamet)의 연극 <아메리칸 버팔로(American Buffalo)>의 장기 공연을 끝냈다. 그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끝낼 무렵 늦게 도착했고 복도에 햄리스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그는 상당히 과묵했다. 시에나의 밝고 솔직한 성격과는 정반대였다. 우리와 어울릴 기분이 아닌 게 분명했지만 말로의 선물을 포장하러 가기 전에 안부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지만 서로 옆에 있는 것이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과 가족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조용히 말했다. “최근에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어요. 실은 정말 엉망진창인 한 해였죠. 모든 일에는 늘 음과 양이 있기 마련이에요. 한쪽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을 때 다른 한쪽도 잘해내긴 힘들어요. 일은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요.”

일주일 후 마침내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이번엔 기사의 논조가 점잖았다. 집 밖에 진을 치거나, 거리에서 그녀를 뒤쫓거나, 전화를 녹취하는 파파라치들은 없을 것이다. 2008년부터 시에나는 타블로이드 신문과 파파라치들을 상대로 재판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졌지만 그녀는 이겼다. 정신병이라고 할 정도로 범죄에 가까운 사생활 침해에서 살아남은 것에 대해 그녀는 분명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그녀는 개인적인 소송뿐만 아니라 2011년 레베손 심리(Leveson Inquiry), 그리고 최근엔 레베카 브룩스와 앤드 쿨슨을 상대로 한 해킹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었다. 한 타블로이드 매체가 시에나 밀러가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남긴 “사랑해요”라는 보이스 메일을 해킹했던 2005년을 언급하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 얘긴 너무 많이 했어요. 그 시기가 끝난 것에 정말 감사해요. 저는 끊임없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제가 그들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계속 이어졌어요. 하지만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언니는 조카들을 공원에 데려갈 수도 없었어요. 저는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녀와 변호사 마크 톰슨은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시에나 밀러는 범인들을 잡기 위해 몰래카메라를 사용했다. “명쾌한 전례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전엔 법적인 조치가 취해진 적이 없었으니까요. 제가 이 일을 해내서 정말 자랑스러워요.” 과거 다이애나 왕세자비 파파라치 사건을 떠올려보면 그녀의 성취는 더욱 인상적이다. “저는 끔찍한 성차별과 비난에 시달렸어요. 누군가 현관문에 ‘잡년(Slut)’이라고 스프레이로 휘갈기기도 했으니까요. 누가 그런 걸견딜 수 있겠어요?” 재판의 결과는 그녀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커리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주제에 대한 그녀의 결론은 이렇다. “계속되는 불안감과 스트레스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건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어요.”

말로의 생일 케이크를 가지러 현관에 나가봐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대화를 잠시 멈췄다. 라이온 킹 모양의 케이크였다. “<겨울왕국> 인기가 지나가서 다행이에요. 그건 아이들을 위한 마약이었어요.”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오후 그들은 말로의 생일 파티를 위해 친구의 시골 작은 집으로 갈 것이다. 어머니, 사바나, 늘 곁을 지키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말이다. “제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여자들이에요. 물론 서로를 화나게 하기도 하지만요!”

시에나 밀러는 얼마 전에 옷장을 정리했다. “쓰레기봉투 네 개가 꽉찼어요. 친구들을 위해 벼룩시장을 열곤 해요.” 그러나 그녀는 패셔니스타로 찬사받던 날들은 다 지나갔다고 말한다. 현재는 공개 석상에 나설 때 그녀를 도와줄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했다. “마지막으로 쇼핑 간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평상시에는 티셔츠, 진 차림이랍니다.” 그녀는 스탠스미스 슈즈에 빛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캐주얼한 차림을 하고도 욕이 나올 정도로 근사해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정생활의 리듬이 돌아왔고 그들은 며칠 동안 시골집에 머물 계획이다. “말로가 그곳을 좋아해요. 근처에 노를 저을 수 있는 호수와 승마 학교도 있어요.” 아이를 세계 곳곳으로 데리고 다니는 직업을 가진 부모가 육아를 잘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기를 갖는 건 분명 너무나 멋진 경험입니다. 하지만 여자의 삶은 혼란에 빠지고 완전히 지치기도 하지요. 저는 지금 당장 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잠들 수도 있어요.” 그날 아침 처음으로 그녀는 걸걸하게 웃었다. “우리는 잘하고 있는데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모성의 저주죠.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건 건강하지 않아요.”

시에나 밀러는 <카바레> 공연을 위해 세 사람의 거처를 뉴욕으로 옮겼다. 뉴욕은 그녀가 태어난 곳이며 지금도 유혹적인 도시이다. 그러나 연극 개막 일주일 전에 걸린 독감은 그녀가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하고 공연하는 내내 무대 위에서 기분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건 정말 미국적인 방식이에요. 무대에서 얼굴이 찢어지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여섯 바늘을 꿰매야 했어요.” 나는 그 상황이 창의력 넘치는 예술이라기보다는 고문처럼 들린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이 캄캄하지요. 그래서 현명해져야 합니다. 완벽한 허무주의자를 연기하는 동시에 낮에는 엄마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역시 사랑했기 때문에 연극이 막을 내릴 때 혼란스러웠어요.” 그녀는 <카바레> 공연 첫날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희열”에 비유했다. 2016년 초에 선보일 또 다른 브로드웨이 연극도 검토 중에 있었지만 그 연극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단 두 명만이 등장하는 연극이었고 저는 남자 주인공이 받기로 한 출연료의 절반을 제안받았어요. 남자 두 명이 출연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슬펐지만 거절했습니다.”

시에나 밀러는 늘 뉴욕을 오가며 생활해왔다. 열여덟 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리스트라스버그 연극영화학교에 다니기 위해 곧바로 자리 잡은 곳도 뉴욕이었다. 부모님은 그녀가 여섯 살 때 이혼했다. 은행가에서 미술 에이전트로 직업을 바꾼 아버지 에드윈은 총 네 번 결혼했다. 시에나와 사바나에게는 두 명의 이복형제와 한 명의 의붓 자매가 있다. 두 자매는 전직 모델이었던 어머니와 함께 런던으로 돌아와 풀햄(Fulham)에서 살았다. 어머니 조세핀 역시 서퍽에서 열린 주말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녀는 플로럴 드레스를 입고 두 딸과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시에나는 언니와 손을 꼭 잡은 채 친구들 사이를 행복하게 거닐었다.

이런 친밀함을 고려하면 그녀가 여덟 살 때 윌트셔에 있는 기숙학교인 매너(The Manor)에 다녔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전형적인 영국인다운 대답을 들려줬다. “그 경험이 제 성격을 형성해주었어요. 무엇에도 굴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사랑 넘치는 부모님과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시에나 밀러는 자신이 “타고난 낙천주의자”라고 강조한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놀라울 정도로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과거에 연연하는지 내가 묻자 그녀는 “아니요, 저는 쉽게 지지 않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이 모든 자질이 필요할 것이다. 10년간 그녀의 친구였던 영화와 TV 프로듀서인 브래들리 애덤스(Bradley Adams)는 이런 허세가 전형적인 시에나 밀러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즐거운 표정을 짓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태도가 타격을 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뒤보다는 앞을 봅니다. 모든 것에서 긍정적인 면을 봅니다.”

지난 10년을 요약해달라는 요청에 시에나 밀러는 “주드를 만난 게 가장 놀라운 경험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됐다. 다음 일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계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세계를 여행했어요. 사랑에 빠졌고 친구들도 늘어났습니다. 저는 글래스톤베리 시절이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 돌아보는 걸 좋아해요.”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20대를 돌아볼 때 전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한편으론 완벽하게 잘 풀렸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