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옥의 50년

진태옥은 옷으로 시를 쓰고 옷으로 영혼을 노래한다. 여든 살의 디자이너 진태옥 은 50 년간 그렇게 옷을 만들었고, 비로소 그것은 한 권의 아름다운 시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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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서점으로 달려가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진태옥의 이름이 박힌 시집(아마 새하얗고 정갈하게 편집된)을 구하기 위해. 그러나 이 시집은 인쇄된 책이 아니라 2016 S/S 서울 패션위크와 함께 공개될 50주년 기념전 <앤솔로지>다. “파리 장식미술관의 <Korea Now!> 전시 첫날 아침. 예고 없이 수지 멘키스가 전시장을 방문했어요. 그녀는 전시된 내 옷을 둘러보더니 제게 조용히 한마디 건넸죠. ‘당신 작품은 시 같군요’라고요.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내 귀를 의심했어요. 그 한마디에는 내가 지난 50년간 추구해온 모든 것이 함축돼 있었으니까요.” 한불 수교 130주년 기념 전시를 위해 파리에 다녀온 진태옥은 그새 홀쭉해져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생기로 반짝였다. 솔직히 말해 약간의 두려움 섞인 경외감이 밀려올 정도로 빛이 났다. “1년에 전시를 두 번이나 한다는 건 사실 무리죠. 아트북 겸 도록도 제작해야 하고, 여러 가지로 체력 소모가 많았어요. 그렇지만 준비하는 내내 소모되는 만큼 에너지가 다시 충전되는 기분이었죠. 정말 행복했답니다!”

진태옥은 올해 만으로 여든 살이 됐고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한 지 50주년을 맞았다. 서울 패션 위크의 위상을 좀더 높이고자 하는 정구호 총 감독과 뜻을 같이한 그녀는 단독 전시 진행을 결정해, 자신의 아카이브에서 90년대 이후 컬렉션 위주로 의상 80여 벌을 골랐다. 2005년에 발간된 아트북 <Beyond Nature> 때부터 합을 맞춰온 스타일리스트 서영희가 전시 총감독, <보그> 패션 디렉터 신광호가 패션북의 편집을 책임졌다. “젊게, 완성도 있게, 파괴적으로 가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의상을 10가지 카테고리로 나눴죠. 각 테마에 맞는 앵글로 젊은 사진작가 다섯 명과 작업해서 패션북을 구성했고요.” 다채로운 가운데 전체를 관통하는, 진태옥이라는 핵심을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옷 잘 봤다’로 끝나는 건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작품을 설치한 사람, 스타일링한 사람, 연출한 사람, 그리고 관객, 네 요소가 서로 공감하는 게 중요했어요. 그래서 전시장에서 나올 때 한 편의 시를 읽거나 드라마를 본 듯한 감동을 주자는 게 목표였죠. 기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요.” 허리 약간 위쪽으로 한복 옷고름 같은 띠가 장식된 검정 새틴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인터뷰 몇 시간 전, 공간 디자이너 임태희,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서영희와 전시장 내부 설치에 대한 논의를 끝냈다. 그런 뒤 드디어 설치에 들어간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좋았던 것처럼 두 번째보다 이번이 더 과감합니다. 더 파격적이죠. 그게 제 옷과도 잘 어우러진다고 느꼈어요. 현대적이고 건설적인, 거친 것과 고요하고 정적인 의상의 만남. 그리고 그 대비에서 일어나는 스파크.” 현대적이고 건설적인, 거친 것? 전시 오프닝 5일 전에 찾은 DDP 이간수문 전시장에는 ‘드르르륵’ 굉음과 함께 철근 구조물 설치가 한창이었다. “여든 살이 된 디자이너의 전시라면 과거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거나 완결된 상태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기 쉽죠. 제가 진태옥 선생님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건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분의 작업은 진행 중이며 미래가 있죠. 그건 정말 어렵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걸 표현하기 위해 공사 중에 사용되는 임시 철근 구조물을 이용했습니다.” 임태희 소장은 여전히 다음에 뭘 보여줄지 기대된다는 점에 대해 ‘계속 지어지고 있는 것 같은’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거친 구조물은 아름답고 섬세한 의상 뒤에 있는,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정신 또한 반영한다고 덧붙였다. “패션 디자이너든 예술가든 누구나 완성된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공사용 철근이 서 있고 비닐이 너울거리는 이곳은 전시장이 아닌, 공사 현장, 혹은 아직도 전시 준비 중인 곳이라고 착각하기 쉽죠.”

 

진태옥은 시간순으로 옷을 나열하는 식의 고루한 패션 전시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 전시를 추구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의 나이를 들으면 깜짝 놀란다. 증손주도 서너 명은 있을 나이에 빠른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진태옥은 외국에 나가면 의무감에서라도 전시를 꼭 본다. 2001년에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아르마니 전시(대체로 옷이 너무 많아서 지루했던), 2011년 런던의 수력발전소를 개조한 갤러리 ‘와핑 프로젝트(The Wapping Project)’에서 열린 ‘요지 메이킹 웨이브(Yohji Making Waves. 파격적이었지만 물 위에 거꾸로 매달린 드레스가 매우 아름다웠던)’ 전시에 대해 조곤조곤 예리한 감상평을 전했다. 그녀는 요즘 세상은 단순히 아름다운 옷만으로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치 않다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옷은 없어요. 그리고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모든 걸 볼 수 있죠. 박물관에 박제된 옷은 필요 없습니다. 입체적 3D, 가능하면 4D까지 시도해야 하는 시대죠.” 그러나 아무리 설치와 장식이 화려하다 한들 본질의 결핍을 채우는 게 불가능하듯 전시 자체의 질을 높이는 것은 단연 본질적 아름다움이다. 겹겹이 겹친 광목과 시폰, 프린지 등이 형태를 이루며 흐르는 실루엣, 이슬이 맺힌 듯한 크리스털 장식 등 어느 것 하나도 기십 년 전의 것이라는 단서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컬렉션을 막 시작할 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돌이켜 보면 젊었을 땐 디자인을 많이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점점 더 희석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다 떼어낸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다 덜어낸 상태에서 붙이는 것은 뭔가 붙여야겠다고 작정한 뒤 붙인 것과는 분명 다르죠.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듯한.” 진태옥은 젊을 땐 디자인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다며 과거를 회상하듯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제는 디자인하지 않았을 때 디자인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말을 이었다. “뭐가 다르냐고요? 그때는 지극히 평면적이었죠. 그래서 그 위에 자꾸 뭘 붙이려고 했다면 지금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입체적일 뿐 아니라 구조적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겁니다. 구조가 지닌 형태의 아름다움. 드디어 제가 아름다움의 본질을 알게 됐다는 기분이 드는군요.”

그녀는 옷을 매개체로 작업하는 예술가다. 스타일리스트 서영희는 이제 진태옥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첫 아트북 작업을 위해 2003년에 첫 만남을 가지기 전까지만 해도 ‘평생 저분과 만날 일은 없겠다’고 여겼다. “저와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 같았죠. 경희궁 앞에서 열린 광목 시리즈 전시를 보며 이런 옷을 만드는 사람은 생각이 너무 심오해서 나와 만날 일 따윈 없을 거라고 말이죠.” 2003년부터 착수에 들어간 아트북 작업을 계기로 신뢰가 두터워지기 시작했고 이제 그녀는 진태옥의 가장 큰 조력자다. 그리고 진태옥이 그녀에게 미친 현대미술,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는 서영희가 스타일리스트로서 한국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게 된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의 사유가 넓어지는 계기가 됐죠. 삶에 있어 주어진 세상을 얼마만큼 좋은 안목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게 사람들이 종교나 철학을 갖는 이유기도 하죠. 현대미술이나 음악을 폭넓게 감상하며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그 삶을 전체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 저만의 화보 스타일이 정착한 것도 그 덕분이죠. 낯선 갤러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설치 작품을 보며 ‘이 작가는 세상을 이렇게 표현했고, 이런 방식으로 대중과 소통하는구나. 나도 내 방식대로 이야기를 풀 수 있겠다’라고 깨닫곤 했으니까요. 상상력의 범위가 더 넓어진 겁니다.”

그녀는 진태옥의 전위적이고도 아름다운 옷은 소재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평했다. “디자이너들은 물성을 다루는 사람들이고 그 물성을 이겨내야만 디자인이 나옵니다. 컬렉션을 보고 잘했다고 평가하는 건 디자이너가 그 물성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걸 느끼는 거죠. 스타일리스트로서 저의 소재는 디자이너들의 옷입니다. 디자이너들이 물성을 얼마나 이해했느냐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이 셔츠를 보세요. 프릴처럼 보이지만 일일이 천을 바이어스로 잘라서 한데 묶은 겁니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소재의 면뿐 아니라 직조까지 꿰뚫고 있다는 걸 보여주죠. 10가지 테마 중 ‘콰이어트’에 속하는 블랙 도트 시리즈는 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면으로 만든 큰 형태, 그리고 그 형태에서 생기는 공간. 옷감을 ‘배려’하면서 디자인한 게 느껴져요. 요즘 디자이너들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죠. 이거야말로 오뜨 꾸뛰르가 아닐까요?”

 

<보그> 패션 디렉터 신광호는 작품을 신선한 시각으로 표현할 사진 작가 다섯 명을 선정했다. 그는 40주년에 출간된 <Beyond Nature>가 예술성 강한 아트북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 <Jinteok: Anthology>는 젊고 동시대적 이미지의 패션북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책의 초점은 진태옥이라는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이너 진태옥이 만든 옷이 주인공(그래서 진태옥의 포트레이트 사진도 과감하게 뺐다). “모델이 등장하더라도 인물로서의 캐릭터를 배제한 마네킹으로 존재합니다. 전체적으로 조형적이고 건축물 같은 이미지를 완성하는 게 중요했으니까요. 진태옥의 옷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사진가 신선혜는 광목을 수백 겹 쌓은 진태옥의 대표작으로 구성된 ‘어스’를 촬영했다. 사막의 몇천 년 된 바윗덩어리가 세월에 마모된 채 놓인 것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이너가 시간의 흐름과 켜켜이 쌓인 역사를 표현한 의상이다. “사실 ‘어스’는 옷 자체를 오브제로 활용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과감한 형태, 겹겹이 쌓인 옷감은 제가 생각하는 디자이너 진태옥의 이미지와 가장 가까웠죠. 그분은 늘 커다란 나무처럼 묵직하고 단단해 보였거든요. 형태를 극대화하기 위해 콘트라스트를 주제로 잡았고 기대한 것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가 완성됐습니다.”

사진가 김석준은 촬영을 준비하면서 진태옥에 대한 공부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주제는 ‘에어’와 ‘나이트’, ‘스타’. “진태옥의 옷처럼 미니멀하면서도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작업이 목표였습니다. 블랙과 베이지라는 색감에 주목했죠. 사진 전체를 동일한 톤으로 맞춰 언뜻 밋밋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디테일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진태옥의 시그니처와 같은 셔츠 컬렉션은 주용균에게 돌아갔다. “여자한테 화이트 셔츠란 뭘까?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연령에 상관없이 모든 여자에게 잘 어울리는 것, 우아하면서도 섹시하고, 단정하지만 고급스러운 옷. 그래서 순수한 소녀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아름다운 옷은 실제로 사람이 입었을 때 가장 돋보이니까요.”

사진가 안주영이 사진 속에 담아낸 크리스털이 영롱하게 장식된 ‘던’과 붉은 활옷 에이프런 드레스 ‘블러드’는 누구보다도 옷에 대한 깊은 고민과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그분의 작업에는 늘 ‘고요함’과 ‘동양미’가 존재하죠. 선명한 이미지보다는 그림 쪽과 어울린다고 느껴서 크리스털의 화려한 반짝임을 번진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그는 서양 옷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반면, 동양 옷은 사람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옷이라는 패션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작은 움직임으로도 우아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무용 경력이 있는 모델을 섭외했죠. 모델이 가만히 서 있을 때도 바람을 일으켜 활옷 부분에 움직임을 의도했습니다.” 신체를 부분적으로 클로즈업한 ‘블러드’는 활옷을 빈티지 처리해 데님과 매치한 룩으로 진태옥의 파리 컬렉션 시절 반향을 일으킨 의상.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미지는 오히려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디자인의 모던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목정욱은 ‘브리즈’와 ‘콰이어트’를 촬영하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시간의 흐름을 의심케 하는 의상은 마치 늙지 않는 뱀파이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니까. “배우 정은채와 작업한 ‘콰이어트’는 항아리 같은 옷의 실루엣과 볼륨감, 빛이 그 공간을 투과하면서 만들어내는 인상, 사람이 움직일 때 검은 점이 만들어내는 잔상을 포착했습니다.”

모두가 경의를 표하는, 고목 같은 거장의 눈에 지금 한국 패션계는 어떻게 비칠까? “디자이너들은 각자 자신의 목표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맞춰가고 있겠죠.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도 어려워요. 팔리는 옷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데다, 컬렉션 후에는 어김없이 현실이 닥치니까요. 요즘은 다들 똑똑하니까 자기 앞가림 잘할 거예요. 연륜이 쌓이면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 자신의 정체성과 성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거고요.” 다만 패션쇼를 발표할 때만큼은 성의를 다하길 원한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완성된 컬렉션이 상업적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현실에 맞춰나가면 되죠. 그렇지만 쇼를 준비하지 않으면 매장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진태옥은 전시 준비가 끝나면 곧장 봄 컬렉션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며 자신의 마음은 저만치 봄에 가 있다고 살짝 미소 지었다. 패션계에 맞춰진 그녀의 시계 역시 쉴 틈 없이 너무 빨리 흐른다. 그러나 늘 일할 수 있기에 디자이너라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이번 작업을 위해 의기투합한 인물들이 정말 고맙고 예쁘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냐는 마지막 질문에 진태옥은 눈을 반짝인 채 힘을 실어 단어를 발음했다. “앤솔로지! 수지 멘키스처럼 관람객들도 옷으로 만든 저의 시를 느낄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