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츠 수트 입는 여자

남자의 ‘수트빨’만 여심을 건드리진 않는다. 디자이너들이 우리 여자들을 위해 팬츠 수트를 준비했다. 바야흐로 팬츠 수트 입는 여자의 시대!

 

카라 델레빈과 퍼렐 윌리엄스가 함께한 샤넬 ‘파리-잘츠부르크’ 컬렉션 캠페인, 분홍 여성용 코트 차림의 조니 요한슨의 아들이 등장한 아크네 스튜디오 가을 광고, 모델 수주가 ‘훈남’으로 변신한 준지 캠페인, 그리고 성전환 이후 더 활발하게 일하는 모델 안드레아 페직… 최근 패션계 최고의 이야깃거리는 ‘젠더리스(Genderless)’다.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을 비롯해 많은 디자이너는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남성복 쇼에 여자 모델, 여성복 쇼에 남자 모델이 등장하는 건 필수!). 사실 이런 ‘성 중립’ 사조에서 더 화제가 된 쪽은 남자에게 여자의 옷장을 개방한 경우였다(구찌의 레이스 블라우스부터 굽이 8cm가 넘는 생로랑의 앵클 부츠까지). 그러나 여자에게 남자의 옷장을 개방한다면? 맨 먼저 팬츠 수트가 지목될 것이다. 말 그대로 ‘수트 빨’의 정석으로 우리 여자들의 마음을 뒤흔든 영화 <킹스맨>을 떠올려보시라.

남자 못지않게 ‘수트빨’이 끝내준 여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30년대 영화 <Morocco>로 스타덤에 오른 독일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 <Woman of the Year>에서 스포츠 기자로서 남자 동료들과 다름없이 수트 룩을 즐기던 캐서린 헵번, 셔츠와 타이까지 제대로 챙긴 수트 룩만으로도 관능적이었던 브리짓 바르도, 그리고 결혼식에서조차 웨딩드레스 대신 수트를 선택해 화제였던 비앙카 재거까지. 무대든 레드 카펫이든 날렵한 수트와 중절모, 지팡이 하나만 있으면 누구보다 거침없고 당당했던 마돈나는 또 어떤가.

 

‘수트 여전사’가 아닌 우리 같은 보통 여자의 눈에 팬츠 수트가 눈에 띄기 시작한 건 60년대 말부터다. 그런 뒤 70년대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턱시도 수트를 여성용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헬무트 뉴튼의 사진 속에서 더없이 관능적으로 표현되었다,) ’ 80년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오버사이즈 수트(80년대 광고는 늘 남녀 모델이 함께 팬츠 수트를 맞춰 입은 모습), 그리고 90년대 헬무트 랭, 질 샌더 스타일의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고 늘씬한 미니멀리스트 스타일 등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이 모든 스타일을 망라한다. 벨벳과 새틴을 이용해 70년대 턱시도 수트를 재현한 크리스토퍼 케인, 휴고 보스, 풍성한 80년대 실루엣의 끌로에, 스텔라 맥카트니, 그리고 90년대풍의 시가렛 팬츠가 인상적인 루이 비통, 베르사체 등등.

 

여기에 이번 시즌만의 양념을 더한 레이블은? 디올의 라프 시몬스는 ‘월 스트리트 보이프렌드 재킷’이라 지칭한 클래식 재킷과 크롭트 팬츠, 앵클 부츠의 매치를 다양한 색상 조합으로 선보였다. 또 케이티 힐리어와 루엘라 바틀리 듀오는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 마지막 컬렉션을 위해 광택이 도는 폴리에스테르와 벨벳으로 수트를 준비했다(새빨간 셔츠와 금상첨화). 그런가 하면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짧은 소매에 밍크 트리밍을 더했고, 프라발 구룽은 허리와 소매의 컷아웃에 레이스를 덧대 시스루 효과를 선사했다. 이브닝웨어와 스포츠웨어의 경계에 있는 프라다, 재킷을 케이프로 변형한 마이클 코어스 역시 눈길을 끄는 수트 룩.

돌이켜보면 꽤 오랫동안 패션계에서는 상·하의를 한 벌로 맞춰 입는 것보다 각각 따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왔다. 완벽하게 재단된 재킷과 찢어진 데님 팬츠를 매치하거나 시가렛 팬츠 위에 셔츠나 재킷 대신 맨투맨 티셔츠를 입는 식의 ‘믹스매치’야말로 패셔너블한 수트 스타일링으로 여긴 것. 게다가 여러 패션지에선 ‘수트의 종말’에 대해 기사를 쓰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트 그 자체로 돌아갈 시기다. ‘동일한 소재의 재킷과 팬츠로 이뤄진 룩’이라는 팬츠 수트의 정의답게 상·하의를 한 벌로 쫙 빼입는 것 말이다. 물론 재킷과 팬츠를 제외한 아이템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스타일링할 수 있다(꼭 셔츠와 넥타이, 옥스퍼드 슈즈를 신을 필요는 없다). 스포티한 집업 점퍼를 레이어드하거나(랙앤본), 재킷을 두 벌 겹치거나(톰 브라운), 멜빵과 그물 스타킹을 곁들이거나(생로랑), 맨살에 재킷만 입어 가슴골을 훤히 드러내거나(지지 하디드와 리타 오라).

 

여자들이 팬츠를 입고 공공장소에 가는 게 법으로 금지된 시절에는 여권신장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보란 듯이 팬츠 수트를 입었다.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해진 뒤부터는 남자와 다름없이 일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팬츠 수트를 입었지만, 이젠 성 중립을 초월한 영속성을 지닌 멋을 위해 팬츠 수트를 입는 시기다. 엘런 드제너러스는 온통 팬츠 수트로 구성된 자신의 여성복 컬렉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아마 킴 카다시안은 제가 만든 옷을 입지 않을 거예요. 레즈비언들이나 팬츠 수트를 입는다는 농담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완벽한 팬츠 수트라면, 모든 여자의 옷장에 한 벌쯤 있을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