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가방

중간만큼 비겁하고 우유부단하며 타협적인 게 또 있을까? 그러나 지금 패션계에서는 ‘중간’이 가장 패셔너블하다.아주 비싸거나 아주 싸지 않은 중간 가격대 가방은 단연 백 마켓의 미드필더다.

축구장의 미드필더처럼 백 마켓에서 활약 중인 중간 가격대의 가방들! 위부터 3.1 필립 림(3.1 Phillip Lim)의 파실리,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Michael Michael Kors)의 셀마, 생로랑(Saint Laurent)의 카메라, 발렌티노(Valentino)의 락 스터드 클러치와 크로스보디, 아래 두 가방은 코치(Coach)의 스웨거.

축구장의 미드필더처럼 백 마켓에서 활약 중인 중간 가격대의 가방들! 위부터 3.1 필립 림(3.1 Phillip Lim)의 파실리,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Michael Michael Kors)의 셀마, 생로랑(Saint Laurent)의 카메라, 발렌티노(Valentino)의 락 스터드 클러치와 크로스보디, 아래 두 가방은 코치(Coach)의 스웨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샤넬이나 에르메스 백 외에는 전혀 돈을 쓸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빚을 내 가방을 사면서(아직 있지도 않은) 딸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이유로 위안을 삼거나 예약을 걸어놓은 채 두 손에 실물을 쥐는 그날까지 달력에 X표를 치고 하루 하루를 고대하며 지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MTO처럼 오래 고민하고 많은 돈을 들여 손에 넣은 그 가방은 의외로 꽤 많은 사람이 드는 것을(심지어 똑같은 디자인으로) 종종 보게 된다. 가끔 사람들이 내 팔에 걸친 가방을 짝퉁으로 보진 않을지 염려될 정도. 게다가 육체적 노동(할부를 갚기 위한)과 정신적 고뇌(살까, 말까?)의 집결체인 이 가방을 어둑한 지하 클럽에서 어떻게 다룰지도 모를 딸과 공유한다니! 정말 그럴 마음의 준비가 돼 있나? 무엇보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혹은 이 모든 것을 알기엔 너무 어린 딸이 과연 기쁘게 받아들일지도 알 수 없다.

패션으로 부를 과시하는 시대는 지났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고루할 정도로 말이다. 예를 들어 여전히 로고 플레이는 존재하지만 그건 예전처럼 과시용이 아닌, 90년대 패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하나의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들이 화려한 하이힐로 가득했던 신발장을 납작한 스니커즈와 플랫 슈즈로 다시 채우고 있는 것처럼, 가방도 ‘보여주기용’에서 무엇이든 쑤셔 넣고 부담 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실용성으로 선택의 기준이 이동하고 있다. “애티튜드가 바뀌었죠. 여자들은 더 이상 ‘영원한’ 가방을 찾지 않아요.”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의 액세서리 바이어 엘리노어 로빈슨의 말처럼, 품질과 가격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50만원대 이상 100만원 초반의 중간 가격대 가방이 백 마켓에서 급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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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스닷컴(yoox.com)에서 한국 마켓을 담당하는 마케팅 담당자 미셸 황은 전 세계 매출과 비교할 때 한국이 특히 중간 가격대(350~800유로) 가방에 대한 호응도가 높다고 전했다. “오프시즌 제품을 중심으로 계속 할인되는 사이트 특성에도, 세일에 들어간 하이엔드 제품보다 중간 가격대의 컨템퍼러리 브랜드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녀가 언급한 인기 브랜드는 겐조, 모스키노, 알렉산더 왕, MSGM 등등. “기존 하이엔드 브랜드보다 트렌디하다는 인상을 주면서 보다 합리적 가격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죠.” 한때 매 시즌 최신 컬렉션으로 차려입고 쇼장 앞에 나타나던 러시아 잇 걸 엘레나 페르미노바도 ‘에르메스 버킨 백은 너무 비싸서’ 갖고 있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요즘 추세다. 영국 <텔레그래프>지의 패션 에디터 캐롤린 에이섬에 따르면 2012년 말부터 중간 가격대 가방이 개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있는 인물이 마이클 코어스다. “정확히 말하면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 라인입니다. 30만~80만원대 초반, 평균 가격대는 50만~70만원 사이죠. 3~4년 전만 해도 100만원대 미만의 디자이너 가방이 거의 없었기에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마이클 코어스 코리아의 오윤하 과장은 사첼, 쇼퍼, 토트, 크로스보디 등 종류도 다양할 뿐 아니라 라인 역시 다양하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매 시즌 새로운 색상을 추가하거나 버킷 백처럼 트렌디한 디자인을 즉각적으로 반영하기에 선택의 폭이 넓죠. 게다가 가격적 부담이 적으니 큰 고민 없이 살 수 있어요. 원래는 20대 초·중반을 타깃으로 했지만 실제 주 고객층은 실용성을 따지고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입니다.” 참고로 마이클 코어스의 컬렉션 의상을 구입하는 이들과는 구별된다. “가방은 런웨이에 등장한 디자인도 200만원을 넘지 않는 반면, 컬렉션 RTW는 스웨터 하나에 최고 1,000만원을 호가합니다. 컬렉션 의상을 구입하는 분들은 다른 브랜드에서 고가의 가방을 구입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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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격대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 중요한 건 적당한 가격만큼 매력적인 디자인이다. 파페치(farfetch.com)의 패션 디렉터 알라나 스팍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가격대 제품은 품질과 디자인에 있어 충분히 좋은 수준에 도달했기에 모노그램 같은 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 카테고리에서는 패셔너블한 디자인에 대한 호응도가 높다. 런던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편집숍 애비뉴 32(avenue32.com)의 공동 설립자 로베르타 벤텔러는 제롬 드레이퓌스의 번트 오렌지 컬러 프린지 마리오 백, 녹색이나 금색의 3.1 필립 림 파실리 백이 100만원대 전후 가방군에서 즉각적 반응을 얻고 있다고 확인해줬다. 최근 소피 흄, 만수르 가브리엘 같은 독립 디자이너 백이 세계적으로 히트 친 것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예다. 특히 만수르 가브리엘은 네타포르테에 최신 모델을 올리자마자 당일 아침 매진 사례를 이루는가 하면, 구하려면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중간 가격대의 에르메스 격이다. “컨템퍼러리 가격대에서 품질이 좋은 브랜드는 많지 않아요.” 플로리아나 가브리엘과 함께 브랜드를 이끄는 레이첼 만수르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주문량이 지나치게 많아 질이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아요.”

마이클 코어스와 함께 중간 가격대를 이끌어온 쌍두마차 코치는 스튜어트 베버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성공적으로 이 추세에 합류했다. 코치 코리아 이혜진 부장은 40대에서 30대로 고객층이 젊어짐과 동시에 메인 아이템도 달라졌다고 전한다. 패브릭 소재의 시그니처 백 시리즈에서 가죽 백인 스웨거로의 이동이다. 시그니처 백은 50만~60만원대의 낮은 가격에 실용성을 갖췄지만 스웨거는 패셔너블한 디자인에 가죽 백치곤 꽤 합리적인 70만~100만원대로 판매된다. 코치의 경우엔 ‘모던 럭셔리’로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면서 중간 가격대에서 디자인과 소재의 수준을 좀더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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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천정부지로 백 가격을 높이는 데 주력하던 하이엔드 브랜드는 중간 가격대의 엔트리군을 넓히는 데 눈을 돌리는 중. “점점 더 많은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그들의 가격 구조를 다변화하고 있습니다.” 네타포르테의 핸드백 바이어 빌리 패리시 하이엣의 말처럼 생로랑, 구찌, 끌로에, 발렌티노에서도 100만원대 가방을 선보이고 있다. 발렌티노가 락 스터드에 이어 선보인 메인 백은 350만원대의 마이 락 스터드 백이지만, 한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건 단연 베스트셀러인 150만원대 락 스터드 클러치. 생로랑 코리아 역시 작년까지만 해도 360만원대 삭 드 주르의 인기가 독보적이었지만 올해부터는 100만원대 엔트리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20대 젊은 층에게 인기가 많은 깜찍한 사이즈의 120만원대 크로스보디 카메라 백과 심플한 120만~180만원대 쇼퍼백.

어느 하이엔드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는 요즘 ‘명품’ 브랜드군에서는 중간 가격대, 혹은 엔트리 가격이 200만원대라고 귀띔했다. 브랜드의 대표적 모델이라고 하면 400만~500만원대도 호가하는 게 요즘 추세. 중간 가격대 가방이 지닌 활기찬 모습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일반인들이 닿을 수 없는 수준으로 가격을 높여 러시아 집권층이나 중국의 슈퍼리치 같은 초상류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고가 전략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히 퇴폐적으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은 합리적인 소비에 눈을 뜨게 됐다. 덕분에 가방 시장 역시 더 활발해지는 추세. 이거야말로 양심의 가책 없이 기꺼이 동참해도 좋을 유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