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쌀한 남자, 박해진

수상한 남자의 등장이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에서 박해진은 모두가 알지만 실은 아무도 모르는 ‘남주’가 되었다.

니트는 톰 포드(Tom Ford), 스카프는 더 스튜디오 케이(The Studio K), 팬츠는 카루소(Caruso), 벨트는 생로랑(Saint Laurent), 신발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

니트는 톰 포드(Tom Ford), 스카프는 더 스튜디오 케이(The Studio K), 팬츠는 카루소(Caruso), 벨트는 생로랑(Saint Laurent), 신발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

‘다다다닥’과 ‘부들부들’, ‘킬킬킬’과 ‘헹헹헹’과 같은 요상한 의태어와 외계어가 뒹구는 세계. 웹툰 <치즈인더트랩>은 오글거림 로맨스의 대명사 같은 작품이다. 대학 캠퍼스를 배경으로 천방지축의 ‘여주’ 홍설(김고은)과 모든 여학생이 선망하는 유정(박해진)이 아주 조금씩, 아슬아슬 연애를 시작하고, 그 주변에선 우정과 사랑, 시기와 질투가 캠퍼스 드라마 특유의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다. 만화의 네모칸 안에서나 일어날 법한 청춘 판타지극. 하지만 웹상에서의 반응은 뜨거워 2010년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시즌을 거듭하며 현재 네 번째 시즌을 연재하는 중이고, 편당 조회 수가 무려 100만 뷰를 넘겼다. 자연스레 드라마 제작 이야기도 돌아 수년째 소문만 일다 결정된 게 지난해. 웹툰의 독자들은 나름의 출연 배우를 점치며 ‘치인트 놀이’를 즐겼고, 다양한 버전의 캐스팅 보드가 돌아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건 단연 긴 팔다리와 수려한 외모로 미스터리한 기운을 풍겨야 하는 ‘남주’ 유정이다. 외자 이름이라 마치 성(姓)도 없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유정은 가슴 한쪽에 비밀을 숨긴 이면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꼭 고유명사 같죠? 만화로 봤을 때는 그래도 2D니까 이런저런 면을 엿볼 수 있는데 연기하며 3D로 표현하면 그냥 단순한 이중인격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근데 유정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모두 다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약간은 가면을 쓰고 있고, 본심을 드러내지 않을 때도 있고. 다만 유정은 그게 좀 극명하게 표현된 캐릭터인 거죠.” 그리고 이 아리송한 역할에 웹툰 독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박해진을 거론했다. 마치 유정의 이름이 본래 ‘박’유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코트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티셔츠와 데님 팬츠는 랙앤본(Rag&Bone at Beaker), 벨트는 생로랑(Saint Laurent), 신발은 파라부트(Paraboot)

코트는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 티셔츠와 데님 팬츠는 랙앤본(Rag&Bone at Beaker), 벨트는 생로랑(Saint Laurent), 신발은 파라부트(Paraboot)

<치즈인더트랩>에서 유정은 선배이자 오빠, 형이지만 사실 박해진은 ‘연하남’의 대명사였다. 데뷔작 <소문난 칠공주>에선 아예 애칭 자체가 ‘연하남’이었고, <내 딸 서영이>에선 주인공 서영이의 쌍둥이 남동생 역이었다. 순하고, 반듯하며, 올곧은 캐릭터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그를 ‘연하남’으로 품었다. 하지만 2014년 박해진은 반항이라도 하듯이 무겁고 거친 두 편의 드라마 <나쁜 녀석들>과 〈닥터 이방인>을 찍었다. <나쁜 녀석들>은 강력 범죄를 저지르던 이들을 모아 더 악질적인 범죄를 추적하는 수사물이고, <닥터 이방인>은 병원 내 의사들의 질펀한 경쟁과 복수가 뒤엉킨 메디컬 드라마다. 박해진은 그저 착해 보이던 웃음을 지우고 사이코패스의 살인마(<나쁜 녀석들>)를 연기했고, 순박한 표정을 거둔 뒤 복수를 다짐하는 의사(<닥터 이방인>)가 되었다. “딱히 기존의 캐릭터가 지겹다고,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사실 배우라는 게 자기 색 하나만 지니기도 힘든 거잖아요. 여러 가지 색깔 찾겠다고 헤매는 것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하나만 제대로 하는 것도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해진은 수년 전 모 인터뷰에서 자신을 두부 같다고 표현한 적도 있다. “다만 유약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있었어요. 제가 데뷔할 때는 지금보다 더 말랐고, 피부도 하얘서 운동도 하고, 주기적으로 태닝도 했어요. 그리고 이제 저도 30대인데, 연하가 아닌데 ‘연하남’인 것도 난감하잖아요.(웃음)” 확실히 촬영을 위해 옷을 갈아입는 사이 엿본 그의 다리는 꽤나 탄탄했다. 그리고 <치즈인더트랩>에서 박해진은 더 이상 결코 두부 같지 않다.

흰색 니트는 베르사체(Versace)

흰색 니트는 베르사체(Versace)

<내 딸 서영이>부터 <치즈인더트랩>까지 쉴 틈 없이 달려온 3~4년 전, 박해진에겐 뜻하지 않은 공백기가 있었다. 무혐의로 확정됐지만 병역관련 의혹이 일면서 활동을 잠시 접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아픔의 시간을 박해진은 기회의 땅에서 나름의 수확을 올리는 계기로 만들었다. <소문난 칠공주>가 중국에서 방영되면서 대륙 진출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후 박해진은 중국 데뷔작인 로맨스물 <첸더더의 결혼 이야기>를 찍었고, 꾸준히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다섯 편의 중국 드라마를 더 찍었다. “생각도 해보지 않은 길이었어요. 근데 배우라는 직업이 누군가의 선택을 받는 일이고, 일이 있다는 건 감사한 거죠.” 하지만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나라에서 드라마의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국 드라마 현장에선 외국인 배우의 언어 능력을 고려해주지 않는다. “저는 한국어로 연기를 하고, 거기에 중국어 더빙을 입히는 식이에요. 그래서 처음엔 정말 많이 헤맸죠. 감정 신에서 대사를 열심히 주고받았는데, 신이 끝나도 대사 하나가 남은 거예요.(웃음) 그럼 뭐 하나 빠졌다는 거잖아요. 근데 감독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래도 이제는 그 통역되지 않는 현장 덕에 적응력이 늘었다. 올 초까진 <닥터 이방인>을 찍은 진혁 감독과 중국에서 <남인방-친구>를 찍었고, <치즈 인더트랩〉의 촬영이 끝나면 또 다른 중국 영화와 드라마를 위해 대륙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제가 한류 스타로 중국에 간 거면 이렇게 활동을 계속할 순 없었을 거예요. 근데 저는 작품으로 현지 맨땅에 헤딩하듯 갔고, 다행히 작품이 사랑을 받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박해진의 출연 드라마 <또 다른 찬란한 인생>과 <애상사자좌>는 중국에서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다. 그의 웨이보 팔로워는 400만에 이른다. 이젠 더이상 ‘연하남’으로 품고 있기엔 너무나 거대한 스타가 된 셈이다.

박해진은 신인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2006년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로 KBS와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뒤 2007년 드라마〈하늘만큼 땅만큼>으로 우수상을 탔고, 이듬해 다시 MBC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상이야 많이 받을수록 좋은 일이겠지만, 세 번의 신인상은 그만큼 그의 ‘라이징’ 기간이 길었다는 얘기도 된다. 미니시리즈보다 주말 연속극과 일일극에 머물렀고, 꽤 오랜 시간 ‘서브남’의 시간도 가졌다.<소문난 칠공주>에선 이승기가 있었으며, <내 딸 서영이>에선 이상윤이, <별에서 온 그대>에선 김수현이 그의 곁에 있었다. “이제 제가 10년차더라고요. 근데 그래도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다행이라 봐요. 아직도 갈 길은 9만 리지만 조금씩 한 작품 한 작품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에 다가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달까요.” 무엇보다 박해진은 솔직하다. 거짓 허세를 부리거나 스타의 고집을 부리지 않고 스스로에게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한다. “20대 초반에는 얼른 서른이 되고 싶었어요. 서른만 되면 미간에 주름도 생길 것 같고, 남자 냄새 물씬 풍길 거라 생각했죠. 근데 막상 서른이 되어보니 나이만 먹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이 솔직함이 유연함을 길러냈다.

흰색 니트와 팬츠는 베르사체(Versace), 에이프런과 슈즈는 코스(Cos)

흰색 니트와 팬츠는 베르사체(Versace), 에이프런과 슈즈는 코스(Cos)

<치즈인더트랩>을 찍으면서도 그는 후배인 김고은과의 합이 재미있다고 했다. 브라운관 경험이 없는 그녀의 연기가 유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치즈인더트랩>의 이윤정 PD님이 고은 씨는 드라마가 처음이면서 30년 한 것 같다고 했어요. 앵글을 크게 쓰더라고요. 근데 저는 브라운관에만 있었던 사람이잖아요. 제 연기를 돌아보게도 됐고, 재미있게 찍고 있어요.” 게다가 <치즈인더트랩>에서 박해진과 함께 출연하는 다른 남자 배우는 올해 스물세 살 서강준과 스물두 살 남주혁. 90년대생 틈에서도 박해진은 초조해하지 않는다. “처음엔 CG 감독님께 제 피부만 블러로 밀어달라고 얘기할까(웃음) 싶기도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또 유정은 극 중에서도 홀로 약간 떨어져 있는 느낌의 캐릭터기도 하고요.” 견고하게 다져온 연기 경력은 ‘화면발’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연하남’의 두부 같기만 하던 남자 박해진의 괄목할 성장이자 연기 10년 차 고지에서 찾아낸 너른 풍경. 유약한 동생은 이제 어엿한 오빠가 됐다.

재킷, 베스트, 팬츠는 모두 김서룡(Kimseoryong), 니트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양말은 언더커버(Undercover at Ecru), 신발은 버버리(Burberry)

재킷, 베스트, 팬츠는 모두 김서룡(Kimseoryong), 니트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양말은 언더커버(Undercover at Ecru), 신발은 버버리(Burber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