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여배우 김고은

‘은교’는 미스터리한 암시에 불과했다. 미지의 환영처럼 다가온 여배우 김고은은 지금 질퍽한 현실을 뛰고 구른다. 사채업 세계의 잔혹함을 그린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그녀는 또 한 꺼풀을 벗었다.

검정 가죽 조끼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시폰 스커트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검정 스틸레토 스트랩 힐은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검정 체인 링은 엠주(Mzuu).

검정 가죽 조끼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시폰 스커트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검정 스틸레토 스트랩 힐은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검정 체인 링은 엠주(Mzuu).

시인의 품을 떠나 온 소녀는 현실의 질곡에 착지했다. 노시인 이적요의 서정에서 유려하게 유영하던(<은교>) 김고은은 어느새 억척스러운 가장이 되어 피범벅의 고난을 뒹굴었다(<몬스터>). 뒤이어선 무협의 강인한 여자로 변신을 도모했고(<협녀, 칼의 기억>), 도복 자락을 벗고는 검사가 되어 살인 사건 한복판에 뛰어들었다(<성난 변호사>). 마치 시집 속의 세상이 답답하기라도 한 듯 앞뒤 살피지 않는 대담한 행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태어났다. 10번이라 쓰인 코인 로커에서, 엄마, 아빠도 없이 세상에 떨어진 김고은은 일수의 숫자 놀이가 지배하는 세상 ‘차이나타운’의 딸이 되었다.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그녀의 이름은 코인 로커의 번호 10을 한글로 읽어 일영이고, 그녀의 삶을 좌우하는 건 차이나타운의 대모로 군림하는 유사 엄마(김혜수)다. 신분증마저 가짜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배우 김고은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다시 한 번 고행을 산다.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윽박지르고, 힘과 오기로 버티는 험한 채무자들을 상대하며 뺨도 맞는다. 족보 없이 태어난 생이 취해야 할 생존 방식이고, 대모의 삶을 목적지로 둔 고난한 수행의 길이다. 시 속의 소녀를 졸업한 이 여자의 현실은 이렇게나 독하고 거칠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발 벗고 나서는 <몬스터>, 그리고 5월 개봉하는 <차이나타운>과 하반기 개봉을 기다리는 영화 <성난 변호사>와 <협녀, 칼의 기억>. 근래 김고은의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판타지의 오솔길에서 급커브를 튼 질퍽한 진흙길이다. <성난 변호사>에서 김고은은 사건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변호사(이선균)와 맞서며, 무인 시대의 난국을 그린 영화 <협녀, 칼의 기억>에선 주인공 설랑을 연기한 전도연의 딸이 되어 검을 휘두른다. 돈의 잔혹한 논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차이나타운> 역시 자갈 버석거리는 험한 길이다. “<은교>를 의식하며,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를 고르진 않았어요. 아직은 ‘어떤 건 하고, 어떤 건 하고 싶지 않다’의 기준이 없어요.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더 쌓이면 이러저러한 책임감 때문에 (작품을 고르며) 스스로 제약을 두겠죠. 근데 아직은 그저 더 도전해보고 싶고, 더 실험해보고 싶어요. 벌써부터 스스로에 대해 제약을 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검정 시스루 톱, 허리 비즈 장식, 쇼트 팬츠는 모두 발렌시아가(Balenciaga).

검정 시스루 톱, 허리 비즈 장식, 쇼트 팬츠는 모두 발렌시아가(Balenciaga).

무려 세 편의 영화가 개봉 대기 중인 김고은은 5월부턴 윤여정과 함께 영화 <계춘할망>을 찍는다. 사고로 헤어졌다 10년 만에 재회한 할머니와 손녀의 훈훈한 드라마다. 시집의 울타리를 넘어 그녀는 잠시 험한 악몽의 현장을 누볐다. 그리고 이젠 할머니의 품을 향하고 있다. 이런 경로에 흔히 따라붙는 액션 스타로의 전환, 강한 이미지로의 변신 같은 빤한 수식어를 가볍게 튕겨내는 품새다. 거친 진흙길 뒤 또 어떤 길이 이어질지 아직은 그녀도, 우리도 모르고 있다.

<차이나타운>을 만든 한준희 감독은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일영은 김고은을 생각하며 쓴 캐릭터라 말했다. <은교>의 원작자인 소설가 박범신은 영화 속에서 은교가 등장하는 장면을 책의 문이 열려 그 안에서 소녀가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여배우 김고은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피사체다. <은교>의 연출자 정지우가 영화의 메인 역할을 당시 초짜 배우였던 김고은에게 덜컥 맡긴 건 분명 그녀에게서 어떤 미지의 영역을 보았기 때문이고, 한준희 감독이 김고은을 떠올리며 일영이란 인물을 만들어갈 수 있었던 건 여배우 김고은이 불러일으키는 내레이션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백지 같은 얼굴, 슬픔도 분노도 잘 드러내지 않는 아리송한 표정의 김고은은 그렇게 많은 감독의 도화지가 됐다. “저는 뭐랄까. 이해의 폭이 넓다고 해야 하나. 웬만하면 다 이해가 돼요. 물론 감독님의 디렉션이 이해가 안 가는 순간은 있어요. 하지만 그 디렉션을 요구하는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면 괜찮아요. ‘이건 싫어요’ ‘이해 못 하겠어요’의 반응이 아니라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공감대의 반응이죠.” 그리고 이 이해의 폭이 배우 김고은에게서 자꾸 새로운 드라마를 끌어내고 싶게 한다. 가령 <몬스터>에서 김고은은 복수를 위해 질주하면서도 내면의 꿍꿍이를 품고 있는 소녀의 다소 어리숙한 세상을 그렸고, <차이나타운>에선 치열한 생존의 길 깊숙이 엄마 없는 고아의 고독함을 찔러 넣었다. 슬픔, 기쁨, 분노 어느 감정 하나 쉽게 단정하지 않고, 액션, 멜로, 공포, 스릴러 어느 장르 하나 쉽게 제한하지 않는 너른품이, 배우 김고은에게는 있다.

검정 시스루 톱, 허리 비즈 장식, 쇼트 팬츠는 모두 발렌시아가(Balenciaga).

김고은은 올해 스물다섯 살이다. 네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중국에 건너가 살았고, 중학생 무렵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의 중·고등학생이라면 다들 하는 자율 학습도, 과도한 사교육도 받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 아빠가 챙겨다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빤한 교육 시스템 안에서 자라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 굉장히 답답했고,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예고를 미친 듯이 찾았죠. 제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면 사달이 날 것 같았어요.(웃음) 그렇게 계원예고를 알아냈고 ‘난 여기를 가야겠다’ 생각했죠. 안양예고도 생각은 있었지만 교복이 계원예고가 더 예뻤어요.” 그 예쁜 예고에서의 생활이 그녀에게 배우의 문을 열어줬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지만 사실 진로로선 “어떤 파트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가늠이 안 돼” 사진 찍기를 고려했던 김고은은 비교적 자유롭고 영화, 연기와 가까이에 있었던 예고에서의 시간을 보내며 “연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모님이 ‘너는 표현하는 자리가 어울릴 것 같다’고 하셨어요. 공연을 해보니 저도 그런 마음이 들었고요.” 미국의 극작가 손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 읍내>가 그런 마음에 불을 지폈다. ‘카르페 디엠, 지금 살고 있는 현재에 충실하라’는 뜻의 명언을 남긴 이 작품은 삶의 추이를 따라가며 인간의 본질을 그린 드라마다. 그리고 이 명언은 그저 영화 좋아하던 어린 소녀에게도 한 수 가르침이 됐다. 예고 여학생 김고은은 이 무대를 계기로 배우를 배웠다.

사실 김고은은 예고에서 연극을 처음 해본 뒤 너무 겁이 나 영화 쪽으로 전공을 돌리려 했단다. “심장이 아픈 거예요. 이걸 직업으론 못하겠다 싶었죠. 근데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한 번 더 해보자고 하셨고, 그렇게 한 게 <우리 읍내>예요.” 하지만 김고은에게 돌아온 건 “정말 코딱지만 한 역할”이었다. 당연히 심술이 났고 투정도 부렸다. “자존심도 상하고, ‘이거 시키려고 나를 붙잡은 거야?’ 싶었죠. 근데 어느 순간 그 선생님이 저에게 ‘너 안 되겠다. 내가 사람 잘못 본 것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정말 정신이 확 깼어요.” 이 굴곡의 여정이 김고은에게 잊지 못할 순간을 전해줬다. 태도를 다잡은 김고은은 최선을 다해 무대에 섰다. 총 3막 중 1막에만 등장해, ‘아’ ‘응’ 등의 단문 대사 10여 개를 내뱉는 역할이었지만 그녀는 정말 열심히 했다. “제 연기에 객석이 빵 터지는 걸 느꼈어요. 아주 재미있고, 신이 났고, 정말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었죠. 1막이 끝나고 암전이 됐는데 내려가기가 싫었어요.” 이 무대를 계기로 김고은은 그야말로 연기에 빠졌다.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고 계속 연기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김고은은 <은교>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갔다. 복학한 뒤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극을 올리고 객석 앞에 섰다. <몬스터> <협녀, 칼의 기억> 등을 찍으면서는 연극 <고독은 커다란 귀, 누군가 불러주길 기다린다>를 연기했고, 이후에도 충무로 현장과 학업을 병행했다. “제가 좋아하는 과목만 하는 편이라 아직 이수하지 못한 학점이 꽤 많아요.(웃음) 근데 아직 전 영화 다섯 편 찍은 신인이기 때문에 계속 배우고 싶어요.”

스트라이프 패턴의 시스루 시폰 롱 원피스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글래디에이터 힐은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실버 드롭 이어링은 엠주(Mzuu).

스트라이프 패턴의 시스루 시폰 롱 원피스는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글래디에이터 힐은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 실버 드롭 이어링은 엠주(Mzuu).

김고은은 완벽주의자다. 최소한 연기에 한해 그렇다. 캐스팅이 정해지면 그녀는 ‘이 역할은 내가 제일 잘해야 하는 거’라 스스로 다짐하고, 촬영 전날까지 캐릭터의 8부 능선을 홀로 완성해낸다. “좋아하는 거니까 열심히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공부도 좋아하는 것만 했어요. 정말 극단적으로 국어, 영어, 국사, 이런 거만 하고, 수학, 과학 같은 건 아예 책도 펴지 않았죠.(웃음) 만약 저 아니어도 이 역할을 더 잘 소화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제게 그 역할이 주어질 이유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녀는 현장에서도 감독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나눈다. <몬스터> 때는 본래 특정 장애 질병에 걸려 있던 주인공 복순의 설정을 의논해 수정했고, <차이나타운>에선 감정 표현이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 일영의 내면을 파악하기 위해 한준희 감독과 끊임없이 의견을 나눴다. “인물의 습관이나 말투 같은 건 미리 체득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연기가 어색해져요. ‘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까’를 현장에서 고민하면 노력하는 티가 드러나기 마련이잖아요.” 고작 4년 차 신인 배우지만 나름의 철학과 철칙은 알차다. “영화 다섯 편을 했지만 장편이라는 게 좀 어렵더라고요. 영화 전체, 제 캐릭터의 시작과 끝을 보는 눈이 아직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이번 영화를 하면서는 그걸 보완하려고 노력했고, 감독님이 잘 도와주셨어요.” 감독에게 배우 김고은이 영감의 피사체듯이, 배우 김고은에게도 서로 다른 감독들의 세계는 매번 색다른 배움의 터다. 그녀는 학교에서도, 충무로에서도 착실한 학생 노릇에 충실하다.

김고은은 영화 <차이나타운>에서 김혜수와 유사 모녀 관계다. 무사들의 활극 <협녀, 칼의 기억>에선 전도연의 딸이 되어 검을 휘두르고, 5월 촬영에 들어가는 <계춘할망>에선 윤여정의 손녀로 출연한다. 김혜수와 전도연, 그리고 무려 윤여정. 작품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기라성 같은 한국 여배우들의 딸, 그리고 손녀가 되어보는 여정은 사뭇 의미심장해 보인다. “커리어랄지, 배우의 위치, 자리? 그런 건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저 나는 운이 좋구나, 복이 많구나 생각하고 감사해 할 뿐이에요. 제가 단역부터 조연, 주연으로 차곡차곡 밟아온 케이스가 아니라 처음부터 주연을 해버린 쪽이라 아직 부족한 게 너무 많아요. 배울 것투성이라 이렇게 대단한 선배들과 함께하는 게 감사할 뿐이죠.” 하지만 김고은은 웬만한 신인 여배우라면 주눅들기 마련인 대단한 이름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은교의 무드는 함께 출연했던 박해일, 김무열을 리드했고,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협녀, 칼의 기억>에서도 그녀가 맡은 설희의 검은 전도연이 연기한 설랑을 보조하는 역할 그 이상이다. “혜수 선배님이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셨으면 전 당연히 쫄았겠죠. 근데 먼저 친근하게 대해주셨고, 그래서 더 다가갈 수 있었어요. <은교> 때부터 대선배님들이랑 함께해서 그런지 저도 이젠 선배님들과의 현장이 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얼마 전 김고은은 <계춘할망>에서 함께할 윤여정의 다른 영화 <장수상회> 시사회에 다녀왔다. 인터뷰가 있던 당일엔 <계춘할망>의 고사를 지내러 간다며 눈을 밝혔다. 그녀는 그저 연기가 좋은 여배우다. 수수께끼 같은 무드, 멜로와 액션, 스릴러를 배배 꼬며 오가는 행로는 관객에게 자꾸 물음표를 던지지만, 그 질문의 내막은 결국 영화에 대한 단단한 애정일 거다. 김고은이 메이크업을 지워주고 있던 스태프에게 돌연 질문을 던졌다. “언니, 메이크업 왜 이렇게 열심히 해요? 그냥 좋아서죠?” 김고은 역시 그냥 좋아서, 신나게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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