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손으로 쓰세요

프로도와 브라운이 안부를 묻고, 페이스타임과 영상통화가 익숙한 디지털 시대. 손으로 쓴 감사 편지와 내 이름을 새긴 노트는 그래서 더 소중하다. 패션을 손으로 쓰는 사람들.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블루 포인트의 카드와 도시 이름이 새겨진 다이어리는 스마이슨(Smythson), 핑크와 아이보리 컬러의 카드와 연필은 피나이더(Pineider), 버건디 컬러 다이어리는 몰스킨(Moleskine), 블루 잉크병은 라미(Lamy), 펼쳐진 다이어리와 아이보리 컬러 만년필은 에스티 듀퐁(S.T. Dupont), 2016년 다이어리는 스마이슨, 메탈 펜은 라미.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블루 포인트의 카드와 도시 이름이 새겨진 다이어리는 스마이슨(Smythson), 핑크와 아이보리 컬러의 카드와 연필은 피나이더(Pineider), 버건디 컬러 다이어리는 몰스킨(Moleskine), 블루 잉크병은 라미(Lamy), 펼쳐진 다이어리와 아이보리 컬러 만년필은 에스티 듀퐁(S.T. Dupont), 2016년 다이어리는 스마이슨, 메탈 펜은 라미.

“우리가 함께 창조한 숭고한 컬렉션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의 에너지와 기술에 감동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디올 가족에 속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내일은 장엄한 하루가 될 겁니다.” 디올 하우스의 아티스틱 디렉터 라프 시몬스는 첫 꾸뛰르 쇼 전날 아틀리에 장인들에게 손수 쓴 감사 카드와 꽃다발을 선물했다. 영화 <디올 앤 아이>에 담긴 이 장면은 배려심 깊은 시몬스의 성격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컬렉션 준비로 분주한 장인들에게 서툰 프랑스어로 감사의 글을 쓴 디자이너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됐을 것이다).

처음 만나면 전화번호 대신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하고, 카톡 영상통화로 안부를 묻는 게 익숙한 시대에도 손으로 끄적거리는 행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클래식, 아카이브, 헤리티지 등 과거를 존중하는 패션계에도 그런 인물들이 많다. 2011년 파리<보그>를 떠난 카린 로이펠트는 재임 기간 동안 디자이너와 사진가로부터 받았던 감사 카드를 모두 모아 자신의 책 <Irreverent>에 소개했다. 거기엔 칼 라거펠트가 보낸 스케치와 카드, 톰 포드가 보낸 편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헬무트 랭 역시 2007년 친구로부터 받은 자필 편지를 모아 <퍼플> 매거진에 공개했다. 아티스트 제니 홀저는 함께 강가에 머물러줘서 고맙다는 시적인 카드를 보냈고, 마크 제이콥스는 자신을 쇼에 초대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문구는 패션보다 정서적으로 더 큰 힘을 지녔습니다. 노트북과 다이어리는 속옷 서랍보다 더 사적이죠.” 영국 일간지 <가디언> 패션 에디터 제스 카트너 몰리는 자신을 비롯한 패션계 인물들이 문구에 있어 유난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톰 포드가 구찌를 이끌 때, 저는 구찌 런던 사무실에서 사소한 위기를 목격했어요. 새 직원이 도착해 자신의 책상에 노란색 연필 박스를 놓아둔 거죠. 사무실에서 검정 펜과 연필만 쓰라고 명령한 미스터 포드에게 그 직원은 양해를 구해야 했어요.” 문구에 집착한 디자이너는 또 있다. 이브 생 로랑은 변호사였던 고조할아버지가 나폴레옹과 조세핀 황비의 결혼 서약을 썼던 책상에 앉아서만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책상에는 두 개의 빈티지 램프, 꽃병과 파란색 HB 연필만 허락됐다. 또 듀퐁의 만년필을 애용하는 칼 라거펠트는 자기 마음에 쏙 드는 펜을 디자인해 출시한 적도 있다.

시리가 스케줄을 관리하고 애플 워치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는 삶이 익숙한 지금 패션계는 왜 아름다운 문구와 필기구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할까. 그건 실용성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유명 디자이너는 자기 이름을 새긴 편지지와 카드를 주문하고(안나 윈투어는 코너(Connorynyc.com), 랄프 로렌은 아이프린터리(Iprintery.com)에서 제작한다), 패션 브랜드는 VIP와 기자들에게 배터리 충전팩 대신 노트를 선물한다. 패션쇼 초대장에 관객 이름을 직접 쓰는 행위는 지나간 시대의 예절을 존중하는 패션계의 고집이다.

지난 9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문을 연 스마이슨(Smythson)은 영국을 대표하는 문구 브랜드다. ‘만져보면 안다’는 질 좋은 종이 수첩은 나만의 색과 문구를 선택한 뒤 이니셜까지 새겨 주문 제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나만의 문구를 바라던 고객의 인기는 굉장했다. 10월 1일 매장 오픈을 기념해 영국 장인이 직접 가죽 수첩에 이니셜을 새겨주는 이벤트는 인기 절정. “예상보다 많은 고객이 스탬핑 이벤트에 참여했습니다. 본사에서도 기대 이상이라 밝혔죠.” ‘언플러그드’에 대한 집착은 스마이슨뿐이 아니다. 필드노트, 팔로미노, 카렌다쉬, 코이노어 같은 문구 브랜드는 ‘컬트’적 인기를 누린다. 얼마 전 연필심을 갈아 끼우는 50년대 빈티지 순은 연필 케이스를 영국에서 구입한 어느 그래픽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마우스와 키보드로 작업을 하지만, 손으로 펜을 쥐는 느낌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문구를 찾죠.” 덕분에 몰스킨, 몽블랑, 던힐 등 문구로 유명한 브랜드는 패션 아이템으로 카테고리를 확장시켰다.

최근 <뉴욕 타임스>는 직접 쓴 감사 카드의 중요성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 패션 홍보 전문가 크리스티아노 마니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디지털 시대에 자리에 앉아 직접 손으로 무엇을 쓴다는 행동에 담긴 품위는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카카오톡의 프로도와 라인 메신저의 브라운이 서로의 마음을 대신 전하는 세상에서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는 일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할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손으로 쓰는 행위는 더 가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