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살아있다!

이제 디자이너들은 영감을 찾아 열국으로 떠나지 않는다. 대신 침대 위에서 TV 리모컨을 누른다. 모니터 안에서 영감의 신세계가 펼쳐지니까.

sense
파리 패션 위크의 마지막 날인 10월 7일 아침.루이 비통 쇼장으로 향하는 불로뉴 숲 속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새 컬렉션 발표 현장에 늦을세라 조급해진 관객들은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건물이 보이자마자 차에서 내려 냅다 뛰기 시작했다. 쇼가 열리는 검정 텐트가 시야에 들어올 때쯤 사진가들에게 둘러싸인 배두나가 눈에 띄었다. 디자이너의 깊은 신임을 얻고 있는 데다 ‘절친’으로 소문난 그녀를 루이 비통 쇼장에서 만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때마침 마중 나온 루이 비통 홍보팀이 이렇게 속삭였다. “니콜라가 이번 컬렉션이 배두나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어요. 그녀가 나온 드라마 <센스8>에 푹 빠졌다고 말이죠.”

패션쇼가 끝나면 취재 열기로 가득한 기자들은 녹음기(요즘엔 아이폰)를 손에 쥐고 백스테이지로 달려간다. 그들은 녹음 버튼을 누른 뒤 디자이너에게 묻는다. “이번 컬렉션의 영감은 어디서 얻었죠?” 지난 수십 년간 대답은 뻔했다. 최근 어느 전시에서 발견한 예술가의 작품, 하루 종일비행기를 타고 가야 도착하는 이국적인 나라에서 만난 수공예 기술, 혹은 아무도 본 적 없는 60년대 누벨바그 영화 등등. 남들이 모르는 고급 취향을 나열해야 디자이너로서 체면이 선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제가 요즘 푹 빠진 TV 드라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라고 말하는 디자이너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영화도 아닌, TV 드라마를 보는 디자이너라니!

그런 면에서 루이 비통의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금기를 깼다. “<에반게리온>과 왕가위 감독의 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넷플릭스의 TV 시리즈 <센스8>과 거기 출연하는 한국 여배우 배두나가 제게 큰 영감이 됐죠.”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여덟 명이 같은 감정과 생각, 그리고 능력을 공유한다는 초현실적 드라마가 SF 장르 마니아인 니콜라를 자극한 것. 최근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도 TV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선보인 리조트 컬렉션이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떠올리게 했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 것이다. “그 시리즈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런 비주얼은 영향력이 강합니다.”
왕좌 제발
물론 패셔너블한 TV 시리즈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섹스 앤 더 시티>없이 루부탱과 마놀로를 논할 수 없었고, <가십걸>은 전 세계 젊은 패션 팬의 마음을 두근대게 만들었으니까. 그런 가운데 바나나 리퍼블릭은 <매드맨>과 함께 60년대 스타일이 그대로 담긴 캡슐 컬렉션을 출시했고, 랄프 로렌은 영국 사극 <다운튼 애비>를 위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또 <걸스>의 레나 던햄, <왕좌의 게임>의 에밀리아 클라크, <홈랜드>의 클레어 데인즈 등 TV 스타가 <보그> 표지에 등장하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또 커스틴 던스트와 케이트 보스워스 등 패션 아이콘으로 손꼽히는 영화 배우도 최근 각각 <파고>와 <아트 오브 모어>를 통해 브라운관 세상으로 옮겨왔다. 최근엔 앤 해서웨이와 스칼렛 요한슨도 미니시리즈 출연을 약속했다. 또 <댈러스> <다이너스티> <마이애미 바이스> 등 고전 드라마는 당시 패션을 구경하기에 더없이 좋은 참고 자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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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바보상자로 불리던 TV는 그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막강하다. 모두들 TV 황금시대라 부를 정도로 다양한 시리즈물이 방송되면서 대중은 물론 패션 디자이너까지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또 넷플릭스와 아마존 등 채널이 다양해지면서 콘텐츠 역시 풍부해졌고, 전 세계에 미국과 영국 드라마가 동시 방영된다는 점도 패션과 TV의 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패션계가 주목하는 TV 시리즈는? <닙턱>과 <글리>의 제작자, 라이언 머피가 제작한 두 드라마가 유독 두드러진다. 올가을부터 미국에서 방송된 <스크림 퀸즈>는 젊은 디자이너 데이지 셸리(Daizy Shely)에게 의상을 부탁했다. 이번 시즌 아르마니의 배려로 밀라노에서 첫 쇼를 선보인 그녀는 패션에 집착하는 여대생들을 위해 옷을 준비했다. 주인공 이름이 샤넬(무려 다섯 명의 샤넬이 등장한다!)인 프로그램으로선 당연한 일. 나오미 캠벨과 레이디 가가가 출연하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호텔>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보그> 패션 에디터로 변신한 나오미의 열연이 백미다(안나 윈투어가 나오미와 라이언 머피 사이를 연결해주었다!). 패션 여왕 역시 컴백을 공식 선언했다. 최근 HBO가사라 제시카 파커를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기획 중이라고 밝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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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단 하나의 패션 드라마를 꼽으라면 바로 힙합 드라마 <엠파이어>다. “<엠파이어>가 눈에 띄는 진짜 이유는 패션에 대한 집착이다. 이 쇼는 일명 ‘게토 패뷸러스(Ghetto Fabulous)’라는 단어의 정신을 정확히 표현하려는 욕망을 지녔다. 그 단어는 90년대 초 메리 제이 블라이즈로 대표되던 새로운 종류의 힙합 아티스트를 설명하기 위해 탄생했다.” 미국 <보그>는 올해 ‘셉템버 이슈’에서 이 드라마에 대해 찬사를 늘어놨다. 힙합 제국을 완성한 루셔스와 그의 전부인 쿠키가 이끌어가는 미국식 막장 드라마 <엠파이어>는 뻔한 내용과 과장된 설정과 상관없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중. 지난 1월 미국에서 방영을 시작한 뒤 무려 1,700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들이며 2015년 화제의 드라마로 떠올랐다. 주인공 쿠키 역을 맡은 타라지 P. 헨슨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미국 <보그>는 마리오 테스티노가 드라마 주인공들과 나오미 캠벨(드라마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조단 던 등을 촬영한 패션 화보도 실었다.

“제가 아는 모든 사람은 <엠파이어>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11월 12일, <엠파이어>와 함께 한 캡슐 컬렉션을 공개한 후드 바이 에어의 디자이너, 올리버 셰인 역시 팬을 자처했다. 그는 쇼의 주인공인 쿠키와 그녀의 두 아들, 하킴과 자말의 얼굴을 신문에 프린트해 컬렉션을 완성했다. “쿠키야말로 오랜만에 등장한 진정한 펑크 캐릭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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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TV의 힘은 결국 하이패션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대표적인 예다. 내년 봄 컬렉션 속에 등장한 모델 손등엔 꼭 붕대를 감은 듯 가죽끈 장식이 있었다. <센스8>에서 격투기 선수로 활약하는 배두나의 스타일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여기에 지난 리조트 컬렉션 속 벨트 장식 롱 드레스는 <왕좌의 게임> 속 ‘칼리시’와 ‘세르세이’가 입을 듯한 옷으로 충분했다. 또 패션 실험을 거듭하는 이리스 반 헤르펜도 TV를 본다. 지난 10월 그녀의 런웨이를 되돌려보자. 돌판 위에 여성 한 명이 쇼가 시작되기 전부터 쇼가 끝나고 모든 관객이 떠날 때까지 손가락 한 번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는 <왕좌의 게임> 속 강력한 여전사 브리엔느 역할을 맡은 그웬돌린 크리스티였다. 이리스는 그웬돌린과 아직 공개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프로젝트를 함께할 거라고 밝혔다. 또 이번 가을부터 내년 봄까지 이어지는 빅토리안 스타일의 유행은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공포 드라마 <페니 드레드풀>,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부터 20년대 재즈 스타일까지 이어지는 <다운튼 애비>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알렉산더 왕과 알버 엘바즈 역시 최고의 취미로 TV 시청을 꼽았으니, 곰곰이 살펴보면 그들의 컬렉션에서 드라마와 리얼리티 시리즈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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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텔레그라프>의 패션 섹션은 최근 이런 가설을 세웠다. “예전에는 디자이너가 이국적인 휴가를 영감으로 꼽았다면, 이제 넷플릭스를 언급하는 게 훨씬 모던해 보인다.” 가상 세계에서나 등장하는 용의 여신(<왕좌의 게임>)부터 브루클린에 사는 20대 힙스터(<걸스>), 의문의 살인이 일어나는 기숙사의 여대생(<스크림 퀸즈>), 그리고 레오퍼드로 몸을 감싼 힙합 레코드 라벨의 안주인(<엠파이어>)까지 TV에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영감의 대상이 살아 움직인다. 다음 트렌드가 궁금한가? 지금은 리모컨을 들고 TV를 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