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따뜻한 술이 마시고 싶다. ‘원샷’보다는 한 모금이 어울리는 술. 술을 데우면 몸과 마음도 뜨끈하게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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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차가운 술을 들이켤 때면 추운 날 바닷물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 된다. 입술에 차디찬 술이 닿는 순간, 소름이 살짝 끼치고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서늘한 한기를 요란하게 느끼고서야 ‘꼴깍’ 술이 넘어간다. 찬 바람이 불 땐 그래서 촉감부터 따뜻한 술이 생각난다. 눈 내리는 날의 노천 온천처럼 느긋하게 이 계절의 취기를 즐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태어나 처음 맛본 따뜻한 술은 히레사케였다. 한때는 독을 품었을 복어의 말라비틀어진 꼬리가 담긴 모양새가 그리 탐탁지는 않았으나 도기 잔을 감싼 손끝에서부터 전해오는 온기에 입이 절로 갔다. 호호 불어 꼴깍! 식도를 타고 넘어간 술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라이터를 켜듯, 몸속에 불꽃이 화락 피어올랐다. 하루 종일 성가신 긴장에 굳어 있던 머리와 꽁꽁 언 길을 걸어오느라 움츠러들던 몸이 풀렸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다.

사실 사케는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끓여 먹는 술은 아니다. 적정 온도는 40~55℃. 사케를 직접 끓이거나 그 이상 데우면 향과 알코올이 날아가 밍밍해져버린다. 중탕이 정석이다. 히레사케만 복어 향이 잘 배어들게하기 위해 70℃ 정도로 뜨겁게 데워 마신다. 사케마다 마시기 좋은 온도가 다르니 사전에 확인하는 게 좋다. 보통은 준마이, 혼죠조를 데워 마시기 좋은 사케로 꼽는다. 달걀에 설탕이나 꿀을 넣고 잘 풀어준 뒤 따뜻하게 데운 사케에 부어서 마시는 ‘다마고사케’는 술이라기보단 차라리 약에 가깝다. 일본에서는 감기 잡는 민간요법으로 다마고사케를 마신다.

우리에겐 조금 낯설지만 중국에서는 황주를 따뜻하게 마신다. 황주 중에 으뜸은 소흥주(사오싱주)다. 그해에 수확한 찹쌀을 보리누룩으로 발효시켜 미네랄이 풍부한 호숫물로 빚은 술이다. 대추차처럼 갈색을 띠는 소흥주는 알코올 도수 15~17도로 와인과 비슷하다. 차갑게 마시기도 하지만 뜨거운 물에 중탕해서 마시면 향이 더 좋다. 말린 자두나 매실을 넣어서 마시면 향이 배가 된다. 데운 소흥주에 록 슈거를 넣어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면 단맛이 은은하게 더해지며 입안은 보드라운 향기로 가득 찬다. 우리나라엔 소흥주를 맛볼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은데, 서울고속터미널 근처 차이니스 라운지 ‘모던눌랑’에 가면 고월용산 소흥주가 있다. 초이삼이나 튀김 요리에 따뜻한 소흥주 한 잔이면 따로 국물 생각이 안난다. 술이 가진 향이 강해서 담백한 음식이 대체로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삼국지>의 ‘데운 술이 식기 전에’ 일화에 등장한 술도 바로 이 황주가 아니었을까 싶다. 순식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따끈함이 가시지 않은 술을 들이켠 관우의 그날 밤은 매우 편안했을 것이다. 잠들기 전 가볍게 마시는 한 잔의 따뜻한 술은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을 주니 말이다.

뱅 쇼나 핫 토디, 모주처럼 따뜻하게 데운 술은 사실 부어라 마셔라 신나게 마시기보다는 감기가 올 듯 말 듯 으슬으슬한 날, 이불 속에 들어가기 직전 딱 한 잔 마시고 싶은 술이다. 실제로도 추운 날 체온을 올리기 위해 술을 데워 마시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따뜻한 술은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고 뭉친 근육을 이완시켜주기 때문에 초기 감기를 잡는 데 제법 효과가 있다. 상비약처럼 집에 두고 데워 마시기 좋은 술로는 럼주와 위스키가 있다. 페르노리카 코리아 김동욱 앰배서더는 그중에서도 하바나 클럽을 추천했다. 카리브 해 연안 지역의 열대성 기후에서 탄생한 럼주이기 때문에 더운 지역에서도 맛있게 마실 수 있다는 이유다. 번거로울 것도 없다. 볼이 넓은 잔에 뜨거운 물을 부어 충분히 데운 다음 럼주를 따르고 가볍게 잔을 돌려서 마시면 된다. 시나몬 스틱을 꽂으면 부드러운 향이 더해짐은 물론이다. 냉장고에 묵혀둔 유자차, 자몽차, 대추차 등과 섞어 마셔도 좋다. 따뜻하게 탄 차 한 잔에 위스키 잔으로 한 잔 정도 분량의 럼주를 넣어 마시면 포근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엔 뜨거운 우유에 럼주를 넣고 설탕이나 꿀을 넣어주면 ‘나이트캡’이라는 이름의 숙면 칵테일이 만들어진다. 집에 다들 한 병쯤 있는 위스키에는 홍차를 섞으면 잘 어울린다. 위스키와 뜨거운 홍차를 1:2 비율로 섞고 꿀 한 스푼을 넣은 다음 레몬 슬라이스를 하나 띄우면 ‘핫 토디’ 완성이다. 뱅 쇼가 지겹다면 ‘헨드릭스 진 핫 펀치’도 괜찮다. 큰 냄비에 헨드릭스 진과 와인을 동일한 양만큼 붓고 정향, 너트메그 파우더, 시나몬 파우더, 레몬, 오렌지, 파인애플, 꿀, 레몬 주스를 넣은 다음 약한 불에 30분간 데우면 파티에 내놓아도 좋을 따뜻한 술이 된다. 바에서 따뜻한 칵테일이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메뉴판에 없다면 좋아하는 차종류를 얘기하며 만들어달라고 요청해봐도 좋다. 대부분의 바에서는 얼그레이, 재스민 등 대표적인 차 종류를 구비해놓고 있기 때문에 따끈한 티 칵테일은 누구라도 만들어줄 수 있다.

따뜻하게 데운 술은 요란한 건배보단 편안한 눈 맞춤이, 원샷보다는 조용한 한 모금이 어울린다. 온기가 필요한 날, 삶의 속도를 늦추고 싶은 날, 조심스럽게 불을 올리고 술과 잔을 데워보라. 데운 술이 식기 전에 잠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