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을 위한 서울의 공간들

들려오는 음악 소리 외엔 아무것도 없다. 서울 한복판에 하나둘 문을 열고 있는 음악만을 위한 공간들. 도심의 문을 열고 음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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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의 맛집 ‘누룽지백숙’집엔 3층에 의외의 공간이 하나 숨어 있다. 구수한 삼계탕 육수의 풍미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인데 반신반의하며 들러보면 의외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누룽지백숙’집의 사장님이 직접 운영하는 음악 감상실 ‘리홀(Rhee Hall)’.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는 사장님이 사다 모은 LP 8만 장이 쌓여 있고, 진공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재즈 음악이 있으며, 음악 역사의 유품과도 같은 나팔관의 앰프, 비틀즈의 한정판이 전시되어 있다. 웬만한 음악 애호가의 집념이 아니고서야 완성하기 힘든 컬렉션이다. 게다가 이곳에선 정기적으로 공연도 하며, 입장료 1만 원을 내고 들어가면 신청곡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백숙집 주인이 차려낸 음악 한 상이라니. 좀 구수하게 로맨틱하지 않나. 백숙과 메밀전, 비빔국수와 수제비 다음으로 이어지는 비틀즈, 레이 찰스의 코스는 분명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할 성찬이다.

음악 감상실은 사실 이제 추억의 유물이 됐다. 80년대 록 음악이 번성하던 시절 국내에서 접하지 못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서 음악을 감상하던 곳이 음악 감상실의 시작이다. 명동의 ‘시보네’, 종로의 ‘디 쉐네’와 ‘쎄시봉’, 그리고 동인천의 ‘심지’ 등. 하나같이 죄다 어둠컴컴한 공간에선 하루 종일 루프탑 싱어스, 해리 벨라 폰테의 포크 음악이 흘러나왔고, TV 속 노래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마니아들이 모여들었다. 더불어 메탈 음악이 흥하던 80년대 다소 과격한 음악적 취향을 해결할 수 있는 해방의 장소기도 했다. 오로지 음악만을 위한 아지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모두가 다 알듯이 세월은 흘러 음악은 지구 어디에서든 다운로드할 수 있는 파일이 됐고, 음악 감상실은 굳이 모여 들을 필요 없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소파 좌석에 구멍이 하나씩 늘어날 즈음, 발밑으로 쥐들이 오고 가게 되었을 무렵, 음악 감상실의 시간도 끝나버렸다.

다시 찾아온 LP의 붐 덕인지, 스트리밍 뮤직 시대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올해 들어 서울 곳곳에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다만 80년대 아지트가 록, 메탈 음악 중심이었다면 지금의 음악 공간은 클래식과 재즈가 강세다. 우선 2014년 문을 연 ‘리홀’에 이어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건 현대카드의 뮤직 라이브러리. 문화 사업에 열심인 현대카드가 한남동 대로변에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로 오픈한 곳으로 음악 감상은 물론, 렌털, 공연관람까지 가능하다. 담벼락 아트로 유명한 빌스(Vhils)의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건물에 들어서면 2층엔 1만여 장의 바이닐을 이용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가 있고, 지하엔 공연장과 렌털 스튜디오가 자리해 있다. 무엇보다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의 장점은 비틀즈의 데뷔 순간, 레드 제플린 첫 TV 무대 등과 같은 희귀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는 것. 장르와 시대별로 정리된 바이닐과 관련 서적을 훑다보면 음악 역사상 황금 같았던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 공간이 음악 애호가들을 100% 만족시키는 건 아니다. 음악 평론가 김윤하는 “라이브러리 공간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데 바이닐, 서적이 빛에 장시간 노출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관과 관리 상태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또한 지하의 공연장 역시 유리 벽의 뻥 뚫린 천장이라 “음향을 고려해 만들어진 구조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카드 이용자만 입장 가능하다는 사실은 좀 아쉽다.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가 바이닐에 힘을 쏟아 구성한 음악의 장이라면, 아이리버가 바로 맞은편 길에 오픈한 스트라디움은 음원의 힘을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입장료 1만원에 이용할 수 있는 이곳은 음악 감상과 강연, 공연과 레코딩 등의 서비스가 가능하다. ‘음악은 우리를 어떻게 사로잡는가’를 주제로 진행 중인 전시회장 1층에선 벽면에 설치된 ‘아스텔앤컨’ 오디오로 음악을 들을 수 있으며, 지하의 뮤직 룸 두 곳에서는 그날의 플레이리스트에 맞춰 흘러나오는 음악을 고음질로 감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쿠스틱한 바이닐의 맛을 살린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와는 달리 스트라디움은 본래의 음원에 집중해 궁극의 기술로 최상의 사운드를 뽑아내는 곳인 거다. 음원과 스트리밍의 시대에 LP 정반대편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청음법이다. 그리고 2층에는 일본의 디자이너 샘 도요시마가 설계한 사운드 스튜디오가 있고, 이곳에선 정기적인 음악 감상회와 연주회, 또는 음악 해설 토크쇼 등이 열린다. 체험 중심의 음악 공간, 이곳에선 사운드만을 위해 모든 게 존재한다.

음악은 어느새 그저 흘러가는 사운드가 되었다. 스트리밍과 다운로드의 시대에 모든 음악은 BGM이다. 우리는 책을 보면서 음악을 듣고, 밥을 먹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출퇴근하며 셔플로 검색된 아이폰 속 음악에 귀를 맞춘다. 곁들임으로서의 사운드, 일종의 ‘피처링’만 존재하는 음악이다. 그래서 근래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음악 감상실이 반갑다. 이곳에선 온전히 음악에 귀를 기울일 수 있고, 음악만을 위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스트라디움 지하에 내려가 소파에 앉았다. 제이미 컬럼과 바우터 하멜, 그리고 조 샘플의 음악이 연이어 나오는데 안락함에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음악이 줄 수 있는 이 평안함을 왜 이렇게 오래 잊고 살았을까. 오랜만에 진짜 음악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