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2015 Vogue St – 11구, 식문화의 중심지 

2023.02.20

by VOGUE

    #2015 Vogue St – 11구, 식문화의 중심지 

    피에르 성의 키친은 언제나 화기애애하다.

    셀러에 빼곡히 들어찬 와인들.

    우리나라가 강남구, 서초구 등 ‘명칭’으로 지역을 나눈다면 파리에서는 ‘숫자’를 사용한다. 덕분에 외우기 쉽고 쓰기도 편리하다. 그중에서도 11구(75011)는 사회주의 의식이 강한 지성인, 영화인, 예술가들이 많은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홍대와 이태원 뒷골목을 합쳐놓은 분위기랄까?

    ‘오베르캉프(Oberkampf)’는 세계 음식의 집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프리카부터 티베트, 라틴 아메리카까지 온 대륙을 다 합치고 해양을 넘나든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가 융합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가 지역 주민의 의식이 한 몫 한다.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이며 휴머니스트들이 많이 사는 이곳에서 이토록 ‘다문화’적인 시장이 형성된 것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 느낌이 심상치 않아 무조건 들어간 레스토랑.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처럼 거친 질감의 벽돌로 쌓은 벽에는 와인들이 책장의 책처럼 꽂혀 있었다. 식당의 내부는 높고 길게 뻗은 식탁과 하이 체어로 꽉 차 있었다. 인테리어부터 범상치 않았다.

    여행 책자에서 소개되지 않았을 법한 레스토랑을 주로 찾아다니는 내 발걸음이 닿은 그곳은 공교롭게도 다름 아닌 미국의 인기 케이블 프로그램 <탑 셰프> 가 2011년도에 배출한 스타 셰프, 피에르 상 보이에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 덕에 인터뷰 요청 후 삼 주가 넘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그는 프랑스계 한국인으로 입양 후 프랑스 부모 아래서 자랐다. 깐깐하고 신경질 적이며 예민한 전형적인 프렌치 셰프 이미지와 달리 자신의 뿌리가 한국에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유쾌한 사나이였다.

    “이번에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이 한국 방문 시 대통령 전용기를 함께 타고 갔다 왔죠. 정말 멋진 경험이었어요!”

    레스토랑 곳곳에 보이는 알랭 듀카스가 출판한 그의 요리책자와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과 함께한 스케줄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인기 있는 셰프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손 맛을 볼 차례. 차분한 웨이터와 스태프들이 각 코스 요리와 와인을 절도 있게 가져다 주었다.

    한식이 혀를 자극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프렌치 음식의 시작과 끝은 향미다. 먼저 트러플 향이 가득한 감자 퓌레를 역시 트러플 향 가득한 브리오쉬로 떠먹는 순간 역시 ‘프렌치’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한 푸이 퓨메 화이트 와인은 강한 자극 없이 요리와 어울렸으며 화사한 향기로 오랫동안 혀뿐 아니라 코를 만족시켰다.

    이곳은 그날그날 메뉴가 구성되는데 점심이 30 유로, 저녁이 여섯 코스에 50 유로 선이다. 각 코스마다 숙련된 소믈리에가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 선별, 제공하며 글라스 와인은 5 유로 선에서 즐길 수 있다. 또, 대부분의 레스토랑이 주문 전 또는 식사 전에 메뉴를 소개하는 반면 이곳은 식사 후에 설명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 이유는 고객들이 식감에 집중하고 선입견 없이 식사를 접하도록 짜낸 아이디어 라고. 여기서 또 한번 그의 스타적 재량을 느낄 수 있었다. 메인 요리로 나온 구운 메추리 요리에 곁들여진 반전 된장 소스에서 그가 찾고자 하는 정체성을 향한 노력과 애증도 함께 말이다. 연말 내내 예약된 스케줄에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피에르. 짬을 내어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꿈을 꺼내 놓는다.

    “언젠가 꼭 한국식 재료로만 만든 음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을 하고 싶어요!”

    그의 꿈은 대도시에 위치한 커다란 규모의 매장을 여는 것도, 미슐랭 스타 세 개를 다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식 재료’. 그 말 한마디에 잔뜩 날을 세웠던 나의 혀가 호의를 갖고 편안해지는 걸 보니 피는 와인보다 진한가 보다. 때마침 (요즘 부쩍 한국과 교류가 많아진) 남편을 응원하러 아내 김희진 씨가 레스토랑을 찾았다. 희진 씨가 한국 요식업계에 몸담고 있던 중 미스터 차우 한국 론칭을 위해 한국을 찾은 피에르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고.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한국에서 시작돼 런던을 거쳐 파리로 무대를 옮기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된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집에 있을 땐 누가 음식을 만드나요?” 라는 질문에 희진씨가 답한다. “저요, 한국에서 온 엄마표 김치로 만든 김치찌개 같은 한국 가정식 요리를 무척 좋아해요. 레스토랑 키친에도 한국인 셰프가 두 명 더 있어 그들과 한국식 재료의 퓨전화를 항상 연구 중이지요.”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마치 잃어버렸던 자식을 찾은 엄마의 사랑처럼 진한 애정이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스토리에 연연한 건가?

    피에르 성 레스토랑 옆에 위치한 아틀리에는 좀 더 가벼운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다. 이곳 역시 그의 소유. 피에르는 두 곳을 바쁘게 드나들며 매장 운영에 관련한 일들을 아내에게 종종 의견을 구한다. 이런 모습만 봐도 아내 희진 씨는 ‘내조의 여왕’임이 분명하다. 시원스러운 매력과 에너지를 발산하며 시종일관 밝게 웃고 스태프들과 개구진 농담도 주고 받는 그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보기만 해도 입맛을 돋운다.

    맛의 활 사위를 이제 막 당긴 젊고 의욕적인 프렌치 코리안 ‘스타 셰프’ 피에르. 문화부 장관 프레르, 환경청의 프라세와 더불어 갈수록 커져가는 ‘코리안 파워’의 주역으로, 문화의 앰배서더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피에르 성. 그는 잃었던 고국과 가족을 음식을 통해 되찾았다. ‘음식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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