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새로운 소매의 세계가 펼쳐졌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소매부터 양의 넓적다리를 닮은 아방가르드한 소매까지. 지금 펼쳐진 소매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FINAL_080_수정_3

오버사이즈 소매의 분수령이었던 베트멍.
넉넉한 소매의 바이커 재킷은 베트멍(Vetements at Boontheshop), 후디 스웨트 셔츠는 스테레오 바이널즈(Stereo Vinyls), 안에 입은 스트라이프 소매의 톱은 프라다(Prada), 별무늬 부츠는 베트멍(at 10 Corso Como).

혹시 오늘 저녁 네일 숍을 예약할 생각이었다면, 다시 생각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번 주말 새로운 반지와 팔찌 쇼핑에 나설 예정이었다면, 주말 계획도 다시 짜야 할 것 같다. 당분간 여러분의 손끝을 세상에 드러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1년 전 셀린과 아크네 스튜디오, 스텔라 맥카트니와 마크 제이콥스 등은 무릎까지 내려올 만한 길고 긴 소매를 단체로 선보였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여자들이 베트멍의 기다란 봄버와 셀린의 니트 안에 손을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지금, 올겨울에도 여자의 손을 구경하기 쉽지 않다. 이제 막 매장에 걸린 프라다 리조트 컬렉션의 미니 드레스와 셀린의 드레스 소매는 손끝보다 30cm 긴 지점에서 끝난다.

한때 치마의 길이, 어깨의 폭, 팬츠의 형태 등에 창의력을 발휘하던 디자이너들이 새로 꽂힌 부위는 단연 소매다. 사실 지난 1년간 가장 큰 변화는 길어진 소매길이였다(구찌와 생로랑의 영향으로 남성복 소매가 짧아진 것과는 정반대). 바지통을 착각해서 어깨에 바느질한 듯 기다란 소매를 주창한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그 시작이다(그녀는 아예 소매를 묶은 코트도 선보인 적 있다). 하이패션을 살풀이하듯 훑고 지나온 기다란 소매의 유행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다. 주머니 사정이 뻔한 한국의 어린 패션 팬들도 일명 ‘영배 맨투맨’이라 불리는 베트멍 오버사이즈 셔츠와 ‘유빈 봄버’라 불리는 베트멍 카키 봄버의 가짜 버전을 구입해 소매 안에 손을 꽁꽁 숨기는 중.

“오버사이즈 실루엣엔 특별한 욕망이 담겨 있어요. 자신이 입은 옷에 푹 파묻히고 싶은! 그렇기에 긴소매 역시 어딘지 여성적인 기분이 들게 합니다.” 매치스패션의 창립자 루스 채프먼은 새로운 소매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국 <보그> 역시 1년 전쯤, 길어진 소매의 매력을 이렇게 옹호했다. “팔이 좀더 길어 보이고 가늘어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처럼 연약한 기분을 선사한다. 또 지나치게 크거나 기다란 뭔가를 입으면 좀더 가냘픈 기분이 든다.”

 

그나저나 왜 소매일까? 1992년 마크 제이콥스의 악명 높은 그런지 컬렉션 이후, 기다랗고 축 늘어진 소매를 만나는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크리스티 털링턴과 케이트 모스가 축 늘어진 소매의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걸어 나오던 모습은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 소매는 좀더 넓은 하위문화를 대변하는 하나의 태도였죠.” 스타일밥의 패션 디렉터 레일라 야바리는 기다란 소매를 축 늘어뜨린 모습이야말로 반항아 스타일이었다고 전한다. 그 태도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베트멍의 길고 긴 소매가 지금 그토록 쿨해 보이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새해가 되면 기다란 소매는 좀더 다양하게 변신할 예정이다. 길이 다음은 볼륨. 런던의 조나단 앤더슨은 일명 ‘레그 오브 무톤(Leg of Mutton)’ 소매를 선보였다. 말 그대로 양 다리를 닮아 어깨는 풍성하게 솟아오르고 소매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스타일. 그는 80년대 ‘뉴 로맨틱’ 스타일에서 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특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1981년 선보인 일명 ‘해적 컬렉션’의 패턴과 실루엣이 그 시작이다. 듀란 듀란 같은 ‘뉴 로맨틱’ 밴드를 위한 유니폼이었던 이 소매가 과연 2016년의 여성들을 매혹시킬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앤더슨이 지나치게 과거의 고증에 충실했다면, 셀린의 피비 파일로와 랑방의 알버 엘바즈가 선보인 곡선형 소매는 현실적이다. 펜디와 페이스 커넥션의 봉긋한 소매는 빅토리안 스타일의 현대적 재해석에 가까웠다. 또 데릭 램과 엘러리는 소매 끝에 종을 단 듯한 실루엣을 선보였다. 여기에 로우클래식, 럭키슈에뜨, 푸시버튼 등의 서울 디자이너들도 소매의 변신에 일조했다. 그러니 이제 누구라도 새로운 소매의 제안에 설득당할 만하다.

“소매는 흥미로우며 새로운 소매는 우리를 매혹한다. 여자들이 드레스에 바라는 단 한 가지는 팔을 가리는 새로운 방식이다.” 1910년 2월 <뉴욕 타임스>는 당시 패션 디자이너가 선보인 소매를 소개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변화무쌍한 소매의 변신은 계속된다. 단추 장식을 더하거나, 주름을 잡거나, 혹은 나팔처럼 벌어지거나. 그러고 보면 지금이야말로 눈을 사로잡는 네일과 반짝이는 반지를 준비할 때다.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소매를 주목하기 시작할 것이다. 바로 그때 소매 끝, 비밀리에 감춰진 손이 비로소 드러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