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트렌드

찍어야 산다

2017.07.13

by VOGUE

    찍어야 산다

    패션에서 찍고 찍히는 전쟁이 발발했다! 이 무시무시한 판의 무기는 다름 아닌 카메라. 그렇다고 손목이 빠질 만한 전문가용 카메라가 아니다. 스마트폰, 고프로, 360도 카메라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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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장면, 밀라노. 돌체앤가바나 2016 S/S 패션쇼장인 밀라노의 메트로폴. 쇼장 천장에 매달린 전광판에는 늘 그 시즌을 함축한 낱말을 표기하는데, 이번에는 ‘Selfie’ 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런웨이와 백스테이지에서 모델들은 신나게 셀피를 찍어댔고 생생한 사진이 실시간 전광판에 올라왔다(돌체앤가바나는 몇 년 전 트위터가 한창 유행할 때 관객들의 트위터 메시지를 쇼가 진행되는 내내 전광판에 띄운 적 있다). 관객들은 모델들의 셀피 행위 예술과 전광판에 번갈아 눈길을 주며 누가 찍은 게 먼저 올라오는지 점검하느라 바빴다. 또 모델 최소라가 무대 중간에 서서 셀피를 찍으면 프런트 로에 앉은 안나 델로 루소가 찍고, 이 찍고 찍히는 광경을 건너편에 쪼그리고 앉은 패션쇼 풍경 전문 사진가가 다시 찍는다.

    두 번째 장면, 파리. 알렉산더 왕이 발렌시아가 마지막 쇼를 발표하는 파리 패션 위크. 이 하우스에 안녕을 고하러 늘 그렇듯 피날레에 왕이 뛰어나왔다. 이번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춤추는 대신, 오른손에 스마트폰을 치켜든 채 단거리 육상 선수처럼 달려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인스타 스타답게 잠깐 멈칫하더니 느닷없이 공중을 향해 스마트폰을 치켜들고 셀피도 찍었다(며칠 후 발렌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에 그 짧은 영상이 올라왔다.

    무대 입구부터 시작해 캣워크와 관객석 풍경은 왕이 찍은 대로 생생히 녹화됐지만, 중간에 멈춰 서서 찍은 건 조작이 잘못됐는지 업로드되지 않았다). 한편 요지 야마모토 쇼의 맨 마지막 붉은 드레스차림의 모델은 요즘 유행한다는 ‘고프로’를 대놓고 들고 나왔다(몇 년 전 안토니 바카렐로 쇼의 피날레에도 칼리 클로스가 이걸 들고 행진을 주도한 적 있다). 알고 보니 그건 야마모토의 새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것으로, 이번 패션쇼 풍경이 다큐에 삽입될지 모르겠다.

    세 번째 장면, 서울. 톱 모델이자 슈퍼블로거 아이린이 이종격투기 선수의 엄지손가락만 한 물체를 쥐고 다니며 쇼장 안팎의 이런저런 장면을 촬영했다.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물건에 대해 묻자 “고프로예요!”라고 발랄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보여준 화면 속 풍경은 슬쩍 왜곡된 듯 와이드하고 입체적이며 더없이 선명했다. 다음 날, 서울 패션 위크의 어느 쇼장에서 만난 디자이너 권문수가 스마트폰을 열어 신기한 장면을 보여줬다. “이번 디올 쇼에서도 이 카메라를 설치했더라고요.” 그가 인터넷으로 보여준 2016 S/S 디올 패션쇼 영상은 희한하고 놀라웠다. “내가 고개와 눈동자를 돌려 보는 방향대로 풍경이 360도 움직입니다.” 와우! “그래서 직접보는 듯하죠. 이번 문수 권 쇼에서도 이걸 설치했습니다.” 그가 으쓱한 듯 360도 카메라의 원리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Dolce&Gabbana

    Yohji Yamamoto

    Dior

    Alexander Wang at Balenciaga

    Irene

    보시다시피 새로운 패션이 동시다발적으로 속출되는 최전선에서 찍고 찍히는 전쟁이 발발했다. 여기선 대량 살상 무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카메라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고 벽돌만 한 무게의 전문가용 카메라가 아닌, 스마트폰에 내장됐거나 샤넬 립스틱만 한 고프로가 전부다. 이렇듯 찍고 찍히는 전술 덕분에 패션계는 전에 없이 자기도취에 빠졌지만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SNS가 찍고 찍힌 결과를 전 세계에 운반해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으니까. 또 360도 카메라와 고프로 덕분에 패션쇼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도 엇비슷한 현장감을 만끽할 수 있다. 할렐루야, 디지털과 하이테크에 감사를!

    마지막 장면, 모든 도시의 패션 위크. 기성세대는 패션쇼 피날레에 모델들의 행렬이 이어지거나 디자이너가 인사하러 나올 때 박수로 보답하지 않는다며 아쉬운 듯 혀를 끌끌 찼다. 양쪽 손금을 맞부딪쳐 물개박수를 치는 대신 다들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느라 바쁜 통에 쇼와 디자이너를 향한 예우를 잊고 잃었다는 것. 그런데 그게 꼭 나쁜 것 같지만은 않다. 일제히 스마트폰으로 그 의미심장한 현장을 찍는다는 건, 그만큼 잘했다는 표시니까(어두침침한 콘서트장에서 야광봉을 흔들며 무대 위의 가수와 연대감을 느끼는 것처럼).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 게 패션의 속성이라고 치면, 이제 피날레에서 스마트폰을 치켜들어 사진을 찍지 않는 건 무관심이라는 뜻.

    에디터
    신광호
    포토그래퍼
    GETTYIMAGES / MULTIBITS, INDIGITAL,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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