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찾은 이와이 슌지

현실에서 태어난 꿈 같은 영화. 21년 전 영화 〈러브 레터〉로 “오겡끼데스까”라며 안녕을 묻던 이와이 슌지 감독은 여전히 세상에 작은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 〈이와이 슌지 기획전〉을 위해 한겨울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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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세계 속엔 마치 일기장 한쪽의 메모처럼 남아 있는 이름이 있다. 고독해서 아름답던 그레타 가르보, 애절하게 젊음을 그려내던 왕가위, 그리고 프렌치 미학을 처절하게 구현하던 레오카락스 등. 이들의 연기와 스타일은 가슴속에 작은 진동을 일으키고, 마음 깊이 품고 싶은 감정을 하나 안겨준다. 단순히 좋고 싫음을 떠난 안락함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국내에선 <러브 레터> <하나와 앨리스>로 회자되는 이와이 슌지다.

1994년 데뷔작 <언두>로 영화를 시작한 그는 이후 대사 “오겡끼데스카”로도 유명한 멜로 <러브 레터>, ‘엔타운’이란 가공의 세계를 배경으로 현실의 아픔을 몽환적으로 그린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두 소녀의 귀여운 사랑 사기극 <하나와 앨리스> 등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영화는 일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었고, 독특한 영상 화법과 아픔과 희망이 어우러진 세계는 마니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12월, 이와이 슌지의 영화 세계를 재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엣나인필름과 일본국제교류기금이 함께 꾸린 <이와이 슌지 기획전>은 데뷔작 <언두>부터 최근작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까지 시기별로 골고루 묶어놓은 상영회였다. 일기장 한쪽의 메모를 다시 들춰보듯, 기억 속의 순간과 다시 마주하듯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사실 이와이 슌지는 1990년대의 이름이다. 그가 이름을 알린 <러브레터> <피크닉>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4월 이야기> 등은 아날로그 감성이 애잔하게 묻어나는 작품이었고, 실제로 2000년대 이후 그의 소식은 뜸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와 앨리스>를 마친 2004년 이후엔 한동안 장편 극영화가 없었다. 2004년은 바로 그의 오른팔과도 같던 촬영 감독 시노다 노보루가 지병으로 세상을 뜬 해다. “시노다 노보 루와는 여러 작품을 함께 했지만 그의 죽음 때문에 일부러 공백기를 가지려 한 건 아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끝내고 2~3년 허비한 시간이 좀 있었고, 진행 중인 기획이 엎어지거나 미뤄지면서 자연스레 공백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전형적인 구도를 벗어나는 앵글, 햇빛을 가득 받은 뿌연 화면 등 이와이 영화의 비주얼을 만들었다고 평가되던 시노다 노보루의 죽음은 우려와 걱정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실제로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후 연출에서 한 걸음 물러나 젊은 감독들의 연출를 도왔다. 구마자와 나오토 감독의 <무지개 여신>, 기타가와 에리코 감독의 <하프웨이>, 고바야시 다케시 감독의 <밴디지> 등이 그가 메가폰을 놓고 제작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와이 감독이 팔짱을 끼고 남의 작품에 훈수만 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을 만든 2015년 전까지 10편이 넘는 뮤직비디오를 찍었고, 서너 편의 인터넷 무비를 만들었으며, 무려 4편의 소설을 썼다. 장편영화로 극장에 걸린 작품의 수만 적었을 뿐 이와이의 세계는 부지런히 나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사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러브 레터>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탓에 예쁘게만 기억되기 때문이다. 뽀얀 화면에서 펼쳐지는 섬세한 감정의 세계랄까. 게다가 페르소나에 가까운 아오이 유우는 또 얼마나 예쁜가. 하지만 그의 영화엔 사실 잔인한 상처가 패어 있으며, 질곡의 어둠이 배어 있고, 아파하는 인물들이 있다. 데뷔작 <언두>에서 여주인공 모에미(야마구치 도모코)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세상을 붙들기 위해 스스로를 끈으로 묶는 여자였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중학생 소년 유이치(이치하라 하야토)는 극심한 이지메로 미래를 포기한 캐릭터였다. 제목부터 음산한 영화 <뱀파이어>에선 피를 얻기 위해 자살 사이트를 훑는 뱀파이어들도 등장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뛰어노는 인물들의 어여쁘기만 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실은 현실의 아픔이 반영된 독한 세계인 거다.

소녀가 주인공인 작품이 많아 그저 예쁘기만 한 영화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현실의 아픔, 질곡의 어둠과 마주한 결과물이다. 그는 현실을 재료로 꿈과 같은 영화를 만든다.

“길을 걷다 뭔가 그립다는 느낌이 동반할 때도 있고, 꿈 같은 거, 아니면 음악 같은 형태로 재현해보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있다. 그렇다고 리얼을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3월에 신작 <립밴윙클의 신부>란 작품이 개봉하는데, 이건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이 무대인 작품이다. 나에겐 3·11 이후가 무대인 첫 영화인데, 그렇다고 원폭 이야기랄지, 쓰나미, 지진이 나오진 않는다.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 정치적인 거라기보다는 우리 내부의 문제에 대해 그려보고 싶었다.” 현실의 작용 이후 울려 퍼지는 울림의 이야기. 이와이 슌지 감독은 현실을 반영해 꿈 같은 영화를 만든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다소 의문스러워 보이는 작품이 몇몇 있다. 아르바이트 구인 정보지 의 의뢰로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 나 일본의 걸 그룹 AKB48의 노래 ‘벚꽃 책갈피’의 뮤직비디오 같은 거 말이다. 환상과 꿈의 영화감독이라 불리는 이와이 슌지에게 노동시장의 현실과 오타쿠 걸 그룹의 일상이 웬 말인가.

하지만 실제로 각각의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이와이 감독이 그 작품을 연출했는지 납득하게 된다. 이와이 슌지는 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아침 첫 조수의 향기로 묘사했고, AKB48의 뮤직비디오에선 졸업을 앞둔 여중생들이 기념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섬세하게 그려냈다. 리얼리티에 대한 이와이 감독 특유의 시선이다. 그리고 그 특유의 시선은 그가 소녀를 그릴 때 가장 잘 발휘된다.

<하나와 앨리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등 많은 경우 이와이 슌지 영화에서 주인공은 소녀다. 본인은 “신작 <립밴윙클의 신부>에선 주부가 주인공”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의 영화에서 소녀는 세상의 어떤 출구를 열어주는 열쇠와 같다. 좀처럼 눈치채기 힘든 디테일의 습관, 그리고 소녀들끼리만 나누는 일상적인 행동에서 그는 마술과도 같은 순간을 그려낸다. “여성은 매력적인 존재라 생각한다. 그리고 관객들도 아마 그럴거라 생각해서 소녀가 자주 주인공인 게 아닌가 싶다. 같은 이야기라도 곤충, 바퀴벌레를 대상으로 할 순 없지 않나.(웃음)” 특히나 <하나와 앨리스>에서 배우 오디션에 참석한 앨리스(아오이 유우)가 이와이 슌지 감독이 직접 쓴 곡 ‘워아이니-아라베스크’에 맞춰 종이컵을 꺾어 신고 발레를 하는 대목은 그저 아찔하게 아름답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이미 유작을 남겼다. 아직 살아 있는 감독에게 이 무슨 불길한 얘기일까 싶지만 그는 2001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공개한 뒤 줄곧 그 영화가 유작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해왔다. 세기말을 배경으로 소멸해가는 한 소년의 청춘과 출구 없이 닫힌 현실의 세계가 이후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가 됐기 때문일 거다. “1993년 TV 드라마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를 만들었던 영향도 있을 것 같은데 16년 전의 영화임에도 내 안에 계속 남아 있다. 테마가 어려우면서 재미있는 세계라 계속 연장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그와 비슷한 무게를 가진 작품으로 일본의 영화감독 이치카와 곤의 일생을 기록한 〈이치카와 곤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척추결핵과 태평양전쟁 징집, 부인의 죽음 등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영화감독 이치카와 곤의 삶을 작품과 접목하며 기록한 작품인데, 여기서 이와이 슌지는 새로운 방식의 화법을 실험했다.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고, 자료 사진을 대량 사용해 감독 본인이 직접 찍은 영상은 단 한 컷도 쓰지 않은 거다. “소설을 스크린으로 연출한다는 감각으로 해본 작업이었다. 문장은 직접 표현, 상대에게 말로 전달하는 것이니까 강하지 않나. 영화지만 영화가 아닌 무엇이랄까. 실제로 작품을 보니 지루한 다른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더라. 매우 집중하게 되고, 정말 박력이 있다. 굉장히 스토이크한 방식의 작업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치카와 곤 이야기>가 무미건조한 기록영화인 건 아니다. 이와이 감독은 문장과 사진을 마치 리듬으로 꿰어내듯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 실험은 자신의 소설 <집 지키는 개는 정원을 지킨다〉상영회에서 또 한 번 행해졌다.

그는 소설의 첫 장을 극장에서 상영했다. 무지의 화면 속에 음악과 함께 소설 속 문장이 영사된 것이다. “이게 잘될까 싶었는데 영화 보는 느낌이 났다. 내 안의 영상이란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순간이기도 했고, 이러다 실사영화는 더 이상 못 찍는 거 아닌가(웃음)싶기도 했다. 영상 표현과 문장 표현의 관계에 대해 깊이 매료된 계기고, 문장이라는 게 내 안에서 써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거라는, 일종의 소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뿐한 템포로 디뎌내는 아픔의 현실, 그리고 문장과 영상의 경계를 넘어 스토이크하게 연출해낸 세계. 이와이 슌지의 영화가 가끔 시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