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을 위한 버킷 리스트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엔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온 세상이 새하얀 침묵에 잠긴 밤, 오직 이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눈송이처럼 낭만적인 버킷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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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도루묵
눈 오는 밤, 그저 생각나는 건 정종이나 소주다. 안주는 너무 화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뻔하고 뻔한 노래가 나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음악이 없는 편이 훨씬 낫다. 미닫이문을 스윽 열고 들어서자 김 서린 안경 너머로 취한 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섞여들면 마음은 푸근해질 것이다. 서울의 술꾼들이 사랑하는 맛집은 주로 을지로에 있다. 창업 30년은 기본으로 넘어가는 나름의 노포가 즐비하고 그 이상의 나이를 먹은 5층 내외의 건물들은 서울을 고향으로 인식하게 하는 몇 안 남은 조경이다. 막 썬회와 해물로 1차를 하고 맥주 500cc에 노가리 따위를 곁들여 2차를 한다. 남는 건 두셋이 고작. 행여 모두가 마음이 통하면 최선이고 싫지 않은 사람들로만 짜여도 차선은 된다. 나는 외친다. “야, 우리 도루묵에 소주 각 1병씩만 딱하고 헤어지자!” 을지로 3가 골뱅이 골목 초입에 있는 을지오뎅.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오뎅 탕’ 전문으로 시작한 가게지만 술꾼들의 주요 타깃은 도루묵이다. 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입구에서 배 속을 알로 꽉 채우는 도루묵을 1년 내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구이도 찌개도 수준급이다. 분리된 테이블도 없이 커다란 ‘스뎅’ 오뎅 테이블 하나에 스무 명 남짓 둘러앉으면 가게가 꽉 찬다. 나란히 앉아 소주 한 병을 시킨다. 데운 백화수복 한 컵을 시켜도 좋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도루묵알을 씹으며 전작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눈다. 보통은 하나 마나 한 얘기다.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하나 마나 한 얘기를 한다. 괜찮다.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의 이야기란 잔의 무게를 덜고 도루묵의 배를 비우기 위한 연료니까. 겨울의 작당 모의란 다시 해가 뜨면 빛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글 / 김작가(칼럼니스트)

 

순백의 산책로
눈 내리는 밤을 좋아한다. 특히 많은 사람이 있는 창 넓은 카페, 혹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난 거의 매일 카페에 앉아 일을 하는 편인데, 집중하다 갑자기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으로 엄청난 폭설이 내리고 있어 약간 놀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쏟아지는 만큼 소리가 들려오는 비와 달리 눈은 너무 조용하고 또 너무 격렬해서,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들뜬다. 그때 카페 안 다른 이들의 얼굴을 보며 그 묘한 들뜸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 혼자 살짝 웃게 되는 그런 순간이 좋다. 그리고 다시 일에 집중하다 고개를 들어보면 어느새 눈이 완전히 멎어버렸음을 확인하게 되는 그 순간도. 그러나 때로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참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일을 다 접고 밖으로 나가 가까운 공원을 향해 걷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운동이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이미 모두 공원을 떠났고, 어째서인지 자꾸 걷고 싶어 하는 연인들만 듬성듬성 보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걷고 있는 순간을 좋아한다. 빛이 넘치는 거리에 비해 조명이 제한된 어두운 인공의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를 좋아한다. 우산을 잡은 손이 차갑다고 느끼면서, 흩날리는 눈과 어둠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좋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약간 젖어버린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는 그 순간도. 글 / 황인찬(시인)

 

개를 위한 시간
눈 오는 밤에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당장 개들을 데리고 산책로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개는 언제라도 펑펑 내리는 눈 그 자체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온다고 누군가가 그리워져 감상적이 되거나 어디 놀 건수 없을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거나 내일 아침 출근길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마치 오랫동안 이 순간만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저 네 발로 폭신한 눈의 촉감을 느끼며 뛰다가 거대한 빨래집게 같은 입으로 눈을 퍼먹으며 또 뛸 뿐이다. 만약 누군가 행복이 무어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일단 뭐 새로운 게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긴 하겠지만 결국 언제라도 같은 대답을 하고 말 것이다. 내게 행복이란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행복해하는 걸 보는 일인 것 같다. 다리와 배의 털에 눈이 주렁주렁 덩어리로 맺혀 더는 뛰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개들이 나를 쳐다볼 때쯤 이면, 나는 나도 모르게 탄식하듯 중얼거리곤 한다. 아이고, 이게 행복이구나. 집에 돌아와서 나와 개들의 젖은 옷을 널어놓은 후엔, 꼬질꼬질해진 개들을 씻기고 털을 말려주어야 한다. 그다음엔 내가 씻는다. 길고 험난한 과정이라 여기까지 마치고 나면 이미 깊은 밤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냉장고에 남은 과일을 뒤져 따뜻하게 뱅쇼를 끓여 먹을 것이다. 계피는 꼭 있어야겠고 정향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이웃집 지붕에 동그랗게 내려앉는 눈을 보며 뱅쇼를 홀짝이고 있노라면 누군가 그리워져 감상적이 되거나 어디 놀 건수 없을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대로 살짝 쓸쓸한 기분을 음미하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그러니까 겨울엔 레드 와인과 계피가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글 / 정우열(만화가)

 

별 헤는 야한 밤
눈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별을 보러 가야 한다. 이왕이면 직장인들을 위해 눈은 주말에 와줘야 한다. 신이시여, 제발. 플리즈! 자, 이제 텐트를 챙기고 떠날 준비를 하자. 버리고 올 수 있는 싸구려 텐트도 괜찮다. 눈이 산을 덮기 전에 산행을 서두르되, 국립공원이나 등산로는 무조건 피해야 한다. 둘만의 데이트를 즐겨야 하니까. 적당한 곳에 도착하면 이동식 간이 난로를 켜고 밤이 오길 기다린다. 분명 애인은 그깟 별을 보자고 여길 오자고 했느냐며 투덜거릴 것이다. 성격에 따라 욕을 할 수도 있다. 감수하자. 끝까지 엄청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고 사기를 쳐야 한다. 왜냐고? 당신이 기다리는 별은 다른 별이기에. 알코올(기왕이면 독주가 좋다)을 마시다 취기가 오르면 가볍게 서로를 어루만진다. 짙은 어둠을 뚫고 야릇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 이 공간이 야성의 감각을 깨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누가 이 야밤에 여길 오겠는가? 물론 산짐승이나 귀신이 나타날까 겁이 날 수도 있다. 생각의 타이밍을 좁혀야 한다. 맹수처럼 공격적으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 한마디는 반드시 해줘야 한다. “맘껏 소리 질러!” 텐트 사이로 흘러드는 별빛을 보며 자연인의 모습으로 돌아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카타르시스를 잊지 못하고 눈 오는 날마다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 번 더?” 그때 또 떠나길 바란다. 눈 오는 밤, 야산을 찾는 커플을 만났다면 멀리 피해주는 것도 예의다. 단, 폭설이나 눈사태는 피하시길. 글 / 봉만대(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