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뜨겁게 삶을 노래하는 거미

데뷔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거미는 여전히 뜨겁게 삶을 노래하고 노래로 말을 건넨다. 백 마디 말보다 노래 한 곡에 마음의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거미의 노래를 듣는 시간이 그렇다.

MOKKE_3225p

케이프와 롱부츠는 랑방(Lanvin), 블랙 원피스는 앤 드멀미스터(Ann Demeulemeester).

<복면가왕>에서 소‘ 녀의 순정 코스모스’의 열창을 감상한 시청자들은 알고도 속아주는 거짓말을 눈감은 공범들이었다. 코 없는 꽃분홍의 코스모스가 김현철의 ‘그대니까요’의 클라이맥스 “이제 헤어지지 말아요” 소절을 부르는 순간 가면은 의미가 없어졌다. 오르막길에서 엔진 좋은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듯 쭈욱 올라가는 음정,미세한 떨림 하나하나에 담긴 감성, 심장을 간질이는 음색, 쉼표 사이 공기까지 채워지는 감동은 오직 거미만의 것이었다. 특히 3라운드 ‘양화대교’는 수세기 전 말라버린 김구라의 눈물샘까지 적셨다. 더 이상 모르는 척하기도 민망했던 판정단은 예능을 내려놓고 경연마다 코스모스의 노래를 진심으로 즐겼다. 거미도, 판정단도, 시청자도 행복하던 10주 동안의 브라운관 콘서트였다.

2015년 한 해, 거미는 데뷔 이래 그 어떤 때보다, 그 어떤 가수보다 뜨겁게 노래를 불렀다. 90년대 남자 보컬리스트들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앨범 를 발표했고 <복면가왕>을 비롯해 <히든싱어 4> <투 유 프로젝트-슈가맨> <언프리티 랩스타 2> 등 다수의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경연 방식을 취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출연은 곧 그랜드슬램 달성의 다른 말이었다. 콘서트도 멈추지 않았다. 돔구장을 채울 수 있는 저력을 가졌음에도 소극장을 선택, 더 가깝게 목소리를 들려줬고, 서울 청계천, 부산 해운대, 광주 충장로 한복판에서 기습 버스킹을 했다. V앱 ‘음악 읽어주는 여자’에서 DJ로도 나섰다. 거미의 올해 행보는 자신이 있는 곳으로 청자들을 불러들이는 가수와 달랐다. 이름을 널리 알릴 필요도, 가창력을 검증받을 필요도 없지만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갔다. 그리고 그 방식은 과거 어느 때보다 순수했다. 가면과 커튼 뒤로 몸을 숨기고 목소리만 들려주고, 리메이크곡으로 선입견과 장르를 걷어내니 거기엔 오직 거미의 감성만 남았다. 그리고 그 감성은 성별이나 나이, 국적, 취향 등 청자의 어떤 상황에도 상관없이 통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려운 음악을 하는 가수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천재 보컬리스트의 바람은 그렇게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거미는 자기만의 감성에 심취하지 않는다. “데뷔 때부터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자는 마음이에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갖게 된 자세예요. 대중이 좋아해줘야 저도 보람을 느끼니까요. 많은 분들이 공감해야 오래 남는 곡이 되는 거 같아요.”

스스로에게 거미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것도 대중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별히 고집하는 장르도 없고, 뮤지션으로 불리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거미는 자신의 음악을 ‘무엇’이라고 규정짓지 않는다. 그녀에게 음악 장르란 노래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수식어일 뿐이다. 거미가 주목하는 건 노래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다. “노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말을 잘 전달해야 상대방이 잘 알아듣잖아요. 노래 부를 때 그 부분에 가장 주력하는 편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노래도 1집의 ‘나는’, 4집의 ‘따끔’처럼 구체적으로 감성을 건드리는 가사가 있는 곡이다. 노래 속 숨‘ ’ 역시 그녀에겐 노래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성도 많이 변했죠. 이별 노래로 따지자면 예전엔 이별하면 미칠 것 같은 감정이 나왔다면, 지금은 다 괜찮아질 거다, 라는 느낌이 나오는 거 같아요.” 이별 노래 전문으로도 불리던 거미의 음악 속에는 우리가 지내온 시간이 담겨 있다.

MOKKE_3323yp

재킷과 화이트 셔츠, 팬츠는 모두 랑방(Lanvin), 앵클 부츠는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거미는 이제 큰 그림을 본다. 과거에는 그저 노래를 잘하고 싶었다면 지금은 인생을 잘 살아야 음악이 잘 나온다는 생각을 한다. 잘할 수 있는 음악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변화를 주자는 고집도 생겼다. 거미는 테크닉의 함정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를 창작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미니 앨범<사랑했으니…됐어>에서 자작곡 ‘사랑해주세요’ ‘놀러가자’를 선보였지만 각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면 가짜 아니냐, 자기 얘길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을 받아요. 저는 작곡가분들이 써주시는 곡을 재해석해서 표현해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저만의 해석을 통한 음악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줬어요. 물론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해서 공감을 받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데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요.”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곡을 거미가 불렀을 때 또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감동을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지만 거미가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년을 마무리하는 의식처럼 해오고 있는 콜라보 공연(거미는 매년 다른 뮤지션과 콜라보 공연을 해오고 있다. 올해의 파트너는 이정과 스윗소로우다)과 단독 공연이 기다리고 있고, 정키의 제안으로 성사된 시스코와 듀엣곡 싱글 발표를 앞두고 있다. 혼자서는 하지 못한 얘기들을 다른 뮤지션과 함께 풀어낼 생각에 매일 설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제게 음악은 팔자예요. 곱게 얘기하자면 운명. 노래하게 태어난 거 같은 느낌이에요. 엄마가 말씀해주셨는데 제가 말을 더듬더듬할 때 부터 노래를 불렀대요. 시골에서 태어나서 동네에 피아노가 있는 집이 딱한 곳이었는데 거길 가자고 항상 울곤 했대요. 그렇게 피아노를 시작했고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하지만 음악이 무엇인지 설명은 못하겠어요. 노래하면 할수록 인간이 음악으로부터 받는 위로와 치유의 힘이 대단함을 느껴요. 늙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노래로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