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두 얼굴, 박건형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박건형 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악당 자크라는 1인 2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다. 대형 창작 뮤지컬로 유례없는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 뮤지컬에서 그는 서로 다른 욕망의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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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과 셔츠는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바지는 랄프 로렌 퍼플 라벨(Ralph Lauren Purple Label), 더블 몽크 스트랩 슈즈는 슈즈 바이 런칭 엠(Shoes by Launching M).

커튼콜이 올라가는 순간, 박건형은 조금 전까지 자신을 향해 으르렁대던 괴물(한지상)을 꽉 끌어안았다. 차가운 과학의 숭배자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쉽게 그 포옹을 허락한 것은 아니다. 일단은 한발 물러섰다가 후배 한지상이 애교 섞인 투정의 몸짓을 보이자 못 이기는 척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뜨겁게 서로를 격려했다. 생명 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침범한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무명의 피조물이 벌인 그 길고도 지독한 싸움이 비로소 끝났다.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은 막이 닫힌 후에도 한참 동안 기립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매회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는 뮤지컬 <프랑켄슈 타인>은 충무아트홀이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순수 창작 뮤지컬이다. 2014년 초연 당시 ‘더 뮤지컬 어워즈’ 올해의 뮤지컬을 비롯, 9개 부문 최다 수상을 기록했고, 각종 뮤지컬 시상식을 휩쓸었다. 이례적인 성공이었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은 누구나 아는 낡고 흔해빠진 얘기다. 죽은 자의 뼈로 만든 추악한 괴생명체가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 대한 증오심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그로 인해 삶이 파괴된 박사가 북극까지 그를 쫓아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드라마와 연극은 물론 만화와 게임으로 재생산되기도 했다. 연출과 극본을 맡은 왕용범은 나폴레옹 시대로 이야기의 배경을 옮겨 새로운 화젯거리를 쏟아냈다. 전쟁과 흑사병, 마녀사냥 같은 시대적 광기가 극적인 재미를 더했고 화려한 볼거리가 덧붙었다. 창작 뮤지컬이라는 태생적 한계마저 뛰어넘었다. 음산한 실험실을 비롯한 무대장치는 웬만한 브로드웨이 작품보다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뮤지컬이 등장한 것이다.

박건형은 지난 11월 26일 충무아트홀 대극장 무대로 귀환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새로운 주인공을 맡았다. 초연에 이어 출연하는 유준상과 전동석이 그와 함께 빅터 역으로 캐스팅됐다. “초연은 보지 못했습니다. 출연 제안을 받긴 했지만 <진짜 사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하다 목 디스크가 생긴 터라 작품에 올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욕심만 갖고는 이 작품이 가진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었죠.” 이번엔 전작의 인기로 인한 부담감 때문에 한참을 망설였다. <헤드윅>을 통해 그는 이미 관성이 생긴 작품에 들어가 뭔가를 재창조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한 바 있다. 물론 그 냉정한 평가를 극복해내는 방법도 잘 알고 있다. “제가 아랑곳하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보란 듯이 공연을 했어요.” 박건형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헤드윅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건드윅’이라는 애칭이 생겼고 10주년 공연에도 노미네이트되었다. 이번에도 그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특히 이번 뮤지컬이 흥미로운 건 주요 인물들이 모두 1인2역을 소화한다는 점이다. 1막에서 괴물을 탄생시킨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2막에선 극악무도한 격투장 주인 자크가 되어 괴물을 괴물로 길들인다. 덕분에 작품의 주제는 선명해지고 이야기는 더 드라마틱해졌다. 하지만 한 무대에서 전혀 다른 두 캐릭터를 동시에 연기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선 곤혹스럽다. “빅터 하나만 생각하기도 버거운데 자크까지 해야 하니 너무 힘들더군요. 그래서 연출가에게 자크 역은 다른 배우한테 주면 안 되겠느냐고 묻기도 했어요. 절대 안 된대요. 물론 저도 그게 더 극적이란 건 알죠. 빅터와 자크를 관통하는 부분이 무엇일지에 대해 계속 고민을 거듭하는 중입니다. 더욱 깊숙이 들어가보고 싶어요.” 박건형이 연기하는 빅터와 자크는 정말이지 다른 인물 같다. 1막에서의 그가 외골수 기질을 지닌 귀족적인 풍모의 지식인이라면 멋들어진 춤 솜씨를 선보이며 등장하는 2막의 자크는 외모부터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우 선장을 연상시킨다. “단발머리 가발도 한번 써봤어요. 그런데 그건 또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윌리 웡카 같더라고요. 조니 뎁 그분이 워낙 독특한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아무튼 제가 생각한 건 빅터는 생명을 창조했지만 그 생명은 괴물이 되었고, 그 괴물은 자크를 만나 진짜 괴물이 되어버렸단 겁니다.”

플라워 패턴 재킷과 셔츠, 바지는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플라워 패턴 재킷과 셔츠, 바지는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현실에서도 그는 1인2역을 산다.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위의 박건형과 리얼리티 프로그램 속의 그는 사뭇 다르다. 최근엔 tvN에서 새로 시작하는 생활 밀착형 인테리어 토크쇼 <내 방의 품격>의 첫 녹화를 마쳤다. 노홍철, 오상진, 김준현과 함께 셀프 인테리어 팁을 알려주는 방송이다. “저도 그 맛을 본 사람 중 하나예요. 결혼 전에 혼자 전셋집에 살 때도 인테리어 공사를 했거든요. 돈 아깝다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집에 들어갔을 때 일단 기분이 좋잖아요. 저처럼 관심은 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한 방송이죠.” 연극과 출신인 박건형은 어지간한 목공이나 페인트칠 작업도 능숙한 편이다. <진짜 사나이>에서 의장대 전역자로서 뜻밖의 면모를 보여준 것과 같은 반전이다. 예능에서 워낙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탓에 일부 관객들은 무대에 선 그를 연예인처럼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 뮤지컬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온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건 역시 무대다.

“전 연기가 좋아요. 그래서 드라마도 하고 영화도 하게 됐지만, 제일 좋아하는 건 사실 무대예요. 언제나 생방송이고, 무대에 서기 전의 떨림과 막이 올라갈 때의 설렘! 무대에서 죽을 것처럼 최선을 다한 후,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다시 살아나는 그런 감정의 순환을 통해 제가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그토록 뮤지컬을 사랑하는 만큼 기형적으로 성장한 뮤지컬 시장과 잘못된 제작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특정 배우들의 높은 개런티와 그로 인한 폐해, 여전히 열악한 현실과 무분별한 아이돌 캐스팅의 문제점 등에 대해 그는 열변을 토했다. 최근 < 총각네 야채가게> 공연 중에 발생한 비비탄 발사 사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후배들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단체 관람 온 중학생들을 위한 오전 특별 공연이었다고 하더군요. 객석에서 총알이 날아왔지만 공연은 계속했다고 합니다. 저 같으면 당장 멈췄을 거예요. 배우들은 무방비 상태잖아요. 눈에 맞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이건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정말 화가 나요.” 요즘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후배들에게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지 않고선 버티기 힘들다는 걸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저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해요. 대학로에 가보면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다’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희망이 어떤 처지인가요? 무대예술을 사랑하는 젊은 친구들과 지금껏 무대를 지켜온 선배들을 제가 모두 책임질 수는 없겠지만, 그 꿈은 계속 갖고 있을 거예요. 그런 의지마저 버린다면 전 끝난 거거든요.”

지난 12월 4일 100회 공연을 한 <프랑켄슈타인>은 이 같은 공연계의 불황 속에서 등장한 대형 창작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2016년 2월까지 3개월여간 계속되는 대장정에도 박건형은 끊임없이 고민할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빅터가 죽음의 부활이라는 미친 실험에 집착하는 이유도, 조물주로부터 버림받은 괴물이 복수의 화신이 되어 모두를 파멸로 이끈 것도 결국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두려움과 고독 때문이었다. 배우 역시 관객의 관심과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배우가 눈부시게 빛나 보이지만 정작 무대에 서서 객석을 보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무섭죠. 너무 밝은 건 암흑과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그런 얘길 해요. 빛 속에 어둠이 있다고. 그 어둠을 견뎌내고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빛 속에 설 수 있다고요.” 빅터와 괴물은 바로 그 빛과 어둠이기도 하다. 세상 끝까지 괴물을 쫓아간 빅터는 끝내 어둠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박건형은 지금 빛나는 무대에 우뚝 서 있다. 뮤지컬을 향한 순정의 시선으로. 그의 무기는 바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