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과 스크린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10여 년 전 개봉 영화가 다시 극장에 걸린다. 어릴 적 스타가 무대에 등장한다. 잊혔던 과거의 히트곡은 당당히도 음원 차트 1위다. 지금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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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승과 현진영, 그리고 이글 파이브 멤버 출신 리치. 추억을 훑다 꺼내 든 이름이 아니다. 근래 포털 사이트에서 숱하게 검색되던 이름이다. 구본승은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에 나와 94년 히트곡 ‘너 하나만을 위해’를 불렀고, 댄스 가수 현진영은 가면 쓰고 노래하는 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소방관 차림으로 의외의 발라드 무대를 선보였다. 90년대 미디엄 템포 발라드로 인기를 누렸던 리치 역시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에서 깜짝 무대를 보여줬다. 이들의 주요활동 시기가 90년대 중반이었으니 거의 20여 년 만의 등장이다. 게다가 구본승은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에서 주목받으면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스타킹>에도 출연했다. 그는 16년 만에 신곡도 발표할 예정이다. 요즘 가요계에선 90년대 스타들의 기세가 신인 아이돌 못지않다.

TV의 과거 회귀 현상은 사실 이미 방송의 주요 흐름이 되었다. 2011년 시작한 <나는 가수다>는 신보나 특정한 뉴스 없이도 오래전 가수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고, 덩달아 방송을 시작한 <불후의 명곡>은 레전드란 이름을 붙여 과거의 가수들을 불러냈다. 한때의 영광을 소환해 즐기는 리메이크 쇼다. 그리고 이들의 타율은 매우 높았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노래는 다음 날 음원 사이트의 랭킹 수위를 차지했고, 노래의 주인공은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래서 이제는 타깃을 노리고 시작되는 프로그램이 많다. 영화 <서칭 포 슈가맨>의 틀을 참조해 만든 <투유 프로젝트-슈가맨>은 대놓고 오래전 가수를 찾아가는 컨셉이고, <복면가왕>의 복면은 잊혔던 스타의 등장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위한 요란스러운 장치다. 이제 복고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타율 좋은 전략이 되었다.

요즘 극장가에선 작은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가 한 편있다. 2005년 개봉한 <이터널 션샤인>인데, 이 영화는 11월 재개봉해 2005년 개봉 당시 관객 수인 16만에 버금가는 관객을 불러 모았다. 생방송 못지않은 재방송 성적인 거다. 그리고 이런 극장가의 재개봉 흐름은 하나의 추세가 되었다. 지난 10월 25일엔 영화 속 미래를 기념하며 <백 투 더 퓨쳐> 시리즈가 다시 스크린에 걸렸고, 99년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영웅본색> 시리즈 등도 관객과 재회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 <러브 액츄얼리>, 마니악한 인기를 누렸던 <렛 미 인> 등도 재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독립영화 에이전시 무브먼트의 진명현 대표는 “예술영화 성향을 갖는 재개봉 영화의 관객은 주로 30~40대다. 티켓 파워를 가진 이들이 자신들이 20대 초반에 즐겼던 영화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문화 전성기를 누렸던 소비자들이 이제 생산자가 되어 콘텐츠를 큐레이팅 중이란 얘기다. TV 방송계 못지않게 지금 영화계는 재활용이 중요한 전략이다.

영화의 재개봉은 어쩌면 단순히 판권 계약 기간의 문제일 수도 있다. 대개 외화의 경우 8년, 10년 단위로 라이선스를 맺는다. 오래전 가수들의 활약 역시 그저 몇몇 프로그램 기획의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과거의 것을 다시 꺼내어 즐기는 추세는 별다른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2010년대 국내 문화 시장이 어쩔 수 없이 꺼내 든 궁여지책이란 인상도 든다. 대중음악 평론가 김윤하는 “90년대가 상업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황금기였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음악 시장의 80%를 아이돌 케이팝이 점유하고 있는 현재 음악 시장을 생각하면 90년대의 재활용이 유일한 대안이란 얘기다. 게다가 이미 개봉, 공개되어 히트했던 음악, 영화는 불안 요소가 많은 대중문화 시장에서 비교적 안전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시장에서 한 차례 검증받았다는 사실이 그만큼의 리스크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영화도, TV도 지금 반복은 문화시장의 가장 유효한 옵션이다.

팝과 가요, 록과 댄스가 공존하고, 심지어 트로트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던 90년대. 다양함과 풍부함을 다 성취한 90년대는 사실 당연히 돌아가고 싶은 시대일지 모른다. 연령대별로 각각 즐길 거리가 있었고, 장르별로 새로움이 가득했으니 어찌 탐내지 않을 수 있나. 대중음악 평론가 김윤하는 “지금의 문화 영역이 자꾸 90년대를 끌어오는 건 그나마 복고가 가능한 게 90년대이기 때문이다. 70년대, 혹은 80년대, 아니면 2000년대 초를 다룰 땐 다양한 연령층이 공감하기가 힘들지만 90년대는 얼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시대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과거에만 기대는, 빚지고만 만들어가는 문화 콘텐츠의 수명이 길 리는 없다. 오래전 노래를 다시 들으며 추억에 빠지고, 기억 속의 영화를 들춰내 재관람하는 것도 좋겠지만, 지금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거꾸로 돌아가는 문화의 시계를 되돌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