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동네 이야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쌍문동의 기억을 들추어낸 지금, 새삼 동네 길의 추억을 꺼내보았다. 호화로운 번화가는 아니어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릴 적 우리 동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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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겨울의 북촌

문득 ‘그 집’이 그립다. 이렇게 추운 계절이면 더욱 그렇다. 지금은 부암동에 살면서 ‘서촌’과 금천교시장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지만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회동에 살며 ‘북촌’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큰 한옥 옆에 문을 따로 쓰는 셋방 같은 구조라 사람들이 ‘하녀방’ 이라고 놀렸던 가회동 집은 친구 서너명이 한 번에 놀러 올라치면 포화 상태가 될 만큼 작았다. 하지만 한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부엌 창 덕분에 마음으로 느껴지는 크기는 아흔아홉 칸 저택이 부럽지 않던 집이었다. 특히 밤새 눈이 내린 아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한 기억은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게 남아 있다.

20대 후반 이제 막 영화 주간지의 신입 기자가 되어 일산의 지루한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던 나에게 서울의 ‘북촌 생활’은 꿈 같은 것이었다. 벚꽃 흩날리는 정독도서관의 봄과 낙엽 쌓인 경복궁의 가을, 소격동이나 가회동 같은 정겨운 동네 이름, 21세기 같지는 않지만 가장 서울다운 골목 풍경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특히 2000년대 초 ‘서울아트시네마’가 자리하고 있던 소격동의 아트선재센터는 그 로망의 구심점이 되었다. 김지운, 박찬욱, 류승완, 이재용 같은 감독님들이나 유지태, 김호정 같은 배우들과 마치 ‘영화의 친구들’처럼 자주 마주쳤던 그곳은 시네필들의 마지막 아지트 같기도 했다. 비디오로만 보았던 영화를 스크린으로 마주하는 날이면 마음의 곳간이 가득 차는 것 같았고, 스즈키 세이준의 <동경 방랑자>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오는 밤이면 온몸을 도는 기묘한 활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3호선을 타러 가는 안국역까지 숨이 찰 때까지 뛰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 시작된 북촌 생활은 그다지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그곳에 살면서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북적이는 인간관계를 넓혀갔지만 마음을 쏟을 단 한 사람을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편집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더 어린 후배들과 함께 웹진을 창간하는 사고를 쳤다. 독자들의 환영도 받았고 매체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에 벅찬 순간도 있었지만 꿈만으로는 동료들의 밥그릇을 채워줄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청춘을 바쳤던 잡지가 망하고 사무실도 없는 열 명의 남은 동료들이 그 작은 집에 테트리스처럼 쌓여서 이후의 행보에 대해 회의를 하던 시간도 있었다. 극단적인 행복과 희열도 찾아왔지만 복구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과 낙담이 찾아오는 순간이 더욱 많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면 집을 나와서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동네를 걷고 또 걸었다.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사간동에서 소격동으로 정독도서관에서 숨을 한 번 돌리고 다시 계동에서 재동으로… 골목이 이어지고 발이 닿는 곳이면 무작정 걸었다. 어느덧 ‘씨네코드 선재’로 이름이 바뀐 영화관은 현실의 때와 먼지를 제거하고 입성하는 무균실이었다. 다시 돌아온 가회동의 내 집은 일상의 치열한 전투를 끝내고 겨우 피신해 눈을 붙이는 방공호가 되었다. 이제 와 북촌을 생각하면 따뜻한 봄보다, 뜨거운 여름보다, 여유로운 가을보다, 시리고 시린 겨울의 풍경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 시절의 심리적 온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북촌의 삶이 있었기에 최소한의 부상과 상처만 안은 채 지금까지 건강하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11월 30일 씨네코드 선재가 문을 닫았다. 내가 살던 가회동 집 역시 더 이상 세상에 없다. 주인아저씨가 오랜 시간 지키던 한옥을 집안 사정으로 내놓게 되었고, 아랫집 모 재벌은 그 집을 사서 한집으로 트는 공사를 했다. 언젠가 그리운 마음에 가회동을 찾았지만 나의 ‘하녀방’은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사라졌고, 눈물과 이야기가 피고 지던 그 집 앞의 골목도 이제 진입 불가로 바뀌었다. 아마, 내 청춘의 시간도 그러할 것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

2015년 겨울. 나는 더 이상 동료들의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프리랜스 기자고, 인간관계는 단출하지만 깊어졌으며, 북촌이 아닌 서촌에 산다. 그러나 이렇게 밤새 눈이 내린 아침이면 어쩐지 그립다. 북촌, 그 미숙하고 전쟁 같던 내 청춘의 시간이. 글 / 백은하(영화 저널리스트)

골목의 믹스테이프, 쌍문동

1988년에 나는 봉천동에 살고 있었다. 그전에 살던 곳은 쌍문동이었다. 90년대가 되어 ‘오렌지족’과 선후배, 친구가 되었을 때 그야말 로 무시당하던 동네 명함이었다. 살 때는 그런 걸 알지 못했지만.

<응답하라 1988>은 나의 조금 윗세대 이야기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순기능이라면 지금 10대인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가 TV 앞에 앉아 대화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크크크’라고 웃는 그 옛날의 세간이나 동네 인심 같은 것이 모두 진짜던 시대, 예컨대 그때는 정말 골목이라는 게 있었다. 차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아니고 공을 차고 놀던,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고르게 바르지 않은 울퉁불퉁한 골목길. 아파트 단지는 조금씩 세를 넓혀가고 있었지만, 압도적 다수는 ‘연립주택’이라든가 ‘빌라’라고 부르는 3층짜리 마당 있는 주택단지에 살았다. 내가 쌍문동에서 살던 집은 1층을 상가로 쓰는 2층 건물의 2층이었는데, 마당이 굉장히 넓었고 방도 여럿이었지만 집 바로 옆에 난 골목은 흙바닥이었다. 나중에는 그 흙바닥 덕에 동생이 목숨을 구했다. 난간에서 걷는 놀이를 하고 있는 나와 친구를 본 동생이 따라 올라왔다가 골목 쪽으로 추락한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대경실색해 동생을 업고 뛰었는데, 병원에 갔더니 멍든 것 외에 다친 곳이 없어서 식구들이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방에 출장 간 아버지가 꿈에 동생이 나왔다며 뒤숭숭한 마음에 일정을 당겨 집에 올라왔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이야기도 있다.

당시 쌍문동의 동네 풍경이라는 것은 주상복합(사실 이건 요즘 하는 말이고, 그때 아주 번화하지 않았던 동네의 도로변 건물은 다 이렇게 1층이 가게, 2층이 가정집 구조였다)의 특성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만화 속 둘리가 멋대로 쳐들어가 눌러앉아버린 고길동 씨 집은 복 받은 케이스다. 동네에 훨씬 다양한 가게가 필요했다. 마트가 없었으니까. 나와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은 세탁소집 딸과 페인트집 가게 아들이었다. 겨울철이면 ‘곤로(히터)’에 큰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이는 일이 어디에나 일상적인 풍경이었는데 페인트 집 아들은 그 물을 엎어서 큰 화상을 입었다. 서점에 가면 주인아저씨가 알아보고는 책을 추천해주곤 했고, 레코드 가게에 가면 주인아저씨가 새로 나온 추천 음반을 한 곡씩 녹음한 테이프를 싸게 팔곤 했다. 인기곡은 ‘길보드(길거리 리어카에서 파는 신곡 테이프를 보면 인기곡의 추이를 바로 알 수 있어서 빌보드와 길바닥을 합쳐 그렇게 불렀다)’로 바로 알 수 있었고, 음반을 다 사기엔 너무 비싸 주인에게 원하는 앨범과 곡을 몇 개 알려준 뒤 나머지는 ‘알아서’ 채워달라고 하면 믹스테이프를 녹음해 팔았다. 친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내가 직접 만든 믹스테이프였다.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파는 아줌마야 그때는 봄마다 등장했는데, 집의 마당이 너무 훌륭한 나머지 병아리가 닭이 되는 바람에 식탁에 올라와야 했다는, 동심에 큰 상처를 입은 사건도 쌍문동 집에서였다. 아파트도 연탄보일러를 때던 시절이었으니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뉴스에서는 종종 가스중독으로 일가 몇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보도되곤 했다. 부모님이 출근한 뒤 잠들어 있다가 외할머니가 나와 동생을 부랴부랴 깨워 밖으로 나가라고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왜냐하면 문을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이 벽에 쿵, 저 벽에 쿵부딪히며 헤매는 동안 어쩐지 장난 같은 기분이 들어 깔깔대고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니까. 할머니는 언제까지고 벽에 부딪힐 분위기의 우리를 질질 끌고 마루에 데리고 나와눕혔다. 연탄가스중독이라고 불리는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기분은 제대로였지.

1988년의 쌍문동을 <응답하라 1988>에서 보며 느낀 위화감도 있었다. 앞서 말한 바대로 그때는 쌍문동을 떠나 봉천동에 살고 있었고, 관악구청 근처의 아파트가 집이었다. 2호선 서울대입구역 덕분에 시내나 강남으로 놀러 다니는 일이 어렵지 않던 그때의 봉천동을 떠올리면 ‘오피스텔’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고층 건물이 동네에 생겼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생각나는 건 서울대학교에서 엄청난 최루탄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 최루탄이 터지면 얼굴이나 눈을 손으로 문지르지 말고 집으로 가서 흐르는 물에 따가운 부위를 대고 있으면 된다. 그 동네에서는 초등학생도 대처법을 알고 있었다. 1988년에 올림픽도 있었지. 시위도 있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들끓는 용광로 같다던 시절이었다. 글 / 이다혜(북 칼럼니스트)

보석을 숨긴 이태원

외국인이지만 이태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에 건너와 15년 동안은 이태원에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일단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 문화와 음식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고, 한국에서 사귄 친구들도 대부분 한국인이라 굳이 이태원을 찾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이태원은 외국 관광객들이 질은 떨어지나 저렴하게 물건을 구입하거나 소위 A급 짝퉁을 구하는 곳이었고, 상점 주인들도 그런 장사를 했다. “맞춤 정장 한 벌 필요하세요?” “A급 롤렉스 있어요.” 이태원 거리를 걸을 때면 이런 별로 듣기 좋지 않은 얘기가 들려왔다. 식당과 바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전체적으로 다소 지저분했고, 가게는 한국인과 외국인 취향을 분리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외국인은 외국인 레스토랑에, 한국인은 한국인 레스토랑에. 이 경직된 분위기가 이태원을 더욱 친밀하지 못한 동네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의 이태원은 꽤나 많이 달라졌다. 잠시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 이태원을 기존과 다르게 즐기려는 한국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덕이다. 이제 더 이상 이태원은 외국인이 많아 무서운 동네도 아니며, 범죄가 빈번히 발생하는 위험 지역도 아니다. 오히려 풍성한 문화가 융합돼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내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나는 서울의 숨은 뒷모습을 탐험하길 좋아하는데 최근엔 이태원 구석에서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베이커리를 발견했다. 두 명의 잘생긴 프랑스인 베이커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바게트와 크루아상 맛이 예전 파리의 블랑제리에서 먹었던 바로 그 맛이었다. 이태리에서 공부하고 온 젊은 청년이 운영하는 수제화 전문 아틀리에를 발견한 것도 산책의 성과였다. A급 짝퉁을 음산하게 권유하던 길이 외국인, 한국인, 그리고 오랜 시간 해외에서 생활했던 교포들의 교류로 이제야 동네의 제맛을 살려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미웠지만 점점 예쁜 구석을 드러내고 있는 이태원. 다르지만 조화로워서 계속 애정이 간다. 글 / 타드 샘플(칼럼니스트)

장맛 나는 연신내

연신내는 TV나 영화에서 그리 자주 언급되는 곳이 아니다. 드문 사례 중 하나는 영화 <강남 1970>이었다. 헬기를 타고 서울을 돌아보던 권력의 수뇌부들은 제2의 서울을 만들 지역을 논의한다. 한 사람이 물었다. “어제 보신 연신내 쪽은 어떻습니까.” 이에 대한 상대방의 대사를 듣는 순간, 내가 지난 35년을 연신내에 살아야했던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북의 도발도 생각해야지. 아무래도 땅값 올리려면 포사선 끝 밖이 낫지 않겠어?” 당시 북한 포사선의 사정거리 덕분에 연신내는 강남처럼 개발되지 않았다. 그래서 집세가 싼 편이었고, 그래서 저렴한 동네를 찾아다니던 부모님은 연신내로 이사를 온 것이고, 그 이후로도 이 동네가 만만했던 터라 우리 가족은 주변의 불광동, 갈현동, 구산동을 돌면서 지금에 이르게 됐다.

북한 포사선 안쪽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연신내 주변에는 군부대가 꽤 있다. 그곳에서 휴가나 외박을 나온 군인들, 연신내 일대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북한산성을 오고가다 연신내를 지나치는 사람들, 그리고 은평구에 사는 사람들이 이 동네의 상권을 형성한다.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연신내역 6번 출구의 첫 블록으로 들어가 그날 산에서 받은 정기를 동력 삼아 술을 마신다. 그들의 자녀뻘 되는 청소년들은 바로 그다음 블록인 먹자골목에서 분식을 사 먹거나, 옷과 신발 등을 구경한다. 그들의 언니뻘 되는 사람들은 ‘로데오 거리’로 불리는 그다음 블록에서 차를 마시거나, 고기를 먹거나,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연신내에서 오래 살았던 어르신들은 연신내역 2번 출구의 연서시장으로 모인다. 부침개, 족발, 임연수어 등등 계통이 없는 안주와 막걸리를 파는 상점이 즐비한 이곳에서는 김치전 한 장, 제육 한 접시, 막걸리 두 병을 팔고도 1만2,000원을 받을 정도로 술값이 저렴하다.

아직 마흔 살도 안 됐고, 결혼도 안 했고, 당연히 아이도 없지만, 로데오 거리에서 놀기에는 다소 멋쩍은 나이인 나는 먹자골목의 건너편에서 주로 먹고 마신다. 연신내역 4번 출구. 약국 옆길로 들어가는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양지극장 골목’으로 부른다. 지금 양지극장 자리에는 헬스클럽과 사우나가 함께 있는 대형 건물이 들어섰지만, 많은 사람의 입에서는 여전히 ‘양지극장 골목’이다.

양지극장 골목은 고등학생 시절 전에는 함부로 다닐 수 없던 곳이었다. 당시 경찰서가 ‘청소년 통행 제한구역’이라 세워둔 경고문 때문이었다. 유흥가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몇몇 건물은 사람과 업종만 바뀐 채 그대로 있다.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을 찾아 건물로 들어가면, 임권택 감독의 영화 <만다라>에서 지산 스님의 연인 옥순이가 남자를 위해 양말을 빨아주던 곳이 생각날 정도다. 어쨌든 골목의 술집들이 하나둘씩 다른 업종으로 전환되면서 고등학생 시절에는 접근 가능한 동네가 되었다. 양지극장에서 영화도 보았고(<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가 기억난다), 친구들 덕분에 이곳에 가장 맛있는 순댓국과 족발을 파는 가게를 알게 되어 술도 많이 먹었다.

처음 영화 잡지에 취직해서 6년 정도 직장을 다니던 동안에는 연신내 옆 구산역에서 6호선으로 출퇴근을 했다. 이후 패션 잡지로 이직했고, 그때부터는 연신내역에서 3호선을 탔다. 이 골목이 내 생활 반경 안에 들어온 건 그때부터다. 패션 잡지에 적응이 쉽지 않아, 꽤 자주 동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다. 게다가 고등학생 시절 동네 독서실에서 만난 형님 한 분이 이 골목에 소시지 전문점을 낸 덕분에 거의 매일 그곳에서 500 한 잔에 소시지 한 줄만 시켜놓고 야구 중계를 보곤 했다. 나 같은 손님 때문이었는지, 2년 후 무렵 형님은 가게 문을 닫았다. 지금 이 골목에서 드나드는 곳은 족발집뿐이다. 과거 술국을 리필해가며 어울리던 친구 중에 연신내에 남은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만, 강남과 분당으로 간 그들도 어쩌다가 모일 기회가 있으면 연신내에 와서 함께 족발을 먹는다.

지금 나에게 이 골목은 출근과 퇴근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패션지에서 다시 이직했는데도, 3호선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아침에는 사람들로 붐비는 도로변보다 한적한 이 골목을 걷는다. 연신내역 4번 출구를 통해 일터로 나갔다가, 다시 4번 출구로 나와 이 골목을 통해 집으로 가는 게 내 일상이다. 어떤 날은 순댓국을 한 그릇 먹는다. 그렇게 또 어찌하다 보면 연신내에 몇 남지 않은 친구와 마주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시키지도 않았던 술을 시킬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런 생활이다. 야구 선수가 기복 없는 기록을 위해 자신만의 ‘루틴’을 정립하듯, 나에게는 이 골목이 잘 맞는 루틴인 셈이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도시의 관성상 분명히 이 골목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다시 지어질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족발집 장맛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글 / 강병진(<허핑턴포스트코리아> 뉴스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