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펼쳐진 샤넬의 휴일

칼 라거펠트는 공방 컬렉션을 위해 로마행 초대장을 보내왔다. 그리고 전설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가브리엘 샤넬 주연의 드라마틱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Metiers d'art Paris in Rome 2015-16 - Teatro N5 - Cinecitta Studios -Rome - 003

불과 6개월 전, 서울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발표할 때만 해도 샤넬의 나침반이 파리를 지나 로마로 향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트레비 분수와 스페인 계단, 그리고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 루치노 비스콘티와 페데리코 펠리니, <벤허>와 <갱스 오브 뉴욕>의 공통분모이자 이탈리아 수도, 그리고 온갖 유적으로 가득한 바로 그 로마 말이다. 12월 1일 로마 동남쪽 교외의 치네치타 스튜디오(Cinecittà Studios)에는 테러의 위협에도 불구, 전 세계에서 기자와 유명 인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전설적인 영화의 산실로 알려진 치네치타 스튜디오까지 찾아온 이유? 샤넬의 ‘파리 인 로마(Paris in Rome)’공방 컬렉션 때문이다.

밀라노가 아닌 로마에서 이토록 패셔너블한 순간이 또 있었을까? 공방 컬렉션(Métiers d’Art Collection)으로 말하자면 라거펠트가 샤넬 공식 패션쇼 일정과 별개로 매년 12월 샤넬 하우스 장인들의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 시작한 컬렉션이다. 커스텀 주얼리와 단추 공방 데뤼(Desrues), 깃털 및 플라워 공방 르마리에(Lemarié), 자수 공방 르사주(Lesage), 구두 공방 마사로(Massaro), 모자 공방 메종 미셸(Maison Michel), 자수 공방 몽텍스(Montex), 장갑 공방 코스(Causse), 금세공 공방 구센(Goossens), 플리츠 공방 로뇽(Lognon)에 이르는 아홉 곳의 공방이 하나의 컬렉션을 위해 의기투합한 것.

 

샤넬 가문은 고유의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파리, 도쿄, 뉴욕, 몬테 카를로, 런던, 모스크바, 상하이, 뭄바이, 에든버러, 댈러스 등 샤넬 하우스와 인연이 깊은 도시에서 영감을 얻어 컬렉션을 발표해왔다. 그리고 이번 컬렉션을 위해 라거펠트가 지목한 곳은 온갖 상상의 세계와 창작의 욕구가 집결된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였다. 이곳은 <달콤한 인생>으로 유명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여러 걸작을 제작한 이탈리아 영화의 발원지다. 더불어 영화 <벤허> 이후 싼 제작비와 근사한 주변 환경에 매혹된 세계 각국의 영화 제작진이 자신들만의 꿈의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드림 센터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에서는 고대 폼페이를,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을 위해선 19세기 중반의 뉴욕 거리를 완벽하게 재현했던 곳.

그렇다면 이 드라마틱한 영화 세트장이 라거펠트에게 어떤 영감을 선사했을까? 저녁 7시, 치네치타 스튜디오의 네온사인이 환하게 비추는 입구를 지나자 골프 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영화 세트장 입구에서 칵테일 파티가 열리는 ‘로마 안티카(Roma Antica)’ 세트장까지 이동할 관객들을 위한 샤넬 하우스의 배려였다. 어둠이 내린 세트장을 밝히는 횃불을 따라 도착한 곳은 로마 안티카 세트장. 근사한 석고상에 둘러싸여 샴페인을 홀짝이며 속속 등장하는 셀러브리티들을 보고 있자니 이곳이 영화 촬영장인지 쇼장인지 헷갈렸다. 인어 비늘처럼 반짝이는 스팽글 재킷에 가죽 팬츠를 입은 크리스틴 스튜어트, 시스루 블랙 비즈 드레스를 입은 우아하면서도 섹시한 샤넬의 뮤즈 안나 무글라리스, 연한 새먼 핑크 시스루 드레스 차림의 루니 마라, 톱 모델 마리아칼라 보스코노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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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스타일로 샤넬 룩을 입고 쇼장에 나타난 눈에 익숙한 셀러브리티들. 왼쪽부터 안나 무글라리스, 마리아칼라 보스코노, 루니 마라, 크리스틴 스튜어트.

샤넬 쇼에서만 볼 수 있는 특급 셀러브리티들이 죄다 도착하고, 사교의 장이었던 칵테일 파티 시간이 지나자 라거펠트가 감독한 최신 단편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또 다른 세트장 ‘피시나(Piscina)’로 이동했다. <벤허> 등을 촬영하며 치네치타의 명소로 꼽히는 야외 세트장은 이번엔 노천극장으로 변신했다. 이곳에서 라거펠트 감독이 연출하고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제랄딘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 가 상영됐다. 영화에서 코코 샤넬을 현재의 감성으로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까칠한 캐릭터도 매력적이었지만, 1919년에 완성된 빈티지 샤넬 꾸뛰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역시 칼 라거펠트!”라는 찬사가 곳곳에서 이어질 찰나, 관객들은 서둘러 이동했다. 초대장에 적힌 대로 쇼가 열리게 될 ‘테아트로 No.5’ 스튜디오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파리 구시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규모에 또 한 번 놀라며,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세트장이 아닐까 하는 착각 속에 등장한 첫 번째 모델은 캐서린 맥닐. 짙은 스모키 아이에 부풀린 머리, 굵은 깅엄 체크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트위드 미니 드레스에 레이스 스타킹, 그리고 투톤 뮬을 신고 등장한 그녀는 흑백영화의 여주인공 같았다. 리틀 블랙 드레스에 트위드 코트를 걸치고 등장한 라라 스톤이나 화이트 레이스 톱에 블랙 트위드 수트를 입은 린지 윅슨, 트위드 재킷과 스커트, 팬츠의 스리피스를 입은 프레야 베하, 회색 슬립 드레스에 체크 코트를 걸친 채 5호선 로마역에 나타난 수주 등도 마찬가지. 샤넬 아카이브에 녹아 있는 이태리 영화 속 여배우들의 흔적과 장인 정신의 만남이었다. 만추가 떠오르는 색조에 스리피스 스타일, 혹은 트위드 수트와 캐시미어 스웨터, 세련된 가죽 케이프와 속옷처럼 야들야들한 레이스 드레스, 후프 이어링과 여러 줄로 이루어진 진주 목걸이, 투톤 뮬과 카메라 모양의 백까지.

그런가 하면 대리석 프린트의 플리츠 드레스나 후반부에 등장한 울과 레이스, 깃털 장식의 드레스, 진주와 코사주 장식의 코트와 드레스 시리즈에서는 공방 장인들의 섬세한 솜씨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치게 이국적이었던 이전의 공방 컬렉션과 달리 어느 때보다 친숙하고 샤넬다웠던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이건 코코 샤넬이 로마를 사랑했고, 샤넬을 상징하는 유산의 많은 부분이 이탈리아의 문화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나라인 이탈리아가 정말 좋습니다. 저는 프랑스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살고 싶어요.” 1937년 이탈리아 신문 <라 스탐파>에 실린 코코 샤넬의 인터뷰 내용만 보더라도 그녀의 이탈리아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는지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인 보이 카펠을 떠나보낸 슬픔을 달래기 위해 친구 미시아와 함께 한 이탈리아 여행은 샤넬 하우스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코코 샤넬은 비잔틴 문화와 바로크 시대의 보석,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예술과 건축, 고대 미술 등등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떴다. 그런 뒤 로마 비아 줄리아의 아파트에 지내며 도시 구석구석을 구경하곤 했다. 또 이탈리아 출신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와 프랑코 체피렐리와의 친분을 통해 영화 의상은 물론 로미 슈나이더나 잔느 모로 같은 여배우들과도 돈독한 우정을 맺었다.

 

코코가 ‘애정한’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영화에서 샤넬을 입은 여배우들은 오늘 열린 칼 라거펠트의 공방 컬렉션을 위한 훌륭한 재료가 됐다. 일장춘몽처럼 끝나버린 쇼가 못내 아쉬울 무렵, 이벤트의 절정은 무려 한 달 반에 걸쳐 지은 파리 구시가의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가 모두 불을 밝히면서부터 시작됐다. 서정적 선율을 노래하는 가수들의 음성과 거리 악사들의 연주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손님들과 모델들은 흑백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빵집과 소시지와 치즈 가게, 굴 전문 레스토랑 및 트라토리아, 와인 가게, 아이스크림 밴에서 직접 제공하는 맛깔스러운 먹거리와 명랑한 수다로 충만한 밤!

뒤를 이어 DJ 파올로 디 놀라와 파창가 보이즈가 떠들썩한 이탤리언 축제 분위기로 몰고 갔다. “온종일 좋아하는 것만 할 거예요. 머리를 깎고, 젤라토를 먹고, 노천카페에 앉고!” <로마의 휴일>의 공주 오드리 헵번이 그랬던 것처럼 칼 라거펠트 감독이 건설한 이 도시에서 가장 럭셔리한 밤은 이렇듯 평범하면서도 유쾌한 일탈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