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를 잊게 해줄 판타지의 재림

겨울 장사의 키포인트 중 하나는 아마도 얼마나 추운 날씨를 피해 탐닉할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하느냐일 것이다. 그래서 골라본 ‘방콕’하기 좋은 책, 한기를 잊게 해줄 스펙터클한 영화. 판타지의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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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봉임에도 첫 개봉 때보다 흥행이 잘되는 <이터널 선샤인>의 장르는 무엇일까? 강풀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타이밍>은? 중국에서 6,500만 관객을 동원한 <몬스터 헌트>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은 장르를 구분하다 지친 사람들이 만들어낸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떤 창작물이든 여러 장르에 걸쳐 있기 마련이다. SF라고 부르는 작품 중 스릴러나 로맨스와 테이블 아래에서 수상쩍게 손을 잡고 다리를 부비는 작품이 어디 한둘인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필립 K. 딕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이 그렇다. 로맨스 역시 마찬가지여서, 정은궐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은 역사물이자 로맨스이고, 스테파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은 로맨스면서 뱀파이어가 주인공인 호러물의 분위기를 풍기고, 영화화되면서는 일부 액션과 서스펜스가 가미되었다.

판타지는 혼종이 있기로는 최고다. 일단 위에서 언급한 작품 중 다수가 판타지에 걸쳐 있다. 실제 인물이나 사건이 배경이라 해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는 상상이 결정적인 수레바퀴가 되기 마련이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말할 것도 없다. 게임 내러티브에서는 판타지가 전부다. <반지의 제왕>의 J.R.R. 톨킨은 “판타지는 가장 극단적인 도피문학”이라고 한 적이 있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가장 대중적인 장르다. 책 대여점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르가 판타지로, 무협물은 동양 판타지의 대표 격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블록버스터’ 영화는 판타지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도 <헝거게임> 시리즈의 막을 닫는 최종장 <헝거게임: 더 파이널>은 현실의 정치제도에 대한 상상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결말을 보여준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주로 찍었던 시리즈 전작과 달리 <헝 거게임: 더 파이널>은 파리와 베를린, 애틀랜타를 오갔다. 스노우 대통령의 대저택으로등장하는 건물은 베르사유 궁전 근처의 대저택이다. 없는 이야기를 상상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CG에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단순히 출연진이나 로케이션만 ‘진짜’는 아니다. 12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독재국가 ‘판엠’이 체제 유지를 위해 서바이벌 게임 ‘헝거게임’을 만든다. 1년에 한 번 구역마다 추첨을 통해 두 명을 선발, 총 24명이 생존을 두고 겨루게 한다. 경기는 일반인들도 중계를 통해 볼 수 있고, 우승자는 ‘스타’가 된다. 우리가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보는 경쟁 구도에 노래 대신 살인 무기를 도구로 쓰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라, <헝거게임> 시리즈는 “정치란 무엇인가? 국가 제도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중국 라맨 허 감독의 <몬스터 헌트>는 중국 영화 시장이 대작을 ‘수입’해 소비하던 시대에서 ‘자급자족’ 하는 시대로 옮겨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영화다. 물론 이 소식은 소프트웨어인 문화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제조 업종에도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중국의 영화계는 일일천리(一日千里,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라는 말이 놀랍지 않을 정도로 급성장을 보이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별계약>이나 <소시대 > 시리즈 같은 로맨틱 코미디가 잘 팔렸는데, 올해 판타지 애니메이션 <몬스터 헌트>가 역대 박스 오피스 기록을 전부 갈아치웠다. 할리우드 작품과의 경쟁이 치열한 여름에 개봉해 약 24억 위안(한화 약 4,500억원)을 벌어들이며 6,50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작품은 컴퓨터그래픽 기술에 요괴 이야기를 접목한 판타지로 한국에서는 11월 12일에 개봉했다. 채소 무처럼 생긴 아기 요괴 우바가 주인공이다. 전체 관람가 등급으로, 요괴끼리의 전쟁이라는 볼거리와 귀여운 우바의 매력이 압도한다.

소설 중에선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기> 시리즈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연을 하자면, 판타지물에는 유독 시리즈가 많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나 < 왕좌의 게임> 시리즈를 떠올리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텐데, 하나의 세계(관)를 만들어내는 경우 그 세계관에 속하는 다양한 이야기가 몇 권씩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 출간된 <도남의 날개>는 시리즈 여섯번째 이야기이며, 오래 비어 있던 왕좌 때문에 피폐해진 나라를 위해 봉산에 오르는 열두 살 소녀 슈쇼가 주인공이다. 어린 소녀가 왕이 되기까지의 모험담인 셈이다. <십이국기> 시리즈는 일본에서 1992년 처음 출간된 뒤 총 900만 부가 판매되었는데 오노 후유미의 판타지 직조술이라는 것은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다. 이 시리즈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시귀> 시리즈도 읽어보길 강력하게 추천한다.

판타지와 로맨스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을 ‘패러노멀 로맨스’인 G.A. 에이켄의 <드래곤 의 위험한 관계>라는 작품도 있다. 드래곤 킨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데 드래곤 일족과 인간 여성의 애증이 소재가 된다. 드래곤이라는 말로 떠올리는 것이 조선왕조의 임금 곤룡포에 수놓여 있던 용 그림이 전부라면 이게 무슨 패륜이냐 싶을지도 모르지만, 용 일족은 판타지에서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신하는 일이 꽤 많다는 점을 슬쩍 덧붙이겠다.

올겨울 판타지 장르 최고의 ‘두근두근’을 꼽으라면, 역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런던 카나비 스트리트의 한 숍에서는 다스 베이더가 금실로 수놓인 블랙 로퍼와 왼쪽에 한 솔로, 오른쪽에 레아 공주가 프린트된 신발을 팔고 있었다. 도쿄 로프트 매장에는 이미 올봄부터 <스타워즈> 굿즈 특별 판매 코너가 있었다. 에든버러에서는 ‘1977년 입학생(Class of 1977)’이라는 제목 아래 최초의 <스타워즈> 캐릭터들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이들을 상상의 산물이자 환상의 피조물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판타지는 굳이 ‘머나먼 은하계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 앞사람이 우산을 들어 보였는데 그 사람이 강동원이더라는 <늑대의 유혹>이 그렇고, 여자가 다이어트를 했더니 신민아가 되더라는 드라마 <오 마이 비너스>가 그렇고, 12월 10일 개봉한 영화는 제목부터가 벌써 판타지다. 그 영화 제목은 <런던시계탑 밑에서 사랑을 찾을 확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