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로 떠난 일군의 작가들

일군의 작가들이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단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바틱’이라는 전통 수공예를 배우겠다고 나섰다. 사진가 노순택이 그 기묘한 순간들을 담았다.

노순택_플레이그라운드2015_바틱56

한겨울 말레이시아는 하루에도 수차례 비가 내린다. 흙탕물이 된 파다스 강을 따라 내려간 보트는 원시성을 간직한 맹그로브 숲 속으로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코타키나발루에서 100여 킬로 미터 떨어진 북부 보르네오 섬, 강과 바다가 만나는 밀림에선 바틱(Batik)의 주재료가 되는 맹그로브 뿌리를 구할 수 있다. 수공으로 천에 염색하는 기법 중 하나인 바틱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만날 수 있는 전통문화다. 이곳 말레이시아 사바 주 원주민 청년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일군의 국내 작가들이 연례행사처럼 겨울마다 코나키나발루를 찾기 시작한 건 2010년부터다. ‘미디어시티 서울’의 전시 팀장이었던 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 큐레이터는 처음엔 동남아를 무대로 한 글로벌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을 구상했다. ‘디지털 플레이그라운드’가 그 출발점이었다. 사바 대학(University College Sabah Foundation-UCSF)의 애니메이션 센터(Sabah Animation Creative Content Centre-SAC3) 학생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하며 현대미술의 어법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느낀 그녀는 이듬해 최정화 작가와 함께 다시 말레이시아를 찾았다. 기술학교 학생들은 예술을 놀이처럼 접하며 일상을 재조명하는 과정에 흥미를 보였다. “기존 미디어 아트에 대해 회의를 느낄 무렵이었어요. 여기엔 이미 이토록 아름다운 석양이 있는데 반짝이는 LED 작업을 소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더군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했어요.”

인도네시아 전통 수공예로 알려진 바틱은 최첨단 문물을 이용한 미디어 아트와는 정반대 지점에 놓인 일상의 예술이다. SAC3의 디렉터 마리나로부터 대학의 신생 부설 기관 바틱 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신보슬 큐레이터는 다시 한 번 긴 여행의 짐을 꾸렸다. “마침 사회적 기업에 대한 붐이 일고 있었어요. 어쩌면 이 지역 청년들이 주축이 돼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시 외에 미술이 실질적으로 사회에서 작동하는 걸 해보고 싶었어요.”

플레이그라운드 프로젝트의 원년 멤버인 사진가 노순택이 기꺼이 동행했다. 여담이지만 2013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후보 작가전에서 소개된 노순택의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 역시 이곳에서 영감을 얻은 작업이다.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진 후 한겨울의 섬에 갇혀 전투식량을 먹으며 지내다 순간 이동하듯 공간을 옮겨온 작가는 기이할 정도로 평화롭고 따뜻한 이곳과 마침 인터넷에서 논란이 된 안상수 대표의 보온병 사건이 맞물리는 이질적 상황 속에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연평도 를 찾아 안상수의 정치 역정을 역추적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작가 서효정과 ‘스페이스 오뉴월’의 서준호 대표, 영상과 퍼포먼스, 설치 작업을 오가며 개인의 소소한 행적을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화두를 던져온 최윤석 작가 역시 흔쾌히 따라나섰다. 바틱을 현대적 디자인으로 재해석하기 위해 패턴 디자이너 김지연과 일러스트레이터 윤예지가 추가로 합류했다. 미술관 밖에서 각종 흥미로운 아트 프로젝트를 기획해온 <엘로퀀스> 매거진의 전우치 편집장과 그의 동생 전지호 셰프는 바틱의 재료를 이용한 이색 카페를 구상해보기로 했다.

‘플레이그라운드 인 아일랜드(Playground in Island) 2015’ 팀은 5박 7일간의 짧은 시간 동안 사바 원주민 학생들과 어울리며 각자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만들어갔다.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한 첫날부터 바틱 센터의 마당에 핀 꽃과 나무를 보고 만지고 또 직접 먹어도 보며 천연 바틱의 재료에 대한 공부가 시작됐다. 이튿날엔 본격적인 바틱 체험에 들어갔다. 뜨거운 밀랍을 연필 삼아 천에 선을 그린 후, 수차례 염료에 담갔다가 말리기를 반복하며 그림을 덧칠해가는 방식으로 완성되는 바틱은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다. 벌집에서 채취한 밀랍을 녹여 인도네시아어로 ‘짠띵(Canting)’이라 불리는 주입기에 담아 천 위로 조금씩 떨어뜨려야 하는데, 70℃를 넘으면 지나치게 많이 흘러내리고 그보다 낮으면 굳어버려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오로지 손의 감각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틀을 쓰기도 어렵다. 이 밀랍을 입힌 부분은 염료가 물들지 않아, 염색을 반복하는 동안 선의 농도를 맞출 수 있다.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온 식물의 줄기와 잎사귀 등이 그림의 주를 이루지만, 다른 무늬를 새겨 넣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기계와 화학 염료를 쓸 수 있지만, 최소 일주일 이상 정성을 들여야 하는 천연 바틱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는 화학 염료와 달리 친환경적인 천연 바틱은 적도의 태양을 먹고 자란 식물을 말리고 빻아 그 싱싱한 색감을 천에 물들인다. 재료는 지천에 널려 있다. 동남아 최고봉인 전설의 키나발루 산 중턱엔 4,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탄중아루 해변에선 초록색을 내는 데 쓰이는 크타팡 나무 잎사귀를 구할 수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조차 아무렇지 않게 빅사 열매가 열린다. 이 붉은색 열매는 립스틱의 원료로도 사용돼 립스틱 나무로도 불린다. 달콤한 열대 과일 잭프루트 나무의 뿌리는 물론 망고스틴의 껍질과 담청색 꽃이 피는 나비콩, 강황, 우리에게 익숙한 쪽 역시 바틱의 재료다.

1세대 뉴미디어 아트 작가로 SADI 교수이기도 한 서효정은 바틱의 이 재료를 미디어로 소개하는 방법을 이번 프로젝트와 연결 지었다. 사물의 목소리와 시선을 담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업 ‘사물의 기억 박물관’ 시리즈를 지속해온 작가는 3년 전 처음 참여한 워크숍에서 학생들에게 주변 사물에 작은 카메라를 부착해 이 물건들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오라고 과제를 내줬다. 이같은 인터랙티브 미디어 경험은 학생들이 코타키나발루의 환경과 사람들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에 그는 학생들과 함께 각각의 바틱 재료 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관련 영상이 모니터를 통해 흘러나오게끔 만드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RFID라고 하는 태그를 재료에 심어놓았어요. 쉽게 말하자면 슈퍼마켓 바코드와 유사한데, 아날로그 방식 대신 영상을 통해 관람객이 직접 자신이 필요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든 시스템이죠. 조도 재미있게 짜였어요. 컴퓨터 경험이 전혀 없는 바틱 공방 학생과 애니메이션 센터 학생들이 한 팀이 돼 콜라보레이션하고 있죠.” 이렇게 만들어진 기본 시스템을 활용해 내용을 추가하고 발전시키는 건 학생들의 몫이다. 서효정은 바틱의 재료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각 패턴이 지닌 의미를 추적하는 인터랙티브 영상을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노순택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사진으로 담았다. 재료 채집 현장과 바틱 제작 과정은 물론 작가들과 학생들이 뭔가를 만들고 휴식하는 매 순간을 본인만의 사진 언어로 기록해나갔다. “사람들이 사진 속 물건에 매력을 느끼고 지갑을 열게 하는 커머셜한 작업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요. 다만 이 친구들이 바틱으로 뭔가를 만들고 있으니까 이것으로 어떤 확장이 가능할까에 대해 고민할 수는 있죠. 이 물건 자체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더 확장시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향후에 작가들이 협업 제품을 만들거나 패션쇼를 한다면 흥미롭게 그 과정을 지켜보고 사진으로 찍을 수도 있겠죠. 조금은 엉뚱함이 개입됐다는 것이 전제되어 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할 테고요. 아직은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저도 모르겠어요.” 한국 사회의 폐부를 풍자와 은유로 풀어내며 2014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그는 당시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긴 바 있다. “사진은 세상의 털이고, 몸통이 아닙니다. 저는 털을 보여드릴 테니 그 털이 어떤 몸에서 비롯된 것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털에서 거울을 볼 수 있도록, 털로 된 거울을 만들고자 합니다.” 아직은 몸통의 전체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물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패턴 디자이너 김지연은 현지 박물관과 천 시장을 돌아다니며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학생들과 함께 종일 재봉틀을 돌렸다. 일러스트레이터 윤예지는 틈날 때마다 이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제일 바쁜 건 영상 감독을 자처한 최윤석 작가였다. 그는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의 인터뷰 영상을 따고 모든 현장을 쫓아다녔다. 전지호 셰프는 몇몇 학생들과 재래시장을 찾았다. “바틱의 재료를 바탕으로 한 음식을 만들려고해요.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어야 하죠. 닭 가슴살에 강황과 여러 가지 허브를 넣어 마리네이드한 걸 팬에 구운 샌드위치는 어떨까요? 망고 샐러드나 토티아에 망고 살사를 얹어 말아 먹어도 좋을 것 같아요. 망고스틴 스무디나 음료도 가능하고요.” 동갑내기 프랑스인 셰프와 함께 샤르퀴트리를 전문으로 하는 연남동 프랑스식 선술집 ‘랑빠스81’의 문을 연 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바틱 카페의 메뉴를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중식의 대가 이연복 셰프가 합류한 건축가들의 포장마차 프로젝트 등 요리와 예술을 접목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해온 그는 한국에 돌아온 후, 바틱 레시피에 관한 연구를 좀더 진행시킬 계획이다. 다행히 그가 공개한 모든 메뉴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떻게 보면 작가들이 여기 와서 마냥 학생들과 어울려 놀다 가는 것 같지만 이런 경험은 중요해요. 그저 직업훈련으로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기능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바꾼다거나 이렇게 재미있는 걸 해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미디어 작가 최태윤이 <기술이 실패할 때 현실이 드러난다>라는 전시를 한 적이 있는데, 저 역시 이 말에 동의해요. 오히려 그럴 때 진짜 재미있는 게 생겨나기도 하고, 원래 쓰인 기술을 예술가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상하게 해석하는 지점에서 좋은 작업이 탄생하기도 하죠.” 서효정 작가의 말처럼 이곳엔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이 있다. 토탈미술관의 신보슬 큐레이터는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책자로 묶어 발표하고 온라인으로 영상을 공유할 예정이다. 물론 여기엔 사라져가는 것을 보호한다는 인류애적 당위성도 있을 것이다. 천연 바틱 전수를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온 바틱 전문가 스리 콜리파는 환경과 바틱의 연관 관계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망고를 먹기 위해서는 망고 나무를 심어야 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는 근대화 과정에서 불에 타 없어진 맹그로브 숲을 다시 살리기 위해 최근 보호구역이 정해졌지만 아직까지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고 했다. 맹그로브 늪지대엔 악어와 반딧불이, 희귀종인 긴 코 원숭이 등 다양한 생명체도 살고 있다. 잊혀가는 건 맹그로브 숲뿐만이 아니다. 천연 바틱 같은 전통 수공예나 원주민들의 토착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마지막 날,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돌며 바라본 맹그로브 밀림은 무서울 정도로 생명력이 넘쳤다. 사람 키보다 높이 솟아난 뿌리들은 얽히고설킨 채 맹렬하게 늪 사이로 뻗어나갔다. 그중엔 씨앗 대신 주아라고 불리는 작은 나무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번식하는 종도 있었는데, 적절한 크기로 자란 주아는 원가지에서 떨어진 채 자체적으로 광합성을 하며 긴 시간 물 위를 떠다니다 적절한 환경을 만났을 때 스스로 뿌리를 내린다고 했다. 식물의 한계를 넘는 그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사바 주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사바 주엔 지금도 34개 부족이 살고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대부분의 학생들은 가난하다. 그래서 배움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꾼다. 원주민 청년들이 바틱을 통해 생활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플레이그라운드 인 아일랜드’의 최종 목적은 경제적인 지원이 아니다. 다국적 예술가들이 모여 전통 수공예와 현대미술을 접목해 가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다. 아직은 막연한 기대에 불과하나,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