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의 이준익 감독

이준익 감독의 차기작은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다룬 저예산 흑백영화 〈동주〉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라는 한 분야에 빠져 정상을 밟은 날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든다.

스트라이프 수트는 미하라 야스히로(Mihara Yasuhiro at Mue), 티셔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at Boon the Shop), 스카프는 인스턴트펑크(Instant Funk), 슈즈는 톰 브라운(Thom Browne), 윤동주 유고 시집 는 소와다리 출판사.

스트라이프 수트는 미하라 야스히로(Mihara Yasuhiro at Mue), 티셔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at Boon the Shop), 스카프는 인스턴트펑크(Instant Funk), 슈즈는 톰 브라운(Thom Browne),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소와다리 출판사.

유아인이 영화 <동주>의 윤동주 역할을 탐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유아인은 이준익 감독에게 “동주 제가 하면 안 돼요?”라고 물었고 이준익 감독은 “안 된다”고 답했다.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 <사도>에서 맞춘 완벽한 합, 청춘의 풍경이 담긴 얼굴,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준익 감독은 상업적으로 너무 유리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동주 시인을 ‘대세 배우’ 유아인에 입혀가는 건, 윤동주 시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동주> 제작비는 5억원이다. 투자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적은 예산으로 가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선례를 남기고자 함이다. 윤동주의 삶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600만 관객 흥행을 기록하고 시상식에서 각종 상을 휩쓸었던 전작 <사도>가 그를 바꿔놓은 건 없었다.

<평양성>이후 최근 5년 사이 그는 조금 변했다. 작품 제목은 두 글자로 추려졌고 집중하는 대상은 더 명확해졌다. 그 대상은 제목이 말하는 바대로 ‘사람’이다. 할리우드 키드로 자라 그 허상을 경험한 뒤 자신의 DNA를 형성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던 그의 행보는 사극보다 더 근본적인 ‘사람’에 멈춰 섰다. <소원> <사도> <동주> 세 편의 영화 소재는 모두 익숙하다. 더 새로울 게 없는 사건에 무슨 할 말이 더 있을지 사람들은 의심했다. 하지만 <소원>에서는 ‘아동 성폭력 사건’보다 소원이의 고통이 전해졌고, <사도>에서는 ‘임오화변’ 대신 아버지와 아들이 보였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라는 한 분야에 빠져 온갖 흥망성쇠와 부침을 겪은 시대의 기록자 이준익 감독은 인간의 삶이 곧 드라마임을 다시 전하려고 한다.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시를 쓰는 마음으로 이준익 감독은 영화를 만든다.

 

2011년에 어느 다큐를 보고 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윤동주의 삶을 영화화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뭔가.
윤동주의 시를 추모하는 내용의 다큐였다. 2012년에 교토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다닌 도시샤 대학에 시비를 보려고 들렀다. 축제 기간이었는데 시비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없었다. 그때 결심했다. 비석은 하나의 사물일 뿐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영화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실행에 옮기기까지 망설임도 많았을 것 같다.
한 인물을 좇는 전기 영화는 상업적으로 불리한 장르다. 하지만 상업을 벗어나서는 대중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윤동주 시인을 영화화했을 때 대중에게 외면받거나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하면 앞으로 이런 종류의 영화가 나오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는다는 기준을 세웠다. 신연식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저예산 전문 감독이니까. 1억5,000만원에 써볼 수 있겠느냐 했더니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중간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해서 3억원으로 올렸고 준비하면서 제작비가 5억원으로 늘어났다.

제작비 100억원도 놀랍지 않은 세상이다. 5억원으로 찍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
영화의 볼거리가 스펙터클한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윤동주 시인의 이미지는 흑백사진 속에 있었기에 흑백으로 가기로 했다. 배경은 해외가 많지만 모두 국내에서 찍었다. 연전은 연세대학교를 부분적으로 활용했고, 교토는 경남 합천 세트장에서, 도쿄는 소록도에서, 후쿠오카 감옥은 세트를 만들어서 찍었다. 영화를 보면 여기저기 많이 다니는데 실제로 찍은 장소는 몇 곳 안 된다.

아트나인의 요청으로 <화장>을 흑백으로 특별 상영한 경우를 제외하고 최근 흑백 상업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동주>에서 흑백 화면이 더 부각시키는 정서는 뭘까.
일제강점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암울하던 시기다. 어찌해보고 싶으나 어찌할 수 없었던 시대는 화려한 컬러보다 암울한 흑백이 더 진실성 있어 보인다고 판단했다. 포장이나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이야기의 진성성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한 선택이다.

그동안 윤동주의 삶이 영화화되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인의 삶의 궤적은 영화적이지 않다. 김원봉이나 의열단처럼 몸으로 움직이는 독립운동가는 총을 쏘고 폭파하고 쫓기니 영화적이다. 윤동주는 마음은 그랬을지 모르지만 시라는 문학을 통해 내면을 고백한 사람이다. 영화로 표현하기엔 정적이기에 70년 동안 영화화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윤동주 자료를 보며 송몽규라는 인물과 동고동락하는 과정에 굉장히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 석 달 차이로 태어나 한 달 차이로 죽었으니 같이 태어나 같이 죽은 것이다. 식물적 관념주의자 윤동주와 동물적 행동주의자 송몽규, 둘의 이야기라면 드라마가 만들어지겠다 싶었다.

송몽규는 덜 알려져 있지만 행동하는 사상가라는 점에서 대중이 더 원하는 인물상으로 보인다. 상대적으로 윤동주가 약점을 안고 있는 게 아닐까.
송몽규는 과정은 아름다우나 결과가 없는 사람이다. 반면 윤동주는 과정은 내세울 게 별로 없지만 결과가 아름다운 인물이다. 머뭇거리고 주춤거렸지만 결국 세상에 남아 있는 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다. 윤동주는 시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고 우리는 윤동주만 기억한다. <동주>라는 영화는 송몽규의 과정과 윤동주의 결과다.

디테일에 대한 취재가 많았을 거 같다. 실제 사실 외에 비어 있는 이야기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채워나갔을까.
윤동주 평전 같은 관련 기록을 충분히 검토했다. 하지만 평전만으로는 드라마가 되지 않는다. 영화는 기록된 사실 사이에 어떤 추론을 통해 진실에 도달하려는 허구를 끼워 넣는다. 시대를 막론하고 그 시절에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 있다. 20대라면 세상과 관계 맺기에서 오는 정체성 갈등, 그 과정에서 누군가 만났을 때 일렁이는 감정 등이 있을 것이다. 그 감정은 첫사랑일 수도, 우정일 수도,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진실은 사실과 허구 사이 어딘가에 있다. 작가는 그 진실을 시나리오에 반영하려고 노력했고 감독과 배우는 그것에 완전히 몰입해 찍었기에 영화를 보면 그럴듯할 것이다.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진 내용으로 뭐가 있나.
예를 들어, 윤동주의 기록에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없다. 하지만 윤동주의 시를 보면 ‘별 하나에 사랑’이라는 시구가 있다. ‘그 여자’라는 시도 있다.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굴까. 그 순간 사랑에 대한 긴장은 당연히 있지 않았을까. 그런 뉘앙스를 담은 장면을 만들었다. 누구나 그 나이에 느낄 만한 심리와 감정이다. 그러니 일종의 날조는 아니다.(웃음)

송몽규가 등장하면서 그들이 청춘이라는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음이 부각됐을 것 같다. 당신에게 청춘은 어떤 이미지인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어설픈 부정교합. 어설픔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어설픔이 주는 부끄러움이 더 크다. 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윤동주는 부끄러움의 미학을 끊임없이 시로 고백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청춘에게 세상은 불만의 대상일 뿐이다. 청춘이 사회로 나왔을 때 세상은 자기들 것이 아니니까.

강하늘, 박정민에 대한 기대가 생기는 영화다. 어떻게 캐스팅하게 됐나. 강하늘과는 <평양성>을 함께 찍었다.
강하늘은 내가 데뷔시켰다. 스물한 살쯤이었다. <동주> 캐스팅은 황정민이 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는데 “감독님, 윤동주는 강하늘로 하시고 송몽규는 박정민으로 하시죠” 하기에 “알았어” 했다. 박정민은 내심 눈여겨보고 있던 배우다. 언젠가 이 배우를 좋게 쓸 날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황정민이 박정민을 얘기했다. 뭐지? ‘그분’이 황정민에게 왔나? 하며 캐스팅했다.

외모도 꽤 닮았다.
그렇다. 강하늘은 한국인의 전형적인 고전적 틀을 지녔다. 선이 굵으면서도 곱다. 나름 현대적 세련미도 있다. 윤동주 시인이 미남형이지 않나. 송몽규도 박정민과 많이 닮았다. 인간은 내면과 외면이 불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모 안에 내면이 담기게 돼 있다. 그런 면에서 둘 다 상당히 유사하다.

디렉션를 주기보다 배우 믿고 가는 스타일이다. 이번엔 배우들과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었나.
배우들이 다 만들어와서 그대로 찍었다. 캐릭터라는 건 대사에 다 반영돼 있고 그 대사를 읽는 순간 캐릭터가 형성된다. 그래서 감독은 디테일하게 간섭할 필요가 없다. 배우가 그 대사를 얼마나 많이 고민하면서 왔겠나.

그렇다면 배우의 캐릭터 해석에 감탄한 부분이 있나.
윤동주 시인을 표현하기 위한 강하늘의 태도가 그랬다. 가슴은 뜨거우나 그 뜨거움을 들키지 않으려는 일종의 신중함과 소심함을 보이스 톤으로 표현해냈다. 송몽규라는 존재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의식을 조신하게 표현하는데 디렉션 줄 게 없었다. 나는 그냥 오케이였다. 오케이 오케이 오~케~오~케~오키나와! 딱 그거였다.(웃음)

<사도>에서는 인물의 심리 자체를 파고든 연출이 돋보였다. <동주>에서도 그런가.
모든 심리는 관계에서 나온다. <동주>는 윤동주와 송몽규 관계의 심리를 담았다. 관계의 정교한 전개를 표현하다 보면 그 안에서 배우들이 구현하게 돼 있다. 관객들은 그 심리를 천천히 따라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인물의 마음이 와 닿는다.

촬영하면서 눈물이 난 적은 없었나.
송몽규 아버지가 화장한 유해를 들고 나오다가 돌부리에 걸렸는지 발이 꼬였는지 송몽규의 유해가 땅바닥에 쏟아져 주워 담는 장면에서 눈물이 많이 났다. 나뿐 아니라 스태프들이 다 울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편집에서 뺐다. 감정의 강요가 될까 봐 뺀 건가. 상황이 주는 안타까움과 절박함이 넘치기에 굳이 그런 장면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이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감정의 절제에 신경을 썼다.

재킷은 언어펙티드(Unaffected at Sortie Seoul), 니트는 볼리올리(Boglioli).

재킷은 언어펙티드(Unaffected at Sortie Seoul), 니트는 볼리올리(Boglioli).

극 중에서 시는 어떻게 표현되는지 궁금하다.
열세 편의 시가 나온다. 실제로 그 시가 어떤 상황에서 쓰였을지 고민을 거듭해 최대한 매칭했다. 드라마의 개연성 안에서 적절히 등장하기에 시가 곧 드라마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시와 드라마가 분리돼 있지 않다. ‘별 헤는 밤’이 나오는 장면에서 연전 기숙사로 가는 길의 투샷은 기억에 남는 서정적 장면이다. 하늘에서 별이 흐른다.

평소 윤동주 시인의 시를 좋아했나.
윤동주의 시는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 윤동주 시의 고백은 다 반성이다. 반성의 미학이다.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 다들 부끄러워진다.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없이 20대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반성까지 할 순 없다. 윤동주 시가 70년이 넘게 사랑받는 건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윤동주 시인이 먼저 부끄러워해준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이 시대에 여전히 시가 존재해야 한다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시는 고백이다. 시는 간단하게 서술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간단하게 나오진 않는다. 수많은 시간이 누적되고 정제된 결과다. 오히려 그럴수록 쉽게 쓰이는 시가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 윤동주가 20대 중반에 그토록 아름다운 시를 쓴 건 자신에게 솔직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는 시와 비슷하다. 시나리오는 소설의 내러티브를 갖고 있지만 사실 영화를 찍는 순간은 공기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촌스럽고 못나도 사람들은 솔직한 영화에 마음을 준다.

다음 작품으로 정약용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 중이라고 들었다.
두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

이번에도 인물에 대해 접근하나.
그렇다. 젊을 때는 다른 사람의 삶을 깊이 있게 보는 눈이 부족하다. 자기 자신을 쳐다보고 사느라고. 나이를 먹다 보니 나보다 더 절실하게 살았던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커진다.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점점 더 인물에 관심이 간다.

인물 탐구는 계속할 예정인가.
그럴 거같다. 사건은 인물이 만드는 것이고, 인물을 통해 사건이 보인다. 사건을 통해 인물이 보이는 건 젊을 때 얘기같다. 지금은 인물을 통해 사건을 보는 데 관심이 더 많다.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다”는 말이 있다. 한 인물을 통해 한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 영화라는 게 결국 사람을 그리는 거지, 개돼지를 그리는 게 아니다.

촬영하지 않을 땐 어떻게 지내나.
하는거 없다. 사무실에 앉아 노닥거린다. 자거나 쉬거나 아무것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유지하는 게 얼마나 높은 경지인데. 초조와 불안에서 자유롭기란 정말 어렵다.

대체 언제쯤 자유로워지나.
50대 중반. 어찌할 수 없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된 나이다. 그전에는 어찌할 수 없는 건데 어찌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여전히 신문, 뉴스, 텔레비전을 안 보나.
안 본다. 보다 보면 숨어 있는 욕망이 나온다. ‘나도 이렇게 하면 될까?’ 착각에 빠지게 된다. 안 보면 그런 욕망이 안 생긴다. 그래서 그냥 하늘 보고 풀 보고 길 보고 시간 본다. <소원> 때부터인 듯하다. 은퇴 이후에.(웃음)

1993년 <키드 캅>이 데뷔작이다. 세월을 실감하나.
‘세월이 빨리 가네’ ‘시간이 늦게 가네’를 동시에 느낀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다 잊어버렸다.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투성이라 살 수가 없다. 짐 자무쉬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에 “멀리 온 거 같은데 왜 난 제자리지?”라는 대사를 잊을 수가 없다. 20여 년 동안 멀리 온 거 같은데 왜 제자리일까. 시간이 흐른 것일 뿐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 그래서 시간을 즐겨야 한다.

개인적으로 <동주> 때문에 윤동주 삶을 다룬 소설을 찾아 읽었고, <사도>를 보고 사도세자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이 시대에 영화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영화가 주는 선물은 정말 위대하다. 난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너무 안 했다. 고등학교 때 50 몇 등했으니 꼴등 했단 얘기다. 그런데도 지식산업인 영화를 할 수 있었던 건, 영화를 많이 봐서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웠고 영화를 통해 지식을 얻었다. 우리가 어떻게 프랑스를 알고 미국을 알고 일본, 중국을 알까. 영화를 봐서 아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봤다. 영화는 인간에게 정말 큰 선물이다.

<동주>를 통해 관객들은 뭘 보길 바라나.
의미는 관객이 부여하는 것이지 감독이 주장하는 게 아니다. <사도>나 <소원>처럼 그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 있는 반면, 그 영화를 아쉬워하는 관객도 있기 마련이다. <동주>도 그렇게 자리매김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