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DISE

영원한 소녀 바네사 파라디는 늘 섹시하고 멋지다. 허스키한 음색의 10대 여가수에서 모델, 배우, 패션 아이콘으로 변신을 거듭해온 그녀의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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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네사 파라디(Vanessa Paradis)는 파리 중심부에 자리한 아파트에서 지낸다. 그녀 같은 스타에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리넨 바지와 낡은 스웨터 속에 작지만 탄탄한 몸을 감추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밤색 스웨이드 부츠를 신은 채, 금발을 헝클어뜨린 그녀는 한 손으로 커피 잔을 들고 부엌 탁자에 놓인 담배를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감쌌다. 30년간 프랑스 팝 문화 최상층에 머물고 있는 파라디는 여전히 아이 같고 그녀만의 중력을 지녔다. 데뷔곡 ‘Joe Le Taxi’의 대성공으로 대중의 눈앞에 선 소녀는 녹색과 밤색이 묘하게 섞인 눈동자를 반짝였고, 장미 가시 같은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땅을 부수듯 성장했다. 랑골프, 갱스부르, 크라비츠 같은 뮤지션이 선사한 여러 히트곡도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기타 ‘마틴’을 활용해 스스로 작곡했고 다들 그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됐다. 또 영화에 출연하면서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엄청난 성공도 누렸다. 이런 성공은 사생활의 과다 노출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사생활을 철저히 감춰왔다. 친구들은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연약함과 강렬함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언급한다. 따뜻하지만 오래 담배를 피운 듯한 음색의 파라디는 그동안 인터넷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바로 그녀가 베일을 벗었다. 여기에 그녀의 진실되고, 즉각적이며, 놀라운 이야기를 담았다. 영원한 소녀의 고백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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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체구에 탄탄한 몸매를 지닌 바네사. 비스코스 소재의 비대칭 니트 드레스는 샤넬(Chanel).

사람들이 바네사 파라디 하면 맨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 그보다 사운드를 생각한다면 그건 아마 목소리일 것이다. 잔 모로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떠오르는 것처럼 당신의 목소리도 독특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좋아하나?
평생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하는 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내 목소리를 특별하다고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처음 작업할 때, 내 목소리가 너무 날카롭다고 여겼다. 묵직한 보디감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내 목소리를 싫어한 적은 없다. 가수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내 목소리를 점차 좋아하게 된 셈이다. 한 가지 또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내가 흡연자라는 점이다. 물론 담배를 안 피울 수도 있지만, 흡연하는 건 사실이고 담배가 목소리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두 차례 투어하는 동안 금연한 적이 있는데 그 효과가 엄청났다. 목소리가 열 배는 더 쉽게 나오고 힘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열 배 더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청중이 내 노래를 듣고 감동받았다고 말했을 때 비로소 내 목소리에 대해 편안해질 수 있었다. 마티유 체디드(Matthieu Chedid)와는 앨범에서 처음으로 함께 작업했다. 마티유는 같이 있으면 즐거워지는 너그러움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음악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료 아티스트이자 친구로서 늘 용기를 줬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함께 작업하는 동안 내게 많은 말을 걸어줬다. 또 싱어송라이터로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떨쳐버리고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시도할 수 있게 격려해줬다. 마이크 앞에 섰을 때 내 목소리와 퍼포먼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도 마티유 덕분이다. 그가 곁에서 ‘내려놓기(let go)’를 가르쳐준 셈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랑해(I love you)’라는 말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하지만 그 표현에 담긴 의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한 단어로 평가한다면?
한 단어? 세 단어를 대라고 해도 못할 것 같다. 내 목소리는 부드럽지 않나? 당신이라면 어떤 단어를 고르겠나?

‘섹시하다’.
하지만 그건 내 목소리를 떠올릴 때 드는 느낌이 아니다.

목소리와 더불어 당신의 특별한 점은 미소다.
어릴 때 놀림을 많이 받아서 내 미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놀림을 당했다고 아예 웃기를 포기했던 건 아니다. 부모님이 마음만 먹었다면 교정을 통해 치열을 바로잡을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론 그대로 두셔서 다행으로 여긴다. 내 미소가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줬으니까. 물론 모두에게 어필하는 미소가 아니라는 건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저걸 그냥 내버려두지?’라고 생각할 테니까. 이 점을 제외하곤 어릴 때부터 “넌 행복의 치아를 가졌구나!(프랑스에서는 치아에 틈이 있는 사람을 ‘행복의 치아(Teeth of Happiness)’를 지녔다고 한다)”라고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그 단어가 무척 예쁘게 들렸다. 그래서 정말 멋진 일이 많이 찾아온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언제였나?
‘Joe Le Taxi’라는 곡이 나온 때부터 아닐까. 더 놀라운 점은 인기가 계속 유지됐다는 사실이다. 1987년 4월 27일에 발매된 걸로 기억하는데, 그해 7월 중순에는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당시 부모님과 여동생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톱 50위권에 드는 가수가 돼 있었고 사람들이 해변에서 나를 알아보고 힐끔힐끔 쳐다봤다. 인기를 얻으면서 당시 슈퍼스타들과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했고 스타들이 머무는 대기실을 드나들며 대화를 나눴다. 여러 차트에서 선두를 달리던 곡을 홍보하기 위해 여행도 많이 다녔다. 특히 그해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러 도시를 방문할 수 있었다.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고작 열네 살에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 셈이다. 빠른 시간 동안 엄청난 성공과 유명세가 찾아왔고, 그 이면에 감춰진 어두운 사실도 함께 알게 됐다. 같은 해 9월, 파리 외곽의 퐁트네수부아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아는 친구라곤 발레리 하나뿐이었다. 매일 아침 러시아워에 RER을 타고 있노라면 내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껴야했다. 내 얼굴은 너무 잘 알려져 있었고, 내 목소리는 방송마다 지겨울 만큼 나왔으니까. 그리고 청소년의 세계란 아시다시피 폭력적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거칠지 않나? 정말 지독한 시기였다.(웃음) 길에서 침을 뱉고 머리를 잡아당기고 욕설을 퍼붓고, 또 우리 집 담장에 ‘창녀’ ‘나쁜 년’ 같은 심한 말을 적어놓기도 했다. 열네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그러니까 영화 <하얀 면사포>가 나올 때까지 괴롭힘은 정말 가혹했다. 지금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때의 어려움은 이겨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시 그런 시련을 겪어야만 한다면 주저 없이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다.

로미 슈나이더의 초기 인터뷰를 보면 “성공은 현실이고 찰나적이다. 영광은 바람 같으며 전설이다”고 말한 적 있다.
성공이란 건 특정한 순간이고 실질적이다. 그 후는 예측할 수 없다. 한 번 성공을 거둔 뒤라도 그다음에도 가차 없이 제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영광이라는 개념은 불분명하고 모호하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아는 것, 상상하는 것, 묘사하는 것, 환상을 품는 것부터 기인한다. ‘허상의 태양’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의 데뷔는 브리짓 바르도와 자주 비교됐다. <롤링 스톤> 표지를 처음 장식했을 때, ‘그리고 신은 바네사를 창조했다’라는 커버 라인이 들어갈 정도였다. 이런 비교를 칭찬이라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점이 누락돼 있다. 객관적으로 난 바르도 같은 몸매를 지니지 않았다. 물론 그녀처럼 금발에 어린 나이에 성공을 거뒀고 카메라 앞에서 당당하다. 대중 앞에서도 열정적이고 폭발적인 면을 지녔다는 점에서 우리를 비교하는 듯 하다. 브리짓은 나보다 열 배는 더 심했다. 정말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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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시절부터 샤넬과 함께해온 그녀는 여전히 샤넬 하우스를 대표하는 얼굴로 활동하고 있다. 화이트 트위드 재킷은 샤넬(Chanel).

당신은 프랑스에서 여전히 유명한 스타다. 타블로이드 1면을 자주 장식하곤 하는데, 유명세 속에서 어떻게 지내나?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데뷔 시절보다 훨씬 낫지만, 사실 지금도 좀 묘한 기분이 든다. 물론 스크린에 등장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런데 거리에서는 좀 다르다. 사실 대중이 스크린이나 콘서트, 잡지에서만 접하던 사람을 거리에서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사인이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대로 유명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리고 그 요구에 응해줄 수 없는 순간도 있다. 사람들의 요청을 매번 들어주긴 힘들다. 가게가 늘 열려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문을 닫는 시간도 있다. 아티스트도 마찬가지다. 가끔 커튼을 쳐서 내부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비평에 민감한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예전에는 나에 대한 모든 말에 감명받았고 또 반대로 상처받았다. 칭찬을 접하면 당연히 기쁘지만 가혹했던 몇몇 비판은 파괴적이었다. 다행인 건, 내게는 내 작업이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중요했다. 가장 도움이 된 조언 중 하나는 ‘좋든 나쁘든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였다.

누구의 조언이었나?
조니. 100% 동감한다.

당신의 스크린 데뷔작 <하얀 면사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까지 정말 많은 말이 있었는데, 그전에도 연기자의 꿈이 있었나?
‘Joe Le Taxi’ 발매 후, 시나리오를 검토해줄 것을 꽤 여러 차례 제안해왔다. 하지만 다 형편없었다. 뮤지컬이나 영화를 좋아했기에 당연히 영화 출연의 꿈도 있었다. 그때쯤 장 클로드 브리소(Jean-Claude Brisseau) 감독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당시 내 능력을 의심하고 비난하던 사람이 많았다. 물론 앨범 판매는 좋은 성적을 거뒀고 큰 애정을 보여준 분들도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날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가장 많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훌륭한 감독의 지도 덕분에 좋은 역할을 맡게 된다면 좋은 선택이 될 거라 믿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브리소 감독은 훌륭한 연출력을 지녔지만, 권위적이고 불 같은 성격으로 촬영장에서 자비로움은 없었다. 그런데도 <하얀 면사포>는 내게 큰 성과를 선물했다. 우선 대중이 날 바라보는 인식을 바꿔놓았고 배우로서도 인정받았다. 또 세자르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로미 슈나이더 상의 영예도 안았다. 여배우로서 큰 호평을 받았다. 정말 기뻤다.

“맡은 역할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 있다. 이자벨 아자니와 반대되는 경우다. 다시 말해, 촬영장을 떠나면 현실의 삶으로 돌아온다는 얘기인데, 스스로를 어떤 유형의 배우라고 생각하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이자벨 아자니만큼 훌륭한 배우가 되지 못한 건 아닐까?(웃음) 가끔 나를 감정적으로 무너뜨려 극단적 상태로 빠지게 한 장면도 물론 있다. 역할을 맡을 때마다 시나리오를 완벽히 숙지해서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연기하는 인물들의 삶과 동화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물론 나만의 흔적을 남겨 아끼는 역할도 있다. 세실리아 루오(Cecilia Rouaud) 감독의 에서 연기했던 엠마뉴엘을 예로 들어볼까. 엠마뉴엘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동안 좋은 영향을 받았고 닮고 싶은 인물이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그녀를 기억하고 삶의 철학을 따라가고자 한다. 또 그녀를 매일 기억하려 노력한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대답하자면, 내게는 연기자로서의 테크닉이 아직 부족하고 진정한 연기력 향상을 위해 영화를 충분히 찍진 못했다. 28년간 15편이니 다작 배우는 아니다. 그렇다고 연극 무대에 오른 경험도 없다. 난 기회를 위해 준비하는 본능적 여배우일 뿐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나?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혼동될 때가 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나 자신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할 때도 있다. 또 자존감이 약해질 때도 있다. 정신이 송두리째 흔들려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나 자신에게 대해 의심을 조금 덜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내 일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을 표현하는 키워드를 고른다면?
인내심이 없고, 용기 있는 쾌락주의자. 불편함을 느끼면 주눅 들고 만다. 상황에 따라 모순적이고 사려 깊은 면도 있지만 충동적이기도 하다. 내 욕망은 어리석은 일을 하게 만들 때도 있다.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수많은 인물과 협업했다는 대목을 들으니 생각났는데, 세르주 갱스부르에 대해 말해줄 수 있나?
첫 앨범을 있게 한 프랑크 랑골프, 그리고 에티엔 로다-질부터 얘기해볼 수 있다. 그러나 세르주와의 작업은 정말 기적 같은 경험이었다. 두 번째 앨범 작업을 시작했을 때 에티엔은 개인적으로 아픔을 겪는 시기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때 세르주를 떠올리긴 했으나, 물론 꿈도 못 꿀 그런 소망이었다. 그런데 세르주가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내게 작사해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내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프랑크가 작곡을 끝낸 상태였기에, 세르주에게 작사를 부탁하기 위해 함께 베르뇌유가에 있던 그의 집을 찾아갔다. 세르주가 한 곡만이라도 수락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세르주를 직접 만났다. 너무 소심해져서 몸이 굳을 지경이었다. 유서 깊고 값진 물건으로 가득한 어둡고 전설적인 장소에 발을 들여놓으려니 말문이 막혔다.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세르주가 음악을 다 듣고 나서 낮은 탁자 옆에 앉아 우리가 가져온 CD를 오디오에서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난 모든 곡이 다 좋은데, 전부 내가 작사할 순 없을까?”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당시 세르주의 건강이 아주 좋지 않은 시기였는데,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내 앨범을 작업해준 거였다.

세르주가 ‘천국(Paradis)은 곧 지옥’이라는 후렴구를 반복해 넣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모르겠다. 스튜디오에서 함께 작업하는 동안 나를 놀리려고 나온 말이긴 하다. 내가 세르주에게 다양한 역량을 보여주고 가사를 다시 쓰게 했다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는 녹음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우리를 보며 작사했고, 우리는 현장에서 결과물을 받았다. 빛나는 가사가 나왔고 가끔 간단한 부분은 내가 고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 부분은 세 곡에서 한두 문장 정도였으니 미미한 수준이었다. 세르주 갱스부르는 천재다. 그렇지만 천재도 좋은 가사를 반복해서 쓰는 경우가 가끔 있다. 지금 생각하면 세르주는 내가 더 좋은 가사를 위해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에 대해 만족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세르주에게는 감정 기복이 있었다. 아주 기분이 좋았다가도 바닥을 치거나 웃다가 울거나, 또는 바보처럼 행동하다가 순식간에 심각해지는 그런 변화 말이다. 홍보 기간 동안 그는 작업하는 동안이 지옥 같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세르주를 혹사시켰고, 그래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 세르주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어리둥절했다. 캐나다에서 앨범 홍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세르주가 남긴 진심 어린 부드러운 사과의 메시지가 응답기에 남아 있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다시 들을 용기가 나진 않지만 그 메시지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레니 크라비츠와의 협업도 당신이 직접 부탁했나?
그렇다. 음반사에서 영어로 앨범을 하나 작업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프로듀서를 누가 맡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내 목소리와 썩 잘 어울리지 않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소울 장르를 시도하고 싶었다. 그때 레니 크라비츠의 첫 앨범 <Let, Love, Rule>이 막 출시됐고 나는 그 앨범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크라비츠를 선택했다. 그는 내 노래 ‘Tandem’의 뮤직비디오를 감명깊게 봤다고 했다. 우리는 시도 차원에서 ‘I’am Waiting for the Man’이라는 곡의 리메이크 작업을 함께했고 결과 역시 나쁘지 않았다. 앨범 녹음은 뉴욕에서 했다. 녹음 스튜디오는 엘리아 카잔 감독의 의 무대였던 호보켄에 있었다. 레니는 신적인 능력을 지닌 뮤지션들에 둘러싸여 내가 그처럼 노래하길 바랐던 것 같다. 수천 번을 부르고 다시 불렀다. 오디오 엔지니어였던 헨리 허시는 빈티지 음향 장비를 이용했고 난 그렇게 영어를 익혔다. 가족같이 날 보호하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던 프랑크 랑골프과 에티엔 로다-질의 품을 떠나 다른 문화와 다른 언어에 녹아들어야 했다. 화려함과 아찔함을 지닌 미국 방식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귀한 경험이었다.

그때 뉴욕에 정착할 기반을 마련한 건가?
뉴욕은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해방의 도시다. 프랑스에서 사람들의 괴롭힘이 잦아들긴 했지만 난 모든 사람이 알아보는 인물이었다. 또 처음으로 혼자 살아본 시기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부모님을 곁을 처음 떠난 건 열여섯 살 때였다. 리틀 이탈리아 거리 폴리스 빌딩의 로프트가 내 뉴욕 생활의 안식처였다. 톱 모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정기적으로 파리에 가긴 했지만 3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뉴욕은 브르타뉴 지방을 떠올리게 했다. 다른 데서 느낄 수 없는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가 모든 곳에 산재한다. 바람이 이끄는 곳에 가면 교차로가 나오고 택시가 다니는 소리, 거리의 요란한 소음, 바라만 봐도 아찔한 건축물, 조명, 그리고 뉴요커들이 내뿜는 긍정적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멋진 추억이었다.

뉴욕은 물론 LA에서 지내기도 했고, 또 자주 미국에 가면서도 미국에서의 커리어, 할리우드 커리어를 거부하는 듯 보인 것도 사실이다.
거부한 적은 없다. 미국에서의 커리어가 다가온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적이 없었다. 미국에 자주 가는 동안 작품 할 시간은 언제든 있었고 내가 너무도 출연하고 싶었던 같은 독립영화는 많았다. 크라비츠와의 앨범 녹음을 위해 뉴욕으로 가기 전 3개월간 LA에 머무르는 동안, 영화 관계자들이 접촉해왔다. 그 가운데 한 명을 만났지만 썩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출연하는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은밀한 유혹>캐스팅 오디션에 나를 보냈다. 결국엔 나보다 열 살이 많은 데미 무어가 캐스팅됐다. 결국 난 ‘여기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그 경험으로 용기도 잃었다. 또 많은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프랑스에서도 거절한 영화 같은 작품이라면 미국에서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원하지 않는 블록버스터 영화 말이다. 미국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는 대신,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시간을 가졌다. 미국에서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았으며, 아이들을 키우고 엄마로서 시간을 보냈다. 후회? 없다.

후회(Regrets)와 회한(Remorse) 중 어느 편이 낫다고 생각하나?
망설임 없이, 후자인 회한. 기회를 그냥 지나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다. 생각만 해도 싫다.

행복의 정의는 뭔가? 어떤 이미지가 맨 먼저 떠오르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풍경.

프랑수아즈 사강은 “행복은 ‘평온한 풍경’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행복이란 건 그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행복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좀더 몽상적이었던 것 같다. 행복은 벼락처럼 갑자기 찾아오는 충격 같다는 것이다.
물론이다. 웃고, 삶을 살아가고,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잠들 수 있다는 건 행복이다. 하지만 마음에도 잠시 휴식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랑에도 바캉스가 필요하다. 난 사랑에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았다. 또 주위에는 늘 나를 생각해주는 친구들이 있고 앞으로도 혼자일 일은 없을 테니까. 사랑이란 건, 케이크에 장식된 체리다.

때로는 파격적이고 대범한 이미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세퀸 장식의 수영복은 샤넬(Chanel).

때로는 파격적이고 대범한 이미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세퀸 장식의 수영복은 샤넬(Chanel).

당신은 예전에 “세상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연약한 것은 바로 사랑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마찬가지다. 그것보다 더 근사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은 우리 존재를 더 생기 있게 만들고, 우리 안에 잠재된 멋진 것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하기에 강한 것이다. 동시에 자유를 위협할 수 있기에 연약한 것이기도 하다.

남자를 볼 때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뭔가?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우선 외모다. 눈빛을 보고 그다음은 아름다운 입을 가졌는지 본다. 내게 있어 아름다운 입은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필수 요소다. 혹은 멋진 미소를 지녔거나. 그다음은 지적인 부분이다.

몇 년 전 카트린느 드뇌브에게 커플 사이의 ‘신의(Fidelity)’에 대한 질문한 적 있다. 그녀는 신의를 썩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일이다. 하지만 나는 20년간 한 사람과 같이 산 경험은 없다. 다만 내게 충실했던 한 남자와 14년을 함께 보냈고, 따라서 신의는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계속 그와 함께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알 수 없다. 카트린느의 의견에 동감한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당신이 좋아하는 걸 즉각 나열한다면?
다이나 워싱턴, 어머니가 해준 토마토 파르시, 만화경, 무지개, 불꽃놀이, 수영하기, 콘서트 보러 가기, 강가에 앉아 아버지와 수다 떨기, 목욕 시간, 수업이 끝나는 시간, 노래하기, 연기,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다크 초콜릿, 피콩 맥주, 모히토, 영화 관람, 요가 수련, 오렌지 꽃향기, 크러시트 벨벳, 새틴, 캐시미어, 해변에서 조개 줍기…

마릴린 먼로도 좋아한다고 들었다.
소녀 시절부터 먼로는 열망의 대상이었다. 여섯 살 때 사진이 아주 많이 담긴 전기를 우연히 보게 됐다. 사진을 보고 홀딱 반했다. 나는 먼로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그녀의 유품이 경매에 나왔을 때, 운 좋게도 몇 개를 내가 가질 수 있었다. 특히 그녀가 이혼하던 날 입고 신었던 드레스와 펌프스,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위해 10대 시절에 ‘Mother’라고 붉은 실로 직접 수놓은 작은 손수건 등등. 내 손으로 유품을 받아 들었을 때, 정말이지 성배를 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번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싫어하는 걸 쭉 나열한다면?
근심, 숙제하라고 아이들 괴롭히기, 추위, 동물의 내장 고기, 달궈진 아스팔트 냄새, 굴착기 소리, 우울한 기분, 열린 마음의 부재, 자유의 부재, 목감기 시럽의 맛, 계절의 부재, 피부를 가렵게 하는 모섬유, 담배를 끊을 수 없는 나 자신.

그렇다면 당신을 웃게 하는 건 뭔가?
먼저 내 아이들과 친구들. 좀더 전반적으로 말하면 날 웃게 만드는 주드 아패토우 감독의 영화, 윌 페렐, 스티브 카렐 같은 배우들. 발레리 르메르시에의 섬세함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다, 뮤리엘 로빈도 정말 좋아한다. 또
‘SNL(Saturday Night Live)’ 팀 모두를 사랑한다! LA에 자주 머물다 보니 우리 아이들은 SNL 중독이다. 시즌별로 다 챙겨 본다. 아, 장 피에르 바크리의 열성적이고도 열렬한 팬이다. 바크리가 나오는 영화는 가히 클래식이다. 또 어릴 때부터 좋아한 장 로슈포르, 장 피에르 마리엘, 루이스 드 푸네스 같은 배우도 빼놓을 수 없다.

생각해보니 10대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그보다 과거인 유년기는 넘어간 것 같다.
나는 우편번호 94로 시작하는 빌리에쉬르마른에서 자랐다. 시골 마을의 공기를 느낄 수 있던 외곽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였다. 걸어서 등교했고, 일요일마다 장이 섰다. 일주일에 두 번 무용 레슨을 받았고 화요일 밤에는 외할머니 댁에서 보냈다. 부모님은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녔다. 레스토랑, 파티, 친구들의 집, 심지어 나이트클럽에도 데려갔는데, 난 의자에서 잠들곤 했다.

‘미래를 생각하는 자에게 미래가 온다’는 말이 있다.
현재 내가 삶에서 무척 중요한 시점에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일에 있어서 한창 꽃피울 시기니까. 미래에 대해 예상하는 건 그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데 의미가 있다. 너무 깊이 생각하면 현재를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자신을 대표할 만한 앞니를 환히 드러내며 웃음 짓고 있는 바네사. 가죽 재킷은 샤넬(Chanel), 탱크톱은 마제스틱 필라튀르(Majestic Filatures).

자신을 대표할 만한 앞니를 환히 드러내며 웃음 짓고 있는 바네사. 가죽 재킷은 샤넬(Chanel), 탱크톱은 마제스틱 필라튀르(Majestic Fila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