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이지아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침묵하거나 회피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첫 영화 〈무수단〉 개봉을 앞두고 만난 그녀는 맑고 분명한 목소리로, 다가오지 않은 미래나 지나간 어제 대신, 지금 이 순간에 대해 말했다.

슬립 드레스는 에쓰이콜와이지(S=YZ), 크리스털 장식 티아라는 생로랑(Saint Laurent), 목걸이는 베니뮤(Venimeux), 실버 팔찌는 모두 넘버링(Numbering), 웨스턴 부츠는 발렌티노(Valentino), 반지는 모두 이지아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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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웃집 토토로’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이지아가 자신의 얼굴 크기만 한 깜찍한 토토로 케이스를 씌운 휴대폰을 꺼내 든 순간, 지금껏 세간의 이야기로 미뤄 짐작해온 그녀에 대한 선입견은 완전히 사라졌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토토로에 대한 애정을 시인한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덧붙였다. “제가 휴대폰을 자주 떨어뜨리거든요. 그런데 이건 정말 튼튼해요. 오래 써온 거예요.” 오랜만에 인터뷰에 응한 그녀는 연기 외적인 이야기에 대해 조심스러워했으나 그렇다고 침묵하거나 대충 둘러대는 법도 없었다. 나지막하지만 밝은 목소리와 부드럽고 솔직한 태도로 자신의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배우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커리어를 잘 쌓아가고 있다가 그런 일이 터졌어요. 사람들의 머릿속에 사생활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견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죠. 배우로서의 활동 외에 다른 점이 자꾸 부각되는 게 아직은 부담스러워요.” 누구나 알고 있는 그녀의 다재다능함에 대해선 더는 얘기를 꺼낼 필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만난 건 그녀의 스크린 데뷔작 <무수단> 때문이니까.

영화 촬영 내내 이지아는 군복 차림으로 중무장한 채 한여름 산속을 뛰어다녔다. 모자를 푹 눌러쓴 데다 얼굴까지 시커멓게 칠했다. “위장 크림을 바르지 않고 등장하는 게 한 신뿐일걸요? 하하. 연기할 땐 그런 건 신경 안 써요. 망가져도 괜찮아요. <내 눈에 콩깍지> 때도 못생기게 분장해야 한다고 해서 오히려 좋아했거든요. 영화관에서도 상영된 적 있긴 하지만, 그건 원래 드라마로 제작된 거였어요.” 북한 핵실험으로 인해 생긴 돌연변이가 비무장지대 근처로 도망친 후, 사건을 조사하기위해 현장에 나간 특수부대원들이 뜻밖의 비밀과 맞닥뜨리게 된다는 이 미스터리 스릴러물에서 이지아는 생화학무기 전문 여군 중위 역을 맡았다. “군대 영화라는 게 여배우에게 자주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잖아요?” 이지아는 군인다운 절도를 몸에 익히기 위해 여군 특집 예능 방송은 물론 해외 영상까지 찾아봤다. 혼자 거울을 보며 수차례 거수경례 연습도 했다. “괜히 남자들 기에 눌릴까 봐 노력 많이 했어요. 저 빼곤 현장에 남자들뿐이었거든요. 촬영하는 2개월 내내 군대 얘기만 했어요. 산속에선 정말 모두가 뼛속까지 군인이었죠.”

자수 장식 새틴 스카잔은 디젤(Diesel), 펀칭 디테일 가죽 원피스는 톰 포드(Tom Ford), 모자는 브라운햇(Brown Hat). 오른손 실버 반지는 모두 넘버링(Numbering), 뱀피 뱅글은 피 바이 파나쉬(P by Panache), 왼손 체인 팔찌는 모두 모드곤(Modgone), 검지 반지는 넘버링.

자수 장식 새틴 스카잔은 디젤(Diesel), 펀칭 디테일 가죽 원피스는 톰 포드(Tom Ford), 모자는 브라운햇(Brown Hat). 오른손 실버 반지는 모두 넘버링(Numbering), 뱀피 뱅글은 피 바이 파나쉬(P by Panache), 왼손 체인 팔찌는 모두 모드곤(Modgone), 검지 반지는 넘버링.

극 중 대위로 출연한 김민준은 말투와 시선 처리까지, 실제 선임 장교처럼 틈날 때마다 이지아에게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가르쳐줬다. 배려는 거기까지. 실전을 방불케 하는 현장답게 여자라고 봐주는 법은 없었다. 부러질 듯 가녀린 여배우는 무거운 장비를 들고 남자들과 똑같이 구르고 달렸다. <태왕사신기>는 물론 <아테나: 전쟁의 여신>, 여순경으로 분한 <나도, 꽃!>까지 액션 연기라면 꽤 자신 있었지만 이번 영화는 지금까지와 차원이 달랐다. “<태왕사신기>는 촬영 기간이 2년이라 여유가 있는 편이었죠. 이번엔 회차가 워낙 빠듯해 사실 누가 누굴 챙겨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어요. 결국 하루는 촬영하다 쓰러졌어요. 어떻게든 깡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체력적으로 역부족이더군요.” 무더운 날씨와 총의 무게만큼 그녀를 힘들게 한 건 무시무시한 모기 떼와의 사투였다. 군복을 뚫고 들어오는 산모기의 위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크기도 얼마나 큰지, 모기가 아니라 새인 줄 알았어요, 새!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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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털 장식 티아라는 생로랑(Saint Laurent),

지난해 말 방송된 단막극 <설련화>는 영화 크랭크인을 하루 앞두고 촬영이 끝났다. 2부작에 불과했지만 이지아의 남장 연기는 꽤 화제였다. “남장이 잘 어울린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머리를 짧게 안 자르려고요. 하하. 그땐 제가 봐도 남자애 같았거든요. 한번은 밥을 먹는데 식당 아주머니가 남자 아이돌이냐고 묻더라고요. 진짜 충격 받았어요.” 탐스러운 긴 머리카락은 데뷔 때부터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2004년 어느 통신사 광고에서 배용준의 상대역으로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그랬다. 신비로운 신인 모델에 대한 궁금증은 그녀가 <태왕사신기> 주연으로 발탁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극에 달했다. “글쎄요, 신비롭다는 건 좋은 말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수상하다는 거잖아요.” 그녀는 뭘 말하려는지 다 안다는 듯 편안한 얼굴로 먼저 얘길 꺼냈다. “거짓말을 잘 못해요. 그래서 차라리 답변을 피해버렸죠. 인터뷰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지금처럼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듯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없었어요. 너무 긴장했으니까. 얘기하다 보면 어디까지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단편적 모습만 보여줬어요. 당시 제 인간관계가 다 그랬어요. 먼저 누군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뭘 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좀 이상하단 얘길 많이 들었죠, 제가. 하하.”

숨막히는 비밀의 코르셋을 벗은 그녀는 확실히 전에 비해 여유로워 보인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촬영장에서도 그녀는 서슴없이 먼저 스태프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망사 스타킹은 처음 신어봐요. 할로윈 때 한 번 시도하고 싶었는데 어디서 사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평소 그녀의 옷차림은 오늘처럼 펑키한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예전엔 고딕 스타일도 정말 좋아했는데 지금 그런 옷 입으면 옆에서들 말리죠. 하하. 요즘은 피비 파일로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요.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미니멀리즘. 지나치게 여성스럽지도 않고요.” 반짝이는 슬립 드레스를 벗고 원래의 깔끔한 검은색 스웨터와 편한 바지 차림으로 돌아온 그녀가 모피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투명할 만큼 새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그녀는 사실 화면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직접 마주했을 때가 더 예쁘다. 정작 본인은 그 점이 다소 불만스럽다. “실제로 제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잖아요. 배우니까 대중에게 예쁘게 보여야 할 텐데, 고민이에요. 저도 마른 걸 좋아하진 않지만 화면에선 왠지 얼굴이 부어 보여 살도 빼봤어요. 지금도 전보다 3kg 정도 빠진 상태예요.”

드라마와 영화 촬영이 끝난 후, 한동안 이지아는 여러 도시로 여행을 다녔다. “아시는 것처럼 제가 좀 남다른 시간이 있었잖아요. 살면서 그때그때 시기마다 경험해야 하던 많은 것을 놓치고 지나친 느낌이라 요즘은 정말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집중하려 해요. 마주하는 모든 것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 충분히 만끽하고, 또 아주 진하게 기억하고 싶거든요.” 그러는 동안 SNS에서는 할리우드 배우 피터 사스가드, 그리고 프랑스 출신 여배우 록산느 메스퀴다와 이지아가 함께 어울리며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됐다. 이지아가 할리우드 영화 <컨셔스 퍼셉션>의 각본을 썼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스토리는 이미 제 손을 떠난 상태예요. 현재 진행 상황에 대해선 저도 아는 바가 별로 없어요. 작업이 잘 나오길 바랄 뿐이죠.”

비즈 장식 코튼 재킷은 발렌티노 (Valentino), 메시와 레이스를 믹스한 새틴 원피스는 버버리(Burberry), 펠트 페도라는 브라운햇(Brown Hat), 실버 목걸이와 오른손 검지 반지는 넘버링(Numbering), 왼손 약지 반지는 모드곤(Modgone), 프린지 장식 앵클 부츠는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비즈 장식 코튼 재킷은 발렌티노 (Valentino), 메시와 레이스를 믹스한 새틴 원피스는 버버리(Burberry), 펠트 페도라는 브라운햇(Brown Hat), 실버 목걸이와 오른손 검지 반지는 넘버링(Numbering), 왼손 약지 반지는 모드곤(Modgone), 프린지 장식 앵클 부츠는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그녀는 의도치 않게 자신의 시나리오 작업 소식이 기사화된 것에 대해 다소 부담스러워했다. 같은 입장이라면 사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대중의 관심이 지나치게 개인에게 집중된 탓에 오히려 배우로서의 역량이 과소평가된 부분도 있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이지아를 재능 있는 배우로서 다시 돌아보게 한 작품이었다. “김수현 작가님과는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아요. 새해 인사도 드렸죠. 열심히 하긴 했지만 연기도 그렇고, 쉽지 않은 작품이었어요. 다행히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아서 감사하죠.”

이 드라마에서 오은수는 두 번의 이혼 후, 결국 자기 자신과의 결혼을 택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말이었다. “작가님이 전화로 제 의견을 물어보신 적이 있어요. 마지막 회가 방송되기 바로 전주였어요. 저는 준구를 용서할 것 같다고 했더니, ‘그래, 알았다. 넌 그렇구나’ 하시더군요. 저는 또 제 생각을 반영해주시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대본을 받곤 깜짝 놀랐죠. 저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을 거예요. 금기를 깨는 기분이었거든요. 내심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오은수는 지금껏 그녀가 맡아온 어떤 인물과도 달랐다. 드라마에서 이지아는 늘 당차고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을 연기해왔지만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당당히 타인의 희생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태왕사신기>나 <베토벤 바이러스> 등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은수와 반대로 상대를 위해 먼저 자신을 희생하거나 연소하는 인물이었다. “저 역시 비슷해요. 우린 대부분 다 너덜너덜해지고 시간을 허비할 대로 허비해, 더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을 때에 이르러서야 결단을 내리잖아요. 그래서 은수의 선택을 더욱 동경하는 거고요. 연기하는 동안 은수에게 배운 점이 많아요.”

가죽 재킷은 골든구스 디럭스(Golden Goose Deluxe), 새틴 슬립은 에탐(Etam), 목걸이와 반지는 모두 베니뮤(Venimeux), 부츠는 발렌티노(Valentino).

가죽 재킷은 골든구스 디럭스(Golden Goose Deluxe), 새틴 슬립은 에탐(Etam), 목걸이와 반지는 모두 베니뮤(Venimeux), 부츠는 발렌티노(Valentino).

인터뷰하는 동안 이지아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것 같다”고 몇 번을 말했다. “최근에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라는 영화를 봤어요. 줄리엣 비노쉬가 너무 매력적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나이 먹는다는 것과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다 변하잖아요. 나를 둘러싼 상황이요. 그럴 때 우린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그동안 그녀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마음의 상처는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배우라는 직업을 택한 걸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다. 더 많은 작품과 다양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배우로서의 욕심은 오히려 더 커졌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좋았어요. 이런 세계가 있구나. 그 안에 있으면 살아 있는 것 같고, 행복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첫 영화의 개봉을 앞둔 그녀는 떨리는 심정이다. “큰 스크린에서 보면 눈빛의 작은 흔들림조차 너무도 크게 보이기에 진심으로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잘했을지 걱정돼요.” 결과만 좋다면 여름 산중에서의 고행쯤은 즐거운 추억으로 기쁘게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평단이나 대중의 평가와 무관하게 그녀에겐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요즘 그녀는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다른 누구로부터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다. “온전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제 시간이 무척 소중한 것 같아요. 예전엔 잘 몰랐거든요 그 가치를 알게 됐다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변화예요.” 지금 이지아는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