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가죽 코트 차림을 한 여인의 농밀한 시선 앞에 선 오렌지빛 스커트 자락을 휘날리는 또 다른 여인. 헬무트 뉴튼의 여자들처럼 도발적인 두 여인과의 파리 랑데부.

2015년 12월 17일 밤, 고려대학교 후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로에는 빨갛게 브레이크 등을 켠 차들이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꽉 막힌 길 위에서 노심초사하는 이들은 모두 에르메스 쇼를 보러 화정체육관으로 향하는 중이다. 화정체육관은 ‘천고 5m 이상, 2,000평 규모의 의외의 장소’를 논의하던 중 대학 체육관을 제안한 파리 본사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선정됐으며 쇼 직전까지 비밀에 부쳤다. 체육관 내부에 세워진 쇼장은 크고 하얀 블록을 쌓아 만든 것 같았다.

모델들의 캣워크가 끝나고 런웨이 끝의 어른거리는 하얀 코튼 막(그 막 뒤편에 에르메스 특유의 빨강인 ‘루즈 아쉬(Rouge H)’ 색깔로 꾸민 애프터 파티 장소가 숨어 있었다) 뒤에서 에르메스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나데주 바니 시뷸스키(Nadège Vanhee-Cybulski)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앤트워프 왕립 예술학교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메종 마르탱 마르지엘라, 셀린을 거친 후 더 로우의 디자인 디렉터로 일하는 동안 셀러브리티 패션 브랜드를 하이엔드 레이블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숨은 실력자다. 그러나 그녀가 웃으며 런웨이로 뛰어나올때면 너무도 천진한 느낌이 들어 이 거친 ‘패션계’에서 쌓은 경력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쇼 전날 아침, 도산공원의 메종 에르메스에서 만났을 때도 그녀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경계심이나 탐색전 없이, 겨울날 아침처럼 상쾌하고 순수하게 인사를 건넸다. “날씨가 춥죠? 오늘부터 갑자기 추워졌어요.” “저는 좋아요! 제가 기대한 게 바로 이런 날씨예요. 서울이 춥다고해서 트렁크 가득 두툼한 옷을 채워 왔거든요.”Nadege_New Portrait

VOGUE KOREA(이하 VK) 내일 서울에서 선보일 2016 봄 컬렉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줄래요? 첫 컬렉션에 비해 한결 단순하고 스포티해진 느낌이에요.
NADÈGE VANHEE-CYBULSKI(이하 NV) 캐주얼하면서도 활동적이라고 할 수 있죠. 하우스 전통에 기반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자유로움, 심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가 담긴 여름 옷장 같은 거죠. 아주 가벼운 것에 대해 생각하며 실크를 다양하게 쓰고 싶었어요. (테이블에 놓인 룩북을 펼치며) 이 실크 드레스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체크무늬 실크를 강한 개버딘처럼 직조하거나 가죽과 매치하고 스카프 무늬를 프린트한 것도 있어요. 이런 식의 재해석은 언뜻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텍스타일 디자인에 있어 절제미를 의도했고 가까이서 보면 우아함과 구성미를 발견할 수 있죠.

VK 옷감이나 텍스타일에 관심이 많군요.
NV 텍스타일을 정말 좋아해요. 디자인은 텍스타일과 연관돼 있죠. 예를 들어 봄 컬렉션의 첫 세 가지룩은 여름에 입는 캐시미어에 대한 옷이에요. ‘클라우드 캐시미어’라고 이름 붙였죠, 구름처럼 가볍거든요. 사실 정체는 트위드 조직이에요. 실크 위에 코튼과 캐시미어를 직조해 새로운 질감을 만들었죠. 그렇지만 표면은 여전히 실크처럼 부드럽고 가볍습니다.

VK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는 뭔가요?
NV 어렵지만 중요한 질문이군요. 저는 저 자신을 어떤 틀에 맞춰 규정짓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저는 어떤 섬유, 어떤 소재나 가리지 않고 좋아해요. 각각의 성격을 지닌다고 생각하니까요. 디자이너로서 제가 할 일은 다양한 가능성을 탐험하는 거죠.

VK 흠, 좋아요. 그럼 당신을 옷감에 비유한다면 뭐가 좋을까요?
NV 저를 옷감에 비유한다고요? 아, 정말 어렵네요. 사실 저는 쌍둥이자리예요.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어서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어요. 어떤 날은 코튼 이라고 했다가 다음 날은 실크라고 할 게 분명해요.

VK 개인적으로 당신의 첫 에르메스 컬렉션에서 가죽 덩가리(Dungaree)가 인상 깊었어요. 에르메스를 입는 여자들이 그저 우아하기만 한 게 아닌, 동시대 감각을 갖췄다는 걸 보여주는 아이템으로 생각하거든요. 디자인할 때 당신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 어디에 초점을 맞추나요?
NV 저는 자유로움과 클래식을 보는 방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고 싶어요. 어떻게 당신의 클래식을 이해하고 입을 것인가? 가령 클래식한 아이템과 함께 스니커즈를 신거나 뉴트럴 톤, 부드러운 색을 강렬한 색과 매치하는 거죠. 클래식을 현실화하는(현실에 적용하는) 겁니다.

VK 그렇다면 당신은 클래식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NV 제가 생각하는 클래식은 영원한 거예요. 20대, 30대, 70대가 되어서 입어도 늘 적절하고 어울리게 입을 수 있는 거죠.

VK 클래식 아이템의 예를 든다면요?
NV 에르메스에 특히 그런 것이 많아요. 그래요, 플리츠 스커트가 있겠군요. 에르메스 아카이브에서 다양하게 해석한 온갖 플리츠 스커트를 발견했어요. 여학생 교복처럼 아주 기본형 스타일부터 나이 지긋한 이들에게 어울릴 미디 길이까지. 저 역시 이 실험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플리츠 스커트를 보다 활동적이고 동시대버전으로 끌어올리고 싶었어요.

VK 어떤 식으로 발전시켰죠?
NV 플리츠 스커트를 해체해서 가죽과 조합하거나, (다시 룩북을 뒤지기 시작했다) 16번 룩처럼요. 여기도 있군요, 18번 룩. 그리고 플리츠 스커트 주름 사이를 갈라서 걸을 때마다 열리게 만들기도 하고요. 아름다운 체크무늬 시리즈도 있어요. 개인적으로 체크가 아주 소박한 무늬라고 여겨서 그걸 우아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고, 그래서 크레이프 드 신을 사용했죠. 자카드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제가 찾아줄게요. 좀더 뒤쪽에 있는 마린 블루 룩 중 하나예요. 이 플리츠는 실크 스카프에 기반한 건데, 사실 첫 컬렉션의 스카프 프린트 셔츠 드레스(4번 룩)를 재디자인한 거예요. 프린트된 무늬를 원단으로 직조한 거죠. 그냥 보면 평면의 파란색 실크처럼 보이지만 빛에 따라 무늬가 은은하게 드러났다가 사라지곤 한답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거죠.

VK 정말 놀라워요! 지난가을 컬렉션 때 실용적인 방수 개버딘 팬츠를 만들었는데, 봄 컬렉션에서는 어떤 새로운 시도를 했는지 궁금하군요.
NV 오, 컬렉션의 모든 옷에서 그런 시도를 설명할 수 있을 정도예요.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 수많은 절제된 테크닉이 쓰였죠. 특히 쇼 후반부의 오프 화이트 시리즈는 혁신적 시도가 집결돼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미래적인 뭔가를 시도하는 대신 파나마 모자, 바스켓 위브(바구니처럼 가로세로 줄을 위아래로 번갈아가며 짜는 직조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선함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리넨, 실크, 코튼 같은 패브릭에 바스켓 위브 방식을 적용하는 식으로.

VK 그럼 다른 소재를 서로 직조한 건가요?
NV 바로 그거예요. 표면은 아주 가볍고 섬세하죠. 다양한 질감을 포함하지만 정말 곱고 멋져요. 사실 그 작업이 특히 어려웠던 이유는 양면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옷을 뒤집어도 재단선이 보이지 않도록, 안팎 양면이 완전히 매끈한 거죠. 파나마 모자가 그렇거든요. 모자 안쪽도 바깥쪽과 똑같고 이음매가 보이지 않죠.

VK 멋지긴 하지만 관리가 정말 까다로울 것 같아요.
NV 단 한 번의 쇼를 위한 옷! 하하.

VK 그래서 말인데, 실용성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요? 흔히 에르메스를 구입할 정도면 실용성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죠.
NV 에르메스 고객이 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에르메스에서 뭔가 살 때는 그 물건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고 여기죠. 모든 사물은 실용성을 갖고 있어요. 물론 저도 때로는 그 물건이 너무 아름다워서 실용성에 대해 잊을 때도 있죠. “아, 너무 예뻐서 도저히 쓰지 못하겠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옷을 포함하는 모든 사물의 본질은 주인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용적이어야 하고요.

VK 에르메스 하우스에서 일하며 당신을 가장 신나게 하는 건 뭐죠?
NV 아마도 다음 컬렉션? 하하, 농담이에요. 여러 훌륭한 자원을 갖고 일할 수 있다는 점이죠. 이곳에서는 방대한 지식과 훌륭한 전문가, 소재, 기술적 자본 등 충분한 무형과 유형의 자산에 접촉할 수 있어요.

VK 가능성의 끝을 알 수 없는 장인들과 일한다는 건 정말 매력적이죠.
NV 맞아요, 정말 멋진 일이죠. 내일 열릴 쇼를 준비하다가 벨트에 문제가 생긴 걸 발견했어요. 바로 여기 메종 에르메스 워크숍에 다짜고짜 들이닥쳐서 인하우스 장인에게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아마 그녀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거예요, 내일 열릴 쇼에 대해 전혀 모르고있었거든요. 그런데도 “한번 해보죠”라고 하더니 3시간 만에 뚝딱 고쳤답니다. 이런 것들이 에르메스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멋진 점이에요. 전문가들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 있죠.

VK 그렇다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가장 재미있는 일과 가장 어려운 일은 어떤 건가요?
NV 가장 어려운 점은 머릿속을 여러 가지에 대해 시간 별로 잘 나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당장 눈앞의 일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다음 컬렉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고, 그 외의 다른 업무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죠. 후! 하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한다는 게 재미있기도 해요.

VK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죠. 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과 업무 시간 이후에는 일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
NV 저는 전자예요. 휴가 가서도 결국 스트레스 받은 채로 돌아오곤 하니까요. 책과 이런저런 것들을 한가득 사서 돌아오곤 하거든요. 디자이너라면 흡수 능력이 있어야 해요. 만약 저를 무인도에 데려다놓는다면 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VK 당신은 거기서도 뭔가를 찾아내고 말 거예요.
NV 맞아요! 사실 그럴 거 같아요.

VK 패션 디자인의 어떤 면이 좋은 거죠?
NV 리서치하는 게 정말 좋아요. 어떻게 할지 모르겠고 아직 형태도 잡히지 않았지만 “좋아, 이게 드레스가 될 수 있겠군. 이건 모자가 될 수 있겠어”라는 식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흥미롭죠. 그게 좋아요. 컨셉을 잡는 거요.

VK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궁금해요.
NV 재패니즈 쿨 세대(또는 ‘쿨 재팬’. 70~80년대 이세이 미야케, 레이 가와쿠보, 요지 야마모토에 이어 1990년대 중·후반에 활약한 두 번째 세대 일본 디자이너들. 준야 와타나베, 준 다카하시, 이세이 미야케의 나오키 다키자와). 제가 그들을 발견했을 때가 열네다섯 살이었는데, ‘와, 정말 멋진 일이 벌어진다’라고 생각했죠. 그들은 완전히 판을 바꿔놨어요. 3D 의상, 옷에 대한 추상적 접근, 현대적인 옷장 등등 그 모든 것을요.

VK 자신의 스타일을 정의한다면요?
NV 사람들은 저를 미니멀리스트라고 하죠.

VK 당신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군요.
NV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물론 저는 깨끗한 선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누구라도 에르메스에서 일한다면 절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건 엄청난 기회로 통하는 문을 닫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수많은 프린트,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인 드로잉, 특별한 기술 등 실로 엄청나죠. 굳이 저 자신을 정의한다면 모던 클래식이라고 하겠어요.

VK 오늘날 여자들의 일상복을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하나만 꼽는다면 뭐가 좋을까요?
NV 어려워요. 당신은 뭐라고 생각해요? 글쎄, 정말 모르겠어요. 늘 바뀌잖아요. 니트웨어였다가 코트가 되기도 하고. 좋아요, 코트라고 하겠어요. 저는 실내에서도 코트를 입거든요. 제가 작업할 때 즐겨 입는 아이템이기도 하죠. 에르메스에는 다양한 코트가 있어요. 크고 두툼한 코트부터 가벼운 코트까지. 그래서 겹쳐 입을 수도 있죠.

VK 왜 코트죠?
NV 아주 변화무쌍한 아이템이니까요. 겉에 입을 수 있고 안에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 코트예요. 몸 전체를 완전히 감싸서 모든 것을 충족시키죠. 바지, 블라우스처럼 일부가 아니라 어깨부터 발목까지 전부 덮으니까요.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어서 가능성이 많고 창의적이에요. 트렌치 코트를 아름다운 새틴으로 만들면 드레스가 될 수 있고, 길이를 짧게 자르면 좀더 일상적인 옷이 되기도 해요. 새틴 대신 울 소재로 만들면 구조적인 코트가 되죠. 아주 흥미로운 변화 가능성을 지닌 창의적인 아이템이죠.

VK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겠어요. 서울은 이번이 처음이죠?
NV 네, 그렇지만 곧 다시 올 거예요. 일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방문이 될 거예요. 여기 도산공원도 서울에서 가장 멋진 장소 중 하나겠지만 좀더 한국적인 곳에 가보고 싶어요.

VK 내일모레 파리로 돌아가겠군요. 다음 컬렉션 준비로 바쁘겠어요.
NV 돌아가면 연말 휴가라서 좀 쉴 수 있어요. 3월에 선보일 가을 컬렉션도 거의 막바지 단계고요. 사실 내후년 봄 컬렉션 준비도 진행 중이죠.

VK 믿을 수 없어요. 컬렉션 두 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고요?
NV 엄밀히 말해서 세 개죠. 내일 서울에서 열릴 쇼도 준비하고 있으니까요.

VK 정말 그게 가능해요?
NV 오, 그래야만 해요! 스도쿠 게임 같답니다. 그래도 저는 그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