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를 생각하며

미셸 투르니에의 작고 소식을 듣고 딱 한 사람만이 떠올랐다. 그의 소설 여러 편을 한국 독자들에게 꾸준히 소개해온 김화영 교수. 며칠 후 그가 보낸 글에는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를 생각하며’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MICHEL TOURNIER EN 1992
지난 2016년 1월 19일 저녁, 어느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미셸 투르니에가 돌아가셨다는데, 아세요?” 마음속 어둑한 곳에서 오래된 무엇인가가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에는 언론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미셸 투르니에를 만나지 못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오래전 어느 날, 그가 독일에 관한 대담집을 한 권 보내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니, 2012년 여름에 한 번 더 만날 뻔했다. 나는 가족과 함께 그해 여름 한동안을 프로방스에서 보내고 긴 여로를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옛 친구 질 베르가 자기 차로 우리를 안내하며 하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아름다운 레 슈브뢰즈 골짜기를 한 바퀴 돌며 산책도 하고 차도 마셨다. 파리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친구에게 그 근처 어딘가에 ‘슈와젤’이라는 마을이 있을 터이니 그리로 가보자고 했다. 인적이 없는 작은 마을. 오래 묵은 옛 성당 옆 담쟁이덩굴 무성하게 덮인 담 너머, 뜰 안의 하얀 집, 낯익은 미셸 투르니에가 사는 사제관이었다. 사위가 고요했다. 그러나 그의 집 대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마당을 건너지르다가 나를 보고 되돌아 나온다.

그사이에 나는 여러 번 파리에 체류했지만 그에게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2002년 정초에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이미 그는 많이 늙고 쇠약해 있었다. 그 큰 집에 혼자 고요하게 살고 있는 그를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그는 사실상 작품을 더 이상 쓰지 못했고 2010년에는 공쿠르상 심사위원, 갈리마르 출판사 기획위원의 일도 손을 놓았다. 예고도 없이 벨을 눌러 그 집의 고요를 흔들어놓을 수는 없었다. 거실이 있는 1층도, 침실이 있는 3층도 덧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미셸 투르니에의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처음 번역해 소개한 것은 1982년이었다. 내가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70년대 말, 새로 출판사를 차린 친구가 ‘좋은 책’을 한 권 번역해달라고 청했다. 나는 즉시 <방드르디> 번역에 착수하여 불과 몇 달 만에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친구의 출판사에서는 감감무소식. 대중성이 부족한 책이라 무리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대신 파트릭 모디아노의 얄팍한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신속히 번역해 보냈다. <방드르디>는 결국 2년이나 지난 뒤 중앙일보사가 펴낸 <오늘의 세계문학> 시리즈 제6권으로 펴낼 수 있었다(후일 나는 이 책을 다시 번역하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펴냈다). 이런 번역서 덕분에 나는 매년 10월 초, 노벨 문학상 발표 시기가 되면 여러 신문  방송사로부터 자주 전화를 받곤 했다. 미셸 투르니에가 노벨 문학상 후보 중 늘 상위권을 오르내린 것이다. 언젠가 그를 만났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왜 해마다 노벨상 후보에만 오르고 정작 상은 못 받았을까요?” 그가 대답했다. “너무 오랫동안 후보로 떠오르곤 하던 사람들은 결국 상을 받지 못하더라고요. 영국의 그레이엄 그린이 그랬죠.” 과연 2014년 뜻밖에도 프랑스에 다시 차례가 왔지만 투르니에가 아닌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았다.

투르니에는 1924년 12월 1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독일 문화에 심취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장에 나갔다가 돌아와 옛 꿈을 접고 음악 악보 저작권 회사를 설립했다. 그 결과 투르니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독일 문화와 음악이었다. 청소년기 그는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리 교외의 저택은 독일군에게 징발되었다. 그는 파스퇴르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인 1941년 돌연 철학에 매료되었다. 소르본 대학에서 바슐라르의 강의를 들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가 발표되자 그는 ‘바로 내 눈 앞에서 철학이 태어나는 장면을 목격하는 전무후무한 행운’을 입었음을 자각했다. 철학 학사에 이어 플라톤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DES) 학위를 받았다. 독일 문화에 심취한 그는 1946년부터 4년간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대학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 투르니에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내가 꼴찌였어요.” 그는 자신의 말대로 “대학교의 문을 쾅 하고 닫아”버리고 교직의 꿈을 버렸다. 문학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었다. 한 빼어난 작가의 싹을 하마터면 대학교수 자격증으로 짓밟아버릴 뻔하지 않았던가!

그는 ‘인간박물관’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구조인류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파리 생루이 섬의 낡은 호텔 방에 기거하면서 후일 프랑스 문화계를 뒤흔들게 될 질 들뢰즈, 프랑수아 샤틀레, 미셸 뷔토르, 아르망 가티, 피에르 불레즈 등과 어울려 방랑 생활을 하면서 비문학적 서적을 번역하거나 문화 및 사진에 관한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이 자유로운 시기가 사실은 황금 같은 글쓰기 수업을 한 시대였다. 1957년 바로 지금의 슈와젤 마을 사제관으로 이사하여 고적한 생활을 하며 1962년부터 소설 <방드르디>를 집필하기 시작, 1966년에 완성했다. 그가 좋아했던 바슐라르, 사르트르, 레비스트 로스의 영향이 가장 흥미로운 방식으로 구현된 작품이었다. 1967년 42세 늦깎이 소설가의 처녀작 <방드르디>는 발간 즉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받으면서 당시 ‘누보로망’이 지배하던 프랑스 문단에 이단아처럼 등장한 철학소설로서 독자들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1970년에는 소설 <마왕>으로 공쿠르상을 받았고 이듬해 소설 <방드르디>를 어린이 소설로 개작한 <방드르디, 야생의 삶>은 어린이도 접근할 수 있는 철학적 내용으로 프랑스에서만 300만 부가 팔린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1967~96년 사이에 장편소설 아홉 권, 10여 권의 단편집, 산문집을 발표한 20세기 프랑스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그중에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황야의 수탉>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외면일기> <뒷모습>을 번역해 소개했다. 그 인연으로 나는 파리에 갈 때면 종종 슈와젤 마을의 사제관을 찾아가 그를 만나곤 했다. 그는 차를 끓여 내오면서 “미테랑 대통령이 찾아오면 늘 앉던 자리”라며 내게 거실 창가의 자리를 권했다.

미셸 투르니에가 소설가가 된 것은 자신을 사로잡은 철학적 문제에다가 살아 숨 쉬는 몸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소설은 흔히 신화를재해석한 ‘다시 쓰기’였다. 1719년 영국의 다니엘 데포는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이상한 모험>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3세기를 흐르는 동안 로빈슨 크루소는 무수한 작가들과 독자들과 어른, 어린이들을 꿈꾸게 하면서 인간 집단의 심층에 침전된 ‘신화’가 되었다. 그 이야기는 꾸준히 다시 쓰였다. 투르니에의 <방드르디>도 그 새로운 해석의 하나다. 데포는 영국과 서구 사회로부터 받아들인 윤리적·종교적·과학적 교육의 내용을 자신이 표류한 무인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이는 곧 과거지향의 식민주의적 세계관의 구현이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제자인 투르니에는 과거에서 탈피하여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서는 백인 로빈슨이 아닌 혼혈아 방드르디가 주인공이 되어 로빈슨이 이룩한 모든 과업을 단숨에 폭파해버린다. 오히려 방드르디가 로빈슨에게 자유롭고 진정한 삶 그리고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소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 무인도 이야기의 바탕에는 “타자란 무엇인가?”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자아 인식, 세계 인식은 가능한가?” 같은 사르트르적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소설은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개털 냄새와 낙엽 타는 냄새를 풍기는”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그런 문제를 에워싸는 감각을 실감으로 다시 살고 꿈꾸게 한다.

미셸 투르니에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많은 것을 덤으로 받았다. 그는 세기가 바뀔 때 어느 신문으로부터 “2000년에 일어날 가장 중대한 사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죽음. 여섯 명의 어린아이들이 베토벤 제7번 교향곡의 알레그레토에 맞추어 나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운구하고 화려한 행렬이 뒤따를 것이다. 혹자는 왜 내가 2000년에 죽는 거죠? 하고 물으리라. 왜냐하면 그때 나는 76세가 될 테니까. 나의 아버지는 그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죽기에 아주 좋은 나이다. 행운과 이성을 잃지 않은 채 그리하여 늘그막의 고통과 욕됨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젠장, 그만하면 충분히 산 거 아닌가?” 그런데 세기가 바뀌는 2000년, 그는 그만 자신의 죽음을 “놓쳐버렸다”. 그는 다시 15년을 더 살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새겨지기를 원했다. “고맙다, 나의 삶이여!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배나 더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60년 동안 그의 황금기를 담았던 사제관은 이제 그의 무덤을 지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