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평화로운 쉼터

사진가 조선희는 전쟁터 같은 촬영 스튜디오 위에 평화로운 쉼터를 마련했다. 추억이 깃든 물건으로 채운 공간은 나무 향으로 가득하다. 복숭아가 익을 무렵 옥상 텃밭에선 작은 파티도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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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 조선희의 스튜디오와 같은 건물에 있는 복층 구조의 집은 조선희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와 추억이 깃든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사진가 조선희의 스튜디오와 같은 건물에 있는 복층 구조의 집은 조선희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와 추억이 깃든 물건으로 채워져 있다.

위층 서재의 나무 테이블과 죽은 나무를 이용한 스탠드 조명 역시 그녀가 목공을 배우면서 디자이너와 함께 의논해 만든 것.

위층 서재의 나무 테이블과 죽은 나무를 이용한 스탠드 조명 역시 그녀가 목공을 배우면서 디자이너와 함께 의논해 만든 것.

조선희 뒤로 보이는 이슬 맺힌 붉은 꽃잎은 90년대 말 케냐의 어느 숙소에서 촬영한 것이다.

조선희 뒤로 보이는 이슬 맺힌 붉은 꽃잎은 90년대 말 케냐의 어느 숙소에서 촬영한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아이가 훌쩍 자란 걸 깨달았어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사진가 조선희가 4년간의 한남동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새로 지은 스튜디오 건물로 이사를 결심한 건 올해로 열한 살이 되는 아들 기휘 때문이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진 스튜디오와 집이 한 건물에 있었어요. 제가 촬영을 하면 아이는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놀았죠. 하지만 그땐 집이 너무 좁았어요. 남편과 나 두 사람의 생활에 맞춘 공간이었거든요. 아이와 친정어머니까지 네 식구가 살기엔 아무래도 불편했죠.” 처음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 기휘는 “호텔로 이사 가는 거냐”며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해했다. 아파트는 넓고 깨끗했지만 적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기 힘들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논현동 언덕에 자리 잡은 ‘ZWKM’은 조선희를 포함한 네 명의 아티스트들이 함께 지은 건물이다. Z는 조선희의 조아조아스튜디오, W는 광고 프로덕션 회사 원더보이스, K는 디자인 제작사 꽃봄, M은 박명천 감독의 매스메스에이지를 뜻한다. 조선희의 집과 스튜디오는 Z동에 위치한다. 지난해 5월 스튜디오가 먼저 2층에 입주했고, 인테리어 공사가 끝난 두 달 후 모든 살림살이를 이곳 3층과 4층으로 옮겨왔다. 근사한 옥상 텃밭도 생겼다.

“나이 드니까 저도 꽃이 예쁘고 흙이 좋아요. 토마토랑 오이, 고추, 가지를 심었는데 볕이 좋아서인지 시중에서 파는 것과 맛이 확실히 달라요. 복숭아나무도 심었는데 첫해에 네 개가 열렸고요. 지난 여름에 참 잘 먹었어요.” 거실 천장이 다락처럼 사선 형태가 된 건이 옥상 텃밭으로 향하는 계단 때문이다. 높은 천장과 채광 좋은 큰 유리창을 포기하는 대신 가족들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얻었다. 아이는 요즘 매일 소풍 온 기분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의 방엔 축구공이 가득하다. 여름이면 또래 사촌들과 텃밭에서 물장난을 치고 넓은 테라스를 놀이터 삼아 뛰어놀 수도 있다. “우리 아들 말로는 예전 집은 지루했는데, 여긴 굉장히 익사이팅하대요. 물론 저도 만족하고요. 3월부터 11월까진 술 마시기 딱 좋거든요. 바비큐 파티도 열 거예요. <보그>도 한번 초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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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가 있는 서재 공간은 책장이 벽을 대신한 덕분에 탁 트인 느낌을 준다. 엽서가 잔뜩 붙은 나무 수납장은 조선희가 디자인한 ‘기억 상자’. 윗층 서재와 침실로 연결되는 계단 옆 창가로는 옥상 텃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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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도가 그려진 아들 기휘의 방엔 어릴 때부터 모아온 인형과 축구공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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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래엔 그녀가 수집해온 여러 대의 카메라가 보관되어 있다.

그녀가 수집해온 여러 대의 카메라가 보관되어 있다.

넓은 욕실은 조선희의 유일한 휴식 공간이다.

넓은 욕실은 조선희의 유일한 휴식 공간이다.

새빨간 계단 손잡이가 눈에 띄는 복층 구조의 집 아래층엔 거실과 주방, 아이 방, 어머니 방이 있고, 위층엔 모로코에서 가져온 양탄자가 깔린 부부 침실과 나무 책장이 벽을 대신한 서재가 있다. 책장뿐만 아니라 바닥은 물론 이 집의 가구와 오브제 대부분이 나무 소재다.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나무 만지는 게 좋더라고요.” 침실과 욕실에 놓인 나무 선반은 고물상에서 구한 것을 새로 손질한 것이다. 저마다 이름도 있다. 버려진 나무둥치에 전구를 꽂아 만든 스탠드는 ‘생각의 나무’다. 조선희는 책꽂이에 꽂혀 있던 노트 한 권을 꺼내 그 제작 과정과 아이디어 스케치를 보여줬다. ‘오랜 세월에서 얻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물건. 죽은 나무로 등을 만들고 싶다’는 글귀와 함께 그림이 그려진 노트엔 2015년 1월 19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조선희와 함께 전 세계를 누빈 여러 개의 가방이 진열된 나무장의 이름은 ‘기억 상자’다. “이건 이번에 이사할 때 건물 앞에 버려진 걸 주워온 거예요.” 테라스에선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은 나무 벤치들이 조선희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이다. “동백 오일을 사놨어요. 봄이 되면 한 번 더 표면을 간 뒤 색을 입히려고요. 그러면 자연스러운 맛도 살 거예요.”

집 안의 물건은 모두 조선희가 직접 만들거나 여행 중에 구입한 것들이다. 어느 것 하나 추억이 깃들지 않은 물건이 없다. 예를 들면 오래전 황학동에서 사온 떡판이 거실 테이블을 대신하는 식. “이건 진짜 오래됐어요. 90년대 말에 27만원 주고 샀어요. 당시 제겐 큰돈이던터라 기억해요.” 천으로 리폼한 좌식 소파엔 발리에서 사온 비치 타월을 덧댔고, 거실의 은색 등 역시 예전부터 써오던 것을 새로 디자인했다. 아일랜드 주방의 나무 등 역시 조선희가 디자인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국적 느낌의 푸른색 주방 타일은 실제로 터키에서 가져왔다. “20년 전 터키 화보 촬영 때 같이 간 스태프들이 나눠 짊어지고 온 거예요. 지금도 집에 놀러 오면 다들 그때 얘기하며 한마디씩 하죠. 엄청 무거웠거든요.” 곳곳에 놓인 인형들은 언젠가 인형 포트레이트 작업을 하기 위해 해외 촬영 때마다 하나씩 수집해온 보물들이다.

유명 디자이너의 값비싼 물건은 하나도 없다. 벽에 걸린 사진 액자 역시 사진가 조선희가 직접 찍은 작품들이다. “옷도 그렇고 전 그렇게 명품에 집착하는 타입은 아니에요. 물론 명품이 좋은 점도 있겠지만, 단지 명품이기 때문에 좋아하진 않아요. 아직까지는 그래요.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럴지 모르죠.” 조선희는 여름을 기다린다. 온 세상이 푸르른 계절이 되면 복숭아나무는 달콤한 열매를 맺고 옥상 텃밭에는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사람 좋아하는 조선희와 그의 친구들은 여름 향기에 취해 작은 파티를 벌일 계획이다.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이 쌓인다.

계단과 마주한 벽면엔 쿠바에서 산 액자와 아들 기휘가 그린 그림, 스승인 사진가 김중만이 선물한 사진이 걸려 있다.

계단과 마주한 벽면엔 쿠바에서 산 액자와 아들 기휘가 그린 그림, 스승인 사진가 김중만이 선물한 사진이 걸려 있다.

침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모로코 여행 중에 구입한 것.

침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 모로코 여행 중에 구입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