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도 가서 닿지 않고,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 〈피리부는 사나이〉 신하균, 유준상, 조윤희가 걸어 들어간 그림 속에서 변화의 서사가 시작된다.

피로한 붉은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온 시각. 에드워드 호퍼 그림 속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남자. 사건의 열쇠가 되는 서류를 쥐고 놓지 않는 여자. 눈빛의 흔들림조차 퍼석하게 말라버린 야간의 회합. 남자가 ‘느리게 감기’를 누른 듯 천천히 전화기를 쥐고 말했다. “준상 선배님, 8회 대본 읽어보셨어요?”

<보그> 카메라만 멈추면 작품 이야기로 수다의 꽃을 피우는 신하균, 유준상, 조윤희는 3월부터 방송되는 tvN 드라마 <피리부는 사나이> 주인공들이다. 신하균과 조윤희는 ‘위기협상팀’의 ‘협상가’로, 유준상은 커다란 야망을 품은 방송국 간판 앵커로 등장한다. 협상가와 앵커는 테러 사건, 분노 범죄, 인질극 등 연이어 발생하는 사건 속에 연루된 신원미상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쫓는다. 여기서 ‘협상가’라는 단어가 눈에 설익다. 그런 직업이 있었나? 영화 <네고시에이터>에 나오는 그 협상가일까? 한국에도 협상가가 있을까? 신하균이 대본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도 이와 같았다. 실제로 협상가가 있다면 한번 해볼 만하겠다.고,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기에 더 많이 알려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말이다.

알아본 결과 실제 협상가는 존재했다. 신하균과 조윤희는 촬영 들어가기에 앞서 위기협상팀을 만든 교수님을 만나 강의를 듣고 실제 협상이 이뤄지는 장면을 담은 영상을 보며 협상의 기술을 전수받았다. 미드와는 달랐다. 굉장히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달변가는 아니었다.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길었다. 사건을 일으킨 ‘위기자’는 결국 자길 알아달라는 메시지를 삐뚤어진 방식으로 보내고, 협상가는 정신과 의사나 상담사처럼 온 힘을 다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분노와 같은 감정을 스펀지처럼 흡수해낸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사건을 안전하게 끝내기 위해 필요한 건 바로 ‘대화’임을 두 배우는 실제 협상 영상을 통해 생생히 봤다.

“그동안 제가 상대방 얘기를 얼마나 잘 들어주고 공감했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단순히 듣는 걸 넘어서 진심으로 공감하는 건 쉽지 않거든요.” 조윤희는 <피리부는 사나이>를 만난 후 작은 뉴스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게 됐다. 대본상에서도 매회 사건이 뻥뻥 터졌다. 대본은 진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자 친구한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해 동반 자살을 기도하는 여자를 설득하는 장면이 있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여명하’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그냥 인간적이고 싶었어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함께 마음 아파하고 진심으로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신하균과 조윤희가 강추위 속에서도 협상을 위해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는 동안 유준상은 한곳을 지킨다. 앵커의 단독 무대, 방송국이다. 배우란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확고한 직업 정신을 가진 그에게 <피리부는 사나이>는 ‘좋은 이야기’였다. “우리나라는 안 되는 게 너무 많잖아요. 존재하지만 하지 않는 얘기를 이 드라마는 우회적으로 풀어내요. 배우로서는 정말 흥미롭죠. 우리가 살면서 놓치고 있는 부분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드라마예요.” 게다가 극 중에서 그는 뉴스 전달자다. 이 설정은 계속해서 그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진실한 방송을 전하는 TNN 뉴스 윤희성이었습니다” 멘트 할 때마다 현실이 오버랩된다. 왜 진실은 늘 숨어 있는 걸까. 왜 우리는 가십과 연예인 얘기만 알고 있나. 언론에서 해야 할 얘기가 왜 팟캐스트에 머물러 있나. 무뎌짐을 넘어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끔 통제되는 진실이 무섭다. “이런 얘기를 드라마로 담는 건 정말 용기예요. 제작진의 사명감이 느껴져서 구성원인 배우로서 더 용기 내어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는 작년에도 대한민국 상류층의 속물 의식을 통렬한 풍자로 꼬집은 <풍문으로 들었소> 촬영장 한복판에 있었다. “그때도 세상 얘길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역사책, 팟캐스트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유준상은 사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는 하나다. 못하게 하니까. “세상에 그런 얘기가 넘쳐나면 저까지 관심을 가질 필요 없겠죠.” 연기적으로도 유준상은 앵커 역할에 푹 빠져 있다. 매일 배우로서 하는 발성 연습이 앵커의 연습과 다르지 않다. 배우와 앵커가 가장 정확히 해야 하는 건 발음. 유준상은 ‘윤희성’을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 원래 기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릴 적 꿈도 되돌아봤다. 전생의 직업을 의심케 하는 천부적 보도 실력에는 사실 숨겨진 스승이 있다. “매일 뉴스를 들으면서 연습하다가 백지연 선배님을 찾아갔죠.(웃음) <풍문으로 들었소> 당시 선배님이 연기가 처음이라 걱정하실 때 제가 정성껏 답변을 해드렸거든요.(웃음)” 화답하듯 ‘보도의 신’ 백지연은 ‘영업 비밀’을 탈탈 털어 전수해주었다. “비법의 핵심이오? 누굴 따라 하지 말라는 것. 자기 것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 방송이 시작되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윤희성’은 분명 손석희도, 앤더슨 쿠퍼도 아닌 ‘앵커 유준상’일 것이다.

‘협상가’라는 생소한 소재보다 기대되는 건 사실 세 배우가 가진 이름 석 자의 힘이다. 세 명의 이름에서 공통된 단어를 뽑아본다면 ‘믿고 보는 배우’ 정도 될 것이다. 이 수식어는 사실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배우가 작품을 보는 눈에 의심이 가지 않는다는 것, 작품을 선택할 때 작품이 가진 의미 외에 다른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이야기를 풀어낼 배우들의 흡입력, 그렇게 해서 보장될 ‘재미’까지다. <라이어 게임>으로 이미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솜씨 좋게 버무린 바 있는 김홍선 감독과 류용재 작가가 촘촘히 펼쳐놓은 판에 베테랑 배우들은 각자의 모습을 얼마나 더 입체적으로 조각해낼 것인가. 세 명의 배우가 상대 배우에게 갖는 기대도 상당하다. 게다가 이들은 스리슬쩍 상대방을 부추겨 전에 없던 장면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다이아몬드만이 다이아몬드를 세공할 수 있듯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 무대는 오롯이 배우들만의 것이다. 신하균과 유준상은 아직 연기적으로 함께 뿜어낼 만한 장면을 촬영하기 전이니 지금 화보 촬영 현장이 이들이 펼쳐낼 연기 한판의 힌트가 될 것이다. 온몸에서 감정을 걷어내되 동작에 힘은 장착해달라는 요구에 따르는 배우들의 움직임은 마치 무언극의 한 장면 같았다. 세 번의 불발을 거쳐 드디어 한 작품에서 만난 조윤희와 신하균은 시너지라는 능력치를 레벨 끝까지 끌어올리는 중이다. 사실 조윤희는 신하균의 무서운 몰입도 때문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제가 하균 오빠를 제압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액션스쿨에서 합을 맞추고 갔는데 슛이 들어가니 하균 오빠가 상황에 너무 몰입해서 팔에서 힘을 빼지 않는 바람에 광대뼈랑 코를 얻어맞았다니까요. 하균 오빠는 슛 들어가면 이성이 사라져요.”

신하균은 이번에도 변명하지 않고 연기에 대해 말을 아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본에 적혀 있는 걸 잘 표현하자는 주의예요. <피리부는 사나이>는 한 인물을 깊이 파고드는 드라마가 아니라 다양한 등장인물이 쌓여서 드라마가 완성되는 작품이에요. 작가님이 워낙 대본을 잘 쓰셔서 캐릭터만 잘 표현해내면 돼요. 부담은 ‘아주 조금’ 덜하죠.”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 그의 몸에는 작은 스위치가 생긴 것만 같다. 누르는 순간 타임머신보다 빠르게 작품 속 설정으로 빠져들어 캐릭터라는 옷을 순식간에 갈아입게 만드는 스위치.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 퇴치 비밀 병기로 물파스를 들고 씩 웃을 때부터 최근 <빅매치>에서 사람을 가지고 게임을 벌이거나, <미스터백>에서 우연한 사고로 70대 노인이 30대로 젊어지거나, 권력을 두고 피바람 부는 싸움을 벌이는 <순수의 시대>까지 신하균의 ‘쓰임’은 실로 다양했다. 광기와 순수함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배우는 신하균이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기에 어떤 말을 더할지 몰라 선배님이 들려주셨다는 “배우는 시대의 얼굴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한다. “어릴 때 들은 말 중에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얘기예요. 배우도 나이 먹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잖아요. 제가 살아온 만큼 우리 사회를 보며 하고 싶은 이야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픔과 문제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 안에서 끄집어내 시청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예나 지금이나 신하균에게는 다양한 역할이 들어오는데 최근에는 아버지 역할이 추가됐다. 신하균의 다음 작품은 루저가 된 대학 친구들 이야기 <올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와 닿았던 이야기이자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멜로’는 신하균을 비껴간다.

조윤희에게 연기는 이보다 조금 더 힘들게 찾아온 재미다. 1999년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어 이수영의 ‘I Believe’ 뮤직비디오에 등장했을 때 우리는 또 한 명의 청춘스타 탄생을 예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열아홉 살 소녀에게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배우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인지 확신하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재미는 넝쿨째 굴러왔다. “‘넝쿨당’에서 방이숙 역할을 맡고 처음으로 연기가 재미있었어요. 자신감이 생겼고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도 생겼어요. 제가 가장 잘 알잖아요. 그전까지는 제가 무슨 매력을 가졌는지, 뭘 잘하는지 몰랐어요. 늘 두려웠죠.” 이성적이기만 하던 성격도 조금씩 유연하게 바뀌었다.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같은 장르물부터 사극 <왕의 얼굴> <조선마술사>까지. 조윤희는 이제 어떤 캐릭터도 담아낼 수 있는 얼굴이 됐다. 평소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인스타그램도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속에서 그녀는 카페, 마트, 공원에 주로 출현한다. 게시물 하나 빼고 모두 노 메이크업 상태라는 건 방점. “흠, 그런데 피곤하고 우울해 보인다는 댓글이 자주 달려요. 저는 기분 좋으니까 사진을 찍어서 올린 건데 말이에요. 저, 뭐 잘못했나요?”

그림을 그리고 작사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글을 쓰고 뮤지컬 무대에 오르느라 항상 분주한 유준상이 유일하게 하지 않는 게 있다면 SNS일 거다. 그는 <피리부는 사나이>를 촬영하는 동시에 일주일에 세 번 <프랑켄슈타인> 무대에 서고 있다. 그냥 뮤지컬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다(그는 20년 연기 생활에서 가장 힘든 작품으로 <프랑켄슈타인>을 꼽아왔다). 무대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기에 꾸준히 체력을 관리해왔지만 얼마 전 그의 허리도 탈이 나고 말았다. 단순히 가방을 줍다가 삐끗 일어난 일이다. 결국 그는 복대를 차고 무대에 오르고 있다. 강우석 감독과 홍상수 감독으로 상징되는 작품, 가족극과 풍자극을 오고 가는 드라마까지. 유준상은 어떤 상황에서든 100g의 심각함과 진지함을 덜어내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는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여왔다. 최근 몇몇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수로서 열정을 밝혀 그의 멀티 능력이 새삼 화제가 되고 있지만 유준상의 관심사는 마치 하나의 원처럼 완벽하게 이어져 있다. “뮤지컬을 하니까 음악을 떼려야 뗄 수 없고, 여행 좋아해서 여행 다니고, 여행에서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어서 그리고, 일지는 20년 넘게 써왔어요. 배우니까 이것저것 관심을 가져보는 거예요. 정치, 사회, 역사도 마찬가지고요. 모두 좋은 감성을 만들어내 좋은 연기를 하고자 함이에요. 이런 관심이 떨어지면 앞으로 힘들어지겠죠.” 에너자이저가 텍사스 소 떼처럼 몰려와도 아직까지 유준상을 이기긴 힘들어 보인다. 2년 뒤 나이 50이 될 걸 떠올리면서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더 좋은 시선으로 봐주지 않을까요? 저 나이에도 저렇게 활동하다니! 으흐흐” 유준상의 차기작은 뮤지컬 <그날들>과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 속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사진이라는 순간 속에 남았고 촬영은 모두 끝이 났다.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남긴,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처럼 셋은 다음 촬영을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도시의 햇빛은 빈방의 빛이 됐고 침묵은 그늘의 어둠으로 변했다. 아무도 소통하지 않는 지금, 피리 부는 사나이는 무슨 말을 건네려는 걸까. 그 앞에 선 우리가 할 일은 귀를 기울여주는 일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