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가에 등장한 초판본의 인기

서점가에 등장한 초판 복간본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예뻐서 샀을 뿐인데 그 안에 작가와 시대의 사연이 담겨 있다

서점가에 등장한 초판 복간본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예뻐서 샀을 뿐인데 그 안에 작가와 시대의 사연이 담겨 있다.

처음 빛바랜 표지의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를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발견했을 때만 해도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0만 부가 팔려 나갔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김소월 <진달래꽃>, 백석 <사슴>이 등장했다. 초판본 필사 시리 즈가 나왔으며, 한용운 <님의 침묵>, 노천명 <사슴의 노래>가 예약 판매를 기다리고 있다. 몇몇 출판사가 초판 복간본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하나의 획기적인 성공 사례가 나오면 순식간에 다른 듯 비슷한 책을 찍어내는 우리나라 출판계가 초판 복간본을 만드는 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

많은 전문가와 매체가 분석했듯 초판 복간본의 벼락 인기는 ‘소장욕’과 ‘SNS 과시욕’에 기인한다. 읽기 위해서만 구입하는 게 아니다 보니 세로 읽기와 한자, 100여 년 전 한글 표기 법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팬시용품처럼 구입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그동안 학술적 필요나 충성 독자들의 간절한 요청, 검증된 작품으로 안정적인 매출을 노리 는 출판사의 전략으로 절판본을 복간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수집가나 마니아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초판 복간본을 구매하여 하나의 독서 트렌드를 형성한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이례적인 열풍의 출발점인 소와다리 출판사 김동근 대표는 “국어국문학과 학생 들과 교사들에게 초판 복간본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걸 이미 어느 정도 확신했고 이들이 좀 더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9,800원이라는 가격을 책정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출판사의 배려와 전략은 결과적으로 대중의 마음을 얻었다. 큰 관심이 없어도, 어딘가 일부러 찾아가 지 않아도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게 된 초판 복간본은 충성 독자와 일반 독자 사이 간극을 좁혔다.

마니아형 독자가 많고 중고 서점 문화가 일상 속에 자리 잡힌 일본의 경우 초판 복간본보다 는 초판본 자체에 대한 수요가 큰 게 사실이다. 초판 복간본이라면 토시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재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쓰메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1905년 초판 복간본이 한시적으로 소량 판매된 적이 있다. 당시 영국의 ‘아트 & 크래프트 디자인’에 감흥을 받은 작가가 디자인이 정말 아름다운 책을 내놓아 후세 독자들의 애간장을 태운 바 로 그 책이다. 재미있는 건 당시 제본 기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2페이지가 붙은 채 판매 되었는데 그 상태까지 재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초판 복간본에 대한 마니아 독자의 기대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애정과 사명감이 초판 복간본을 부활시킨 경우도 있다. 여행하는 그림 작가로 유명한 체코 미로슬라프 사세크의 <This is… 시리즈>는 1959년 출간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시 간이 한참 흐른 후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내놓았는데 초판본보다 디자인이 못하다는 평가 가 줄을 이었다. 초판본의 광팬이었던 편집자이자 문필자 마쓰우라 야타로는 아쉬움에 직 접 나섰다. 판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이 수집한 초판본을 가지고 초판본 에 가장 충실한 복간본을 만들었다. 그 완성도가 웬만한 출판사보다 높아서 독자들 사이에 서 화제가 됐다. 1984년에 출판된 <소년민예관(小年民藝館)>의 경우는 ‘필요’에 의해 복간 된 경우다. 세계 각국의 일상 생활용품의 아름다움을 솜씨 좋게 담아내 아동 서적이었음에 도 어른들이 더 갖고 싶어 하는 책이었다. 절판된 후 초판이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격으로 거 래되었는데 이조차 팔려는 사람이 없어 구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2011년 다른 출판사가 판권을 구입해 기존 판매가보다 더 비싸게 가격을 책정해서 내놨다. ‘이런 좋은 책은 계속해 서 유통되어야 한다’는 것이 출판사가 밝힌 출판 의도였다. 경제 논리보다는 사명감으로 이 루어지는 일이 출판계에는 아직 존재한다.

전자책 문화가 일찍 자리 잡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앞으로 독자들이 구매하는 책은 ‘전자 책’과 ‘소장하고 싶은 소량의 양서’로 양극화될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종이책이든 전자책 이든 읽고 나서 정말 좋았던 책은 독서의 참된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방향에서 다시 한 번 소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사 크리스트의 <ABC 살인사건>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 다면, 1936년 초판본을 2006년에 붉은 하드 커버로 복간한 책을 사서 친구에게 선물하 는 식이다. 이런 확실한 수요는 초판 복간본에 대한 틈새시장을 형성했다. 애비북스(www. abebooks.com)에서는 초판본부터 시작해 다양한 커버 아트, 온갖 리미티드 에디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종이, 타이포그래피 등을 하나하나 신경 써서 책을 예술 작품 수준으로 리디자인하는 영국의 폴리오 소사이어티(The Folio Society) 같은 출판사가 꾸준히 사랑 받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금은 모든 권리를 다른 출판사에 넘겼지만 19~20세기 미 국 고전소설 초판본을 크기, 무게, 종이, 폰트, 더스트 재킷은 물론 오타까지 재현해 30달러에 판매한 출판사 퍼스트 에디션 라이브러리(First Edition Library) 의 시도 역시 책이 가진 물성을 제대로 존중한 사례였다.

다가오는 4월, 영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SF 드라마 <닥터 후> 소설판 초판 복간본은 디지털과 동시에 발매 예정이다. 1970년대 아이콘과 같은 크리스 아킬레오스(Chris Achilleos)의 오리지널 일러스트가 종이로, 리 더기 화면으로도 살아나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가 가장 잘 살아 있는 초판 본을 만나는 일은 이토록 간편해졌다. 그 안에서 시대상을 읽어낼 것인가, 소장 욕구를 충족시킬 것인가. 특별히 마음먹거나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작가의 진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