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아이템

씨 나우, 바이 나우!

2016.04.04

by VOGUE

    씨 나우, 바이 나우!

    더 강력해지는 SNS의 영향력, 무법천지 패스트 패션의 카피 범람, 계속되는 경기 불황. 이런 상황에서 하이패션이 속도전에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더 강력해지는 SNS의 영향력, 무법천지 패스트 패션의 카피 범람, 계속되는 경기 불황. 이런 상황에서 하이패션이 속도전에 사활을 걸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런던 패션 위크 중 조니 코카가 디자인한 백과 슈즈를 보기 위해 켄싱턴 처치 스트리트의 멀버리 쇼룸을 방문했다. 빛의 속도로 컬렉션(여자들이 탐낼 만한)을 둘러본 후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동안 PR 담당자 로즈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죠, 이번 버버리 쇼는 어땠어요? 우리도 지금 당장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요즘 새로운 패션 스케줄이 워낙 큰 이슈라서. 미디어 쪽은 어떤 입장인가요?” “글쎄, 촬영 샘플을 미리 받을 수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간단히 답했지만 이보다 단편적이고 이기적인 대답은 없을 것이다. 몇몇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기존 패션 위크 스케줄을 따르는 대신 ‘고객 유대적인’ 컬렉션을 발표하겠다고 선언한 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였지만, 이미 패션계는 이 ‘반란’을 매우 진지한 태도로 검토하고 있었다.

    “오늘날 바이어들은 1년 예산의 70~80%를 프리 컬렉션에 씁니다. 그러니 3월 런웨이에서 선보인 메인 컬렉션 몫은 적어질 수밖에요. 게다가 이 옷은 빠르면 7월, 늦으면 9~10월이 돼야 매장에 도착합니다. 미국의 경우 10월 추수감사절 직후에 세일을 시작하니, 메인 컬렉션 룩이 정상가로 판매되는 기간은 평균 8주밖에 되지 않아요. 우리가 메인 컬렉션 발표를 3월에서 1월로 당기면 정상가로 판매되는 기간이 넉 달 정도 늘어나는 셈입니다.” 베트멍은 지난 2월 5일을 전후로 버버리, 톰 포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패션쇼 모델 도입을 선포했다. 베트멍의 사업 운영을 담당하는 후람 바잘리아(버버리에서 경력을 쌓은 뎀나의 동생)는 디자이너들이 프리 컬렉션을 발표하는 1월에 남녀 통합 봄 컬렉션을 선보이고 2월부터 제품 판매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를 위해 생산은 전부 사전 제작으로 진행되며, 따라서 모든 제품은 한정판, 각 매장별납품도 단 1회로 끝낸다는 것(재주문도 불가하다).

    버버리와 톰 포드, 타미 힐피거는 기존 패션 위크 기간에 쇼를 선보이지만 다른 레이블이 전통 방식에 따라 6개월 후에 입을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과 달리, 그 시기에 맞는 ‘제철’ 컬렉션을 발표하고 쇼 직후에 매장에서 바로 살 수 있게 조치할 예정이다. 버버리와 톰 포드는 9월 쇼부터, 타미 힐피거는 9월 지지 하디드와의 캡슐 컬렉션을 시작으로 2017년 2월부터 이 방식을 시도한다. 영향력 있는 이름들이 중대 발표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 움직임에 동참(혹은 시도)하는 크고 작은 이름들이 슬그머니 줄을 섰다.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슬립 드레스와 런웨이 룩의 캡슐 컬렉션), 마이클 코어스(런웨이 룩 일곱 벌, 가방과 신발 각각 두 스타일), 프로엔자 스쿨러(룩 여섯 벌과 하바 백으로 구성된 ‘얼리 에디션’), 코치 1941(로그 백), 프라다(피오니에르, 까이에 백), 파코 라반(쇼 전날 패트릭 드마쉴리에의 광고 이미지로 공개한 런웨이 룩 네 벌) 등등. 다들 신중하게 선택한 그 시즌의 대표 아이템을 쇼 직후 온라인 또는 주요 오프 매장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반항아들이 별문제 없어 보이던 상황에서 봉기한 이유는 뭘까? 변화를 시도하는 이들이 얻으려는 건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앞서 말한 대로 정상가로 판매되는 기간을 늘리고 두 번째, 컬렉션이 공개된 다음 진품이 팔리기도 전에 패스트 패션 브랜드의 모방 제품이 먼저 팔리는 걸 막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새 컬렉션을 본 직후 소비자들의 충동구매를 부추겨 매출을 올리려는 것.

    세 번째 목표의 가능성은 오랫동안 지속된 경기 불황에도 제레미 스캇의 모스키노 캡슐 컬렉션이 거의 매번 완판을 기록하며 입증한 바있다. 젠체하는 듯 보이지만 성실하고 시류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스캇 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좋아요’를 누르는 제 인스타그램 팬들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죠. 그들은 ‘좋아요’를 누름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쇼핑할 수 없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번 뉴욕 패션위크에서 레베카 밍코프는 작년 9월에 선보인 봄 컬렉션을 재정비하고 실제 소비층을 초대해 ‘고객 유대적인 제철’ 쇼를 선보였다. 쇼 직후 2주 동안 밍코프의 뉴욕 플래그십 스토어는 역사상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인 2015년 2월 매출과 비교해 무려 221%가 성장한 것. 밍코프는 자신조차 이 정도로 성공할 줄 몰랐다며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6개월 후에나 입을 수 있는 것보다 당장 입을 수 있는 컬렉션에서 비롯된 흥분과 설렘은 어떤 망설임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던 거죠.”

    이 정도면 스케줄 이동을 지지하는 디자이너들이 실제 컬렉션 룩을 살 수 있는 시기와 동떨어진 이벤트에 과도한 돈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고 불평할 만하다. 이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매장에 새 제품이 입고되는 시기에 판매율이 치솟기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푸념한다. 기존 스케줄대로 런웨이 룩이 매장에 배송된다면 SNS를 통해 그 옷을 봐온 소비자들이 느끼는 식상함은 6개월 전에 그 옷을 바잉한 바이어와 6개월 동안 컬렉션 룩을 실컷 찍어댄 패션 에디터들 못지않다고 호소한다. 니만 마커스 백화점 패션 디렉터 켄 다우닝은 얼마 전, 신상품 배송 차량이 도착하자마자 1만1,000달러짜리 자수 재킷을 꺼내 고객에게 보여준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옷을 보여주자 그녀는 콧잔등이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심드렁하게 한마디 던졌다. “뭐, 새로운 거 없어요?” 다우닝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직전에 도착한 거였다고요!” 그렇지만 작년 10월 부터 SNS에 그 룩 사진이 떠돌았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상당수가 이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단호하게 팔짱을 끼고서 ‘어림없다’는 보수적 태도로 일관하는 무리 또한 적지 않다. 그 이유는 뉴욕 패션 위크를 운영하는 CFDA가 지난해 말 유명 컨설팅 그룹에 새로운 패션쇼 시스템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반면, 밀라노와 파리 패션 위크를 담당하는 이탈리아 국립패션상공회의소와 파리의상조합협회는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했기 때문(버버리를 무시할 수 없는 영국패션협회는 패션 위크 직후 대중을 위해 ‘런던 패션 위켄드’라는 압축적인 패션 행사를 진행하는 중도적 대안을 택했다).

    크리스찬 디올, 샤넬 패션, 생로랑, 에르메스의 임원들로 구성된 파리의상조합협회 대책위원회는 CFDA의 뒤를 이어 이 방식을 검토했고 협회장 랄프 톨레다노는 기존의 쇼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그 외 케어링 소속 브랜드, 니나 리치, 랑방, 메종 마르지엘라, 겐조, 드리스 반 노튼, 이자벨 마랑 등도 같은 의견). 같은 입장을 표명한 케어링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는 “기다림이 제품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킨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시스템은 “마케팅에 의해 운영되는 회사를 위한 것”이라는 맹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톨레다노 협회장은 실질적으로 스케줄을 바꾸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프랑스 패션 하우스의 특성상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원단 제작에만 몇 주가 걸립니다. 그걸 바느질하고 장식하는 데 또 몇 주가 걸리죠. 게다가 디자이너들에게 컬렉션을 완성한 다음 넉 달 동안 그대로 놔두라고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탈리아 국립패션상공회의소 회장 카를로 카파사는 “패션쇼와 배송 시기의 시간 차는 디자이너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길 원한다면 적절한 제작 과정에 비례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소비자들은 창의적이고 완성도 높은 제품은 시간이 걸린다는 걸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기꺼이 기다릴 의사도 있죠.”

    그리고 에디터와 바이어들은 엄밀히 말해, 이 역변의 상황에서 다소 수동적인 위치를 점한다. 제철 쇼를 하는 디자이너들은 대중에게 런웨이 쇼를 선보이는 한편, 기존 방식대로 에디터와 바이어들을 다음 컬렉션의 프레젠테이션 장소로 은밀히 초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모두들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은밀히’ 보여준다고 해서 ‘극비’가 과연 얼마나 잘 유지될지에 대해 가슴 깊은 곳에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디지털 세상에 누설되지 않는 절대 비밀이 존재할 수 있을까(몰래 유출한다 해도 입국 금지나 ‘철컹철컹’될 법적 조치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지켜진다 한들 그건 디지털 시대를 철저히 역행하는 태도다. 영국 <보그> 편집장 알렉산드라 슐만은 브랜드가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더 많은 소비자와 소통할수록, 컬렉션 엠바고를 더욱 강화할 거라고 경고한다. 소셜 미디어와 친숙한 프레스들의 손발을 묶고 소셜 미디어가 일궈낸 신속성과 자발성을 구속할 거라는 것.

    그리고 꽤 눈치가 빠른 편이라면, “새로운 쇼 방식이 ‘중개인’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소비자와 소통하는 획기적인 방식”이라는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아챌 것이다. 소비자들은 최초로 공개된 컬렉션에 흥분해서 스마트폰 카메라로 미친 듯이 찍어대겠지만, 여전히 바이어와 에디터 무리는 지난 6개월 동안 그 룩에 익숙해져 있다(지금까지 늘 그랬듯). 오히려 전문가 무리와 긴밀한 시간을 가진 디자이너와 브랜드는 바이어들이 사지 않거나 에디터들이 좋아하지 않는 룩을 완전히 걸러내어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히 여과된 결과물을 소비자들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뉴욕의 대표적인 패션 PR 회사 ‘PR 컨설팅’의 설립자 피에르 루지에는 이를 심하게 비판한다.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죠. ‘고객 유대적’인 쇼란 결국 매장에서 팔리지 않을 옷은 볼 수 없다는 뜻이에요. 소비자들은 매장이 원하는 옷을 보게 되는 거고, 컬렉션의 중심이 디자이너가 아니라 소매업체가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기존 런웨이 컬렉션에서 평균적으로 생산에 들어가는 옷은 20~30%에 지나지 않는다. 루지에는 런웨이 쇼에서 창의성은 줄어들고 상업성이 강화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변화에 신중한 입장인 이들이 걱정하는 또 한 가지는 극대화될 패션계의 빈부 격차다. 자가 공장과 자재 공급처를 가진 대형 브랜드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지금도 운영이 쉽지 않은 소규모 레이블과 독립 디자이너들이 유동적인 스케줄과 소량 생산을 받아줄 공장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영국 <보그>의 패션 디렉터 루신다 챔버스는 작은 레이블의 생사를 걱정한다. “대형 브랜드만 살아남는다면 우리의 삶도 사라질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건 재능 있는 신인들이니까요.” 각자의 입장과 분분한 해석에 대해 알게 된 지금, 다시 멀버리 쇼룸 엘리베이터 앞으로 돌아가더라도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크게 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우물쭈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스템이 가져올 장단점은 절대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순위를 매길 수 없으니 말이다.

    1999년 헬무트 랭은 밀라노와 파리 시즌보다 앞서 뉴욕에서 컬렉션 쇼를 선보여 뉴욕 패션 위크를 패션 위크 시즌의 마지막에서 시작으로 옮겨버렸다. 2002년 요지 야마모토는 패션 위크의 복잡함을 피해 오뜨 꾸뛰르 기간에 쇼를 선보였지만 단발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CFDA의 의뢰를 받은 보스턴 컨설팅 그룹의 조사 결과는 허무하게도 지금 디자이너들이 시도하고 있는 두 가지 방식(소비자를 위한 제철 컬렉션과 바이어, 에디터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동시에 진행하거나 컬렉션 룩의 일부만 쇼 직후에 판매하는 방식)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내용이었다. 패션계는 한동안 혼돈의 시기를 겪거나 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과거에 안주할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에디터
    송보라
    포토그래퍼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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