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어느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

2016.04.04

by VOGUE

    어느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습니다.” 미국에서 유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수많은 매체와 패션지의 찬사를 받은 책 〈나쁜 페미니스트〉. 화제의 중심에 선 저자 록산 게이를 만났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습니다.” 미국에서 유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수많은 매체와 패션지의 찬사를 받은 책 〈나쁜 페미니스트〉. 화제의 중심에 선 저자 록산 게이를 만났다.

    록산 게이(Roxane Gay)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그가 2014년에 발표한 <나쁜 페미니스트>는 “단연 선구적이다” “매우 독보적이다” “깜짝 놀랄 정도다”라는 찬사를 받으며 평단과 대중 속으로 한달음에 파고들었다. 이 현상을 두고 <타임>지는 “올해는 록산 게이의 해”라고 선언했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아마존 올해의 책, 아마존 페미니즘 1위, <뉴욕타임스> 베스트 셀러에 오르며 록산 게이를 일약 ‘스타덤’에올렸다.

    베스트셀러 작가 록산 게이를 알게 된 건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이라는 테드 강연을 통해서였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의 숱한 규범과 규칙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소신이 있다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강연에 압도당했고, 여러 번 ‘다시 보기’ 했다. 그녀의 눈빛, 어조, 무엇보다 그의 메시지에 매료당했다. 오랫동안 내 안을 휘감고 있던 질문, “너는 페미니스트인가?”가 떠올랐고 동시에 그 질문 앞에서 우물쭈물 망설이던 내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프>와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며 페미니즘을 통해 세상의 불공평함을 해결하려고 했다. 성차별에 관해 열렬히 발언하고, 글을 쓰고, 논쟁을 벌였다. 엄마로서 육아에 매진하면서도 피부 노화를 걱정하고, 예쁘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며, 다양한 원피스를 옷장 가득 가지고 있다. 그런 내게 록산 게이가 말을 걸어준 것이다. 너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그러니 함께 바꿔가자고 말이다. 나는 그의 책을 한국에 소개하겠노라 마음먹었다. <나쁜 페미니스트>의 한국어판은 이렇게 출간되었다.

    <나쁜 페미니스트>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보그>를 읽는다. 비꼬거나 비판하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고 그냥 좋아서 읽는다. 나는 트위터에 안나 윈투어의 <보그> 뒷이야기를 그린 <셉템버 이슈>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겉으로는 그런 증거가 보이지는 않겠지만 명품 신발과 가방과 그에 맞춰 입을 옷으로 가득한 커다란 옷방에 판타지를 갖고 있다. 나는 드레스를 좋아한다.” 그의 이 문장은 해방적이다. 록산 게이는 양성평등을 지지하지만 페미니스트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여성에게 새로운 출구를 마련해줬다. 핑크색을 좋아해도, 전업주부이더라도, 패션지를 즐겨 보더라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하며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언어를 갖게 해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 많은 연대가 가능해졌다.

    입체표지 (1)

    <나쁜 페미니스트>

    번역본을 받자마자 나는 꼬박 하루 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읽어댔다. 신통한 글이었다. 에세이와 비평을 자유자재로 종횡하며, 슬픔과 유머가 오차 없이 병렬되며, 각을 세우면서도 결코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갖추고 있었다. 노래 가사에 담긴 여성 혐오, 여자캐릭터는 호감만 연기해야 하는 현실, 남배우는 없어도 여배우는 존재하는 남성이 기준이 된 사회, 유명하고 매력적인 남자라면(숀 펜처럼) 어떤 잘못도 용서하는 문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젠더를 ‘연기’해야 하는 여자들. 저널리즘이 하지 못하는 걸 트위터가 대신하는 사회 등 한국 문화와 흡사하다. 특히 흑인 여성이라는 렌즈로 포착된 ‘마이너리티’의 관점은 큰 자극을 던져준다. 즐거움과 감동을 준 <헬프> <장고> <노예 12년> 이백인의 시각으로만 그려진 대단히 문제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노르웨이 오슬로 테러 사건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죽음을 교차하면서 쓴 글은 철학적이면서도 시적이다.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뻐근해지기도 했고,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통쾌감과 해방감도 밀려왔다. 우리와 세상을 비극과 희극을 섞은 적절한 조도 아래서 성찰하게 만드는 재능이라니! 그리고 너무나도 근사한 유머감각이란!

    <나쁜 페미니스트>는 사적인 글쓰기의 힘을 보여준다. 이 책의 빼어남은 추천사에 언급되었듯 모든 문장에 저자가 개입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고 나면 ‘록산 게이 언니’를 찾고 싶어진다. <가디언>지가 표현했듯 “고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해서 듣고 싶은 목소리”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문제를 시작으로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차별까지 포괄적인 이야기로 나아가지만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라는 유명한 전언처럼,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삶에 관한 아름답고도 따뜻한 이야기다. 록산 게이는 일정이 매우 바빴는데도 “한국 독자를 꼭 만나고 싶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재치와 영민함이 가득 담긴 충실한 답변을 보내왔다. 미국과 한국이 교차하는 오늘날 여성의 삶이 인터뷰에 생생하게 녹아있다.

    VOGUE KOREA(이하 VK) 당신의 특별한 글은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와 인종 등 광범위한 분야의 날카로운 관찰과 지적이 인상적이다. 그동안 잘못 생각한 지점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당신의 글을 한국에 소개하게 되어 영광이다.
    ROXANE GAY(이하 RG)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표현해주시니 나에게 큰 힘이 된다. 내 책이 멀리 한국의 독자들까지 만나게 되다니 나 또한 설레고 흥분된다.

    VK 테드 강연 ‘나쁜 페미니스트의 고백’을 보고는 친구에게 외쳤다. “이럴 수가! 어떻게 10분 만에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버릴 수 있지?” 그 매력의 비밀을 알고 싶다.
    RG 나 자신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사실 대중 앞에서 말하는 건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무대에 올라갈 때마다 계속 이렇게 주문을 외운다. “크게 망치지만 말자.” 아마도 그 부족함과 어설픔이 내 매력이 아닐까. 하하. 하지만 내가 믿고 있는 바에서만큼은 강한 열정을 갖고 있고 그 진심이 듣는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VK 어떤 계기로 페미니즘에 눈뜨게 되었고 서로의 다른 생각과 태도를 끌어안기 위해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나?
    RG 30대 초반에야 페미니즘을 받아들였다. 그즈음 젠더 불평등을 제대로 표현하고 주장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흑인 여성으로서 주류 페미니즘에 내 자리를 찾기가 어렵다고 느끼면서 어떤 매체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미국의 주류 페미니즘은 전통적으로 중산층이나 상류층 백인 여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운동이었다. 만약 그것이 좋은 페미니즘이라면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였다. 그리고 나는 페미니스트인 동시에 온갖 모순과 약점으로 가득한 인간이기에 약간의 조롱이 섞인 말이기도 하다. 나도 가끔 저급한 가사가 담긴 팝음악을 듣고 로맨틱 코미디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잔디 깎기, 벌레 처치하기, 자동차 관리는 모름지기 남자가 할 일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 말이다.

    VK 몇몇 지인들에게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의미일 것 같아?”라고 물은 적이 있다. 대부분은 매우 공격적인 페미니스트가 연상된다고 말했다. 독자들의 첫 반응은 어땠나?
    RG 페미니스트라는 호칭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많은 이들이 페미니스트에 관하여 이상한 편견과 그릇된 개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페미니즘 운동을 하며 사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이러한 그릇된 개념과도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독자들은 마음을 열고 나쁜 페미니스트를 받아들였고 내 책과 나의 생각에 기회를 주었다. 그중에는 페미니스트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시는 분도 있었다.

    VK 한국에서도 페미니즘은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말도 등장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양성평등을 지지합니다.”
    RG 사람들은 소속되지 않고 홀로서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가 붙을 때 따라오는 사회적 반응과 부정적인 영향을 두려워한다.

    VK 유난히 여성스러운 옷을 입을 때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의 책을 읽고 자신감을 얻었고 이제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네, 저는 페미니스트입니다.”
    RG 책을 발표하고 나서부터 확실히 내 관점에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자유롭게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내 책이 받은 호평과 반응을 떠올리면 절로 힘이 나기도 한다.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더 당당하게 페미니즘을 주장할 수 있다.

    VK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90년대에 강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들해지며 여성학 관련 강좌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근래 페미니즘 저서가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미국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왜 페미니즘이 다시 이슈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RG 모든 세대의 여성은 인생을 살아가다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이 사회의 2등 시민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이 상황에 지쳐버린다. 2016년이라 해도 여전히 불평등이 넘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페미니즘이 다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지 않는다. 가정에서의 책임도 불균형적이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여성의 신체 또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다. 그냥 조용히 있기에는 너무 많은 불평등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내기로 한 것이다.

    VK 한국에서는 부모의 성을 같이 쓰는 캠페인이 일어난 적도 있다. 2005년에는 호주제를 폐지했다. 미국에서는 결혼하면 보통 남편 성을 따르는데, 미국 여성들이 반대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는가?
    RG 대부분의 미국 여성들은 계속해서 남편의 성을 따르고 있고 내가 알기로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한 캠페인이 벌어진 적은 없다. 아마도 미국 페미니즘에서 남편 성을 따르는 것은 그리 절박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결혼한다면 내 성을 지키거나 내성과 남편 성을 같이 쓰고 싶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다른 여성의 선택을 판단하지는 않으려 한다.

    VK 한국에서도 ‘여성 혐오’에 관련된 문제가 많다. ‘된장녀’라는 단어도 있고, 심지어 ‘엄마충’ ‘맘충’이라는 해괴한 단어까지 등장했다. 여성이 화려하게 꾸미거나 짧은 스커트를 입으면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서라고 가정해버린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너무도 쉽게 타깃이 된다.
    RG 모든 분야에서 왜 어떤 식으로 여성에게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이 사회는 여성에게만 부당할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따르지 못할 경우 거세게 비난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만있지 말고 저항해야 한다. 여성 혐오는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쉬운 대답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건 없다. 이건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면서 답을 하나씩 찾아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VK 2015년 세계 성 평등 지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145개 국가 중 111위다. 한국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60%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야만 한다. 출산율은 220위로 세계 최하위에 가까웠다. 한국에서 결혼과 양육은 더 힘겨운 일이 되고 있다. 미국은 어떤가?
    RG 거의 비슷한 형편이다. 일반적인 여성, 말하자면 백인 여성은 백인 남성의 78%의 임금을 받는다. 이 비율은 여성의 인종과 민족성에 따라 달라지는데 흑인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63%, 라틴계 여성은 54%밖에 되지 않는다. 무척 속상한 일이다. 결혼에 관해서라면 점점 더 많은 여성이 결혼을 미루고 커리어에 집중하고 있다. 또 결혼하지 않아야 경제적인 독립이 유지되기 때문에 독신을 고집하는 여성도 많다. 최근 레베카 트레이스터의 <모든 싱글 여성들(All the Single Ladies)>이란 책이 출간되었는데 미국 문화에서 싱글 여성의 부상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VK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가 남녀 성비가 동등한 내각을 구성하면서 이야기했다. “2015년이니까요.” 여성 정치가가 내각의 반수를 차지하는 그날이 더 빨리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RG 저스틴 트뤼도처럼 일하는 리더가 많아져야 한다.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평등을 만들어내야 한다. 성비가 더 이상 문제가 안 될 때까지 계속 동등한 성비를 요구해야한다. 세상에는 주어진 분야에서 어떤 일이든 해낼 능력이 있는 여성으로 가득하다. 그들이 각광받아야 할 때가 왔다.

    VK 당신처럼 말이다. 당신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네 살 때부터 글을 썼다고 들었다.
    RG 온전한 자유다. 글 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 만큼의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VK 글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당신의 탁월한 유머 감각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RG 나는 특히 논픽션에서 매우 심각한 주제를 다룬다. 이때 유머를 사용하면 정체성과 차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기를 꺼리는 독자들이 내 글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쓴 약을 삼키게 해주는 한 수저의 설탕이라고나 할까.

    VK 번역가가 당신의 원고를 보내주며 흥분된 목소리로 꼭 같이 읽고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글이 놀라울 정도로 특별해 혼자 읽기는 아까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상적인 독자가 있었나?
    RG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에 매번 놀란다. 책 홍보나 낭독 행사에 가면 특히 젊은 여성들이 이 책에 열광하면서 구구절절 공감하며 읽었다고 고백한다. 나와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 하고 자신의 몸의 일부에 사인을 해달라고도 한다. 나로선 모두 그저 신기하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VK 결국 행복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모두가 행복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있다. 당신이 정의하는 행복이란?
    RG 실은 나도 끊임없이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중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내 모습 자체로 인정받는 것이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윤경(출판사 사이행성 대표, 전 피처 에디터)
    에디터
    윤혜정
    포토그래퍼
    COURTESY OF ROXANE GAY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