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으로서의 걸그룹

젊은 시인 서효인은 야구만큼이나 걸그룹에 관심이 많다. 그가 ‘만년 대리’ 같은 몇몇 걸그룹의 무대를 보며 이들의 성공, 아니 생존을 응원하는 이유.

젊은 시인 서효인은 야구만큼이나 걸그룹에 관심이 많다. 그가 ‘만년 대리’ 같은 몇몇 걸그룹의 무대를 보며 이들의 성공, 아니 생존을 응원하는 이유.

가수 또한 돈을 벌고 생활을 영위하는 수단, 즉 직업의 일종이라고 볼 때, 걸그룹은 오늘날 가장 활발하게 일자리를 창출하는 영역이다. S.E.S, 핑클, 베이비복스 등 일본식 소녀 그룹 형태의 아이돌이 등장한 후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걸그룹은 K-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시작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였을 것이다. 이 두 그룹은 회사로 치자면 어느덧 부장이나 임원급은 될 성싶다. 일반 회사보다 근속이 힘들다는 가요계에서 거의 10년을 버텨왔으니 회식 자리에서 아무 이야기나 뱉어도 후배들은 깔깔 웃어주어야 할 것이다. 입사한 모든 직장인이 임원이 될 수는 없듯, 걸그룹 또한 모두가 소녀시대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차원에서 포미닛의 존재는 어느 회사에나 있는 힘없는 부서의 인간관계 좋은 과장님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들의 음악은 ‘미쳐’나 ‘싫어’에서 보듯 전형성을 거부하지만, 가요계에서 그들의 위치는 무척 전형적이다. 눈에 띄는 에이스(현아)를 앞에 배치하고 몇 년을 갈고닦은 실력으로 이 바닥에서 버텨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성공을 거두지는 않는(못한)다. 포미닛의 데뷔는 2009년 싱글 였다. 포미닛은 뜨거운 이슈 다음 소소하게 이어지는 작은 이슈, 가령 ‘이름이 뭐예요’ 또는 ‘미쳐’에서의 성공으로 성실하게 걸그룹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과장 정도만 되어도 무척이나 성공한 직장 생활이 아니던가. 직장을 잡더라도 비정규직일 확률이 높고, 정규직이 되더라도 부장은커녕 언제고 교육 및 재배치 그리고 해고를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다. 소리 소문 없이 활동을 접고 이직한 전(前) 걸그룹 멤버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꼭 부장이나 과장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만년 대리라도 이 바닥에서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존경을 표할 만하다.

레인보우가 그렇다. 레인보우는 2009년에 데뷔했다. 곡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셔츠를 살짝 들어 올리는 퍼포먼스로 화제였던 ‘A’ 이후 변변한 히트곡은 없다. 소속사도 카라에 집중한 나머지 이들에 대한 투자는 소홀했다는 게 정평이다. 레인보우는 가요 방송 1위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1위 후보에 오른 적도 손에 꼽을 정도. 하지만 대중은 그들의 이름을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테고, 얼굴은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을 것이다. 레인보우 멤버 각각의 밝은 에너지는 보는 사람의 기분을 덩달아 밝게 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반면 그들의 소속사는 특유의 귀찮아함 또는 무기력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레인보우는 그렇게 소속사에게 무언가 따지고 싶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는 연구할 만한 케이스가 되었다. 나인뮤지스는 옆 팀의 키 크고 싱거운 대리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이 팀의 멤버들 평균 신장은 170cm가 훌쩍 넘는다고 한다. 안무 역시 신장을 활용한 시원시원한 동작이 포인트다. 그런데 임팩트가 없다. 승진 시험 때마다 2~3점이 부족한 만년 대리처럼 히트곡을 내지 못한다. 특정 멤버(경리)에게 관심이 가기도 하지만 경리는 알아도 나인뮤지스는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속사 특유의 마케팅일지도 모르지만(그들 소속사는 소속 팀인 제국의 아이들보다 유명한 팀원들, 임시완, 광희가 속해 있다) 히트곡 제목 하나 기억나지 않는다니, 큰 키만 기억나고 이름은 모르는 옆 팀의 대리님이 딱이다.

달샤벳은 2011년 1월, 제2의 소녀시대라는 평가를 받으며 데뷔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달샤벳을 거쳐간 멤버는 총 일곱 명이며, 주로 6인조로 활동하다 최근에는 네 명으로 팀을 개편했다. 성과를 내지 못해 조직 개편이 빈번한 팀의 책상처럼 어수선하다. 멤버 각각은 예능에서도, 가요 방송에서도 최선을 다해 화사하게 웃는다. 그녀들의 웃는 얼굴은 참 예쁘다. 그러나 그들이 여태 남긴 건 가끔 이슈가 된 선정성 논란 그리고 뇌리에 희미한 노래들뿐이다. 언젠가 달샤벳은 유재석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은 곡 ‘있기 없기’로 활동한 적이 있다. 달샤벳이 앞으로 계속 있을지 없을지 하는 심경은 어쩐지 자리가 불안한 만년 대리의 불안감과도 닮았다.

만년 대리라서 슬픈가. 아쉬운가. 갑작스레 성공 욕구가 치솟는가.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늘도 걸그룹의 신입 사원은 수도 없이 입사했다 퇴사하길 반복한다. 그것 자체가 꿈인 인턴(연습생)은 더 많다. 최근 걸그룹 바람을 타고 탄생한 섹시 컨셉, 청순 컨셉, 힙합 컨셉 등등의 걸그룹 중 누구나 인정할 만한 성과를 보인 팀은 여자친구가 유일하다. 걸그룹이 홍수이다 보니 이젠 승진이 아닌 생존을 위해 무리한 컨셉을 내세우는 걸그룹도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직업인의 거의 유일하고도 진실한 덕목은 결국 실력일 것이다. 최근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한 것으로 보이는 마마무의 경우, 아무 데나 가져다놓아도 멋들어지게 화음을 빚을 것만 같은 가창력이 있었다. 최근 가장 성공한 론칭 걸그룹인 여자친구는 남자 아이돌 못지않은 군무, 직관적인 그룹명, 그런 이름에 어울리는 멤버 구성, 입학-방학-졸업으로 이어지는 의외로 치밀한 컨셉 기획으로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주말 가요 방송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소녀들의 헐벗은 옷차림이 아니었다. 가창력과 기획력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 이것은 운이 아니다. 실력이다.

그런데… 실력이라니, 요즘 그런 게 없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날 청년들이 영어에 능하고 컴퓨터도 잘 다루며 여러 자격증과 스펙을 갖춘 것처럼 아이돌 또한 노래 잘 부르고 춤 잘추며 예쁘고 예능감도 있다. 레인보우와 나인뮤지스와 달샤벳과 그 밖의 만년 대리들 모두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한다. 삶을 유지시켜나갈 뿐이며 그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었다. 그 속에서 걸그룹은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성공은 잘 모르겠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 세상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안다. 어쩌면 자명한 그 사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우리는 걸그룹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업인으로서 그들의 성공을, 아니 생존을 응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