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회화를 향한 얀 페이밍의 야망과 순정

2016.04.26

by VOGUE

    회화를 향한 얀 페이밍의 야망과 순정

    ‘회화종말론’이 미술계를장악한다 해도,중국 출신작가 얀페이밍의	 캔버스	위에서는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낸	슬픔과	욕망,	환희와	고통이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종횡무진	펼쳐질	것이다.	로마	빌라	메디치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현장과	파리	스튜디오에서	만난	얀	페이밍의	회화를	향한	야망과	순정.

    ‘회화 종말론’이 미술계를 장악한다 해도, 중국 출신 작가 얀 페이밍의 캔버스 위에서는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낸 슬픔과 욕망, 환희와 고통이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종횡무진 펼쳐질 것이다. 로마 빌라 메디치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현장과 파리 스튜디오에서 만난 얀 페이밍의 회화를 향한 야망과 순정.
    (사진) 얀 페이밍의 파리 스튜디오에 걸린 작품 ‘마라의 죽음(La Mort de Marat)’.(2012)

    밍이라고도 불리는(기억하기 쉽도록 지은 필명이다) 얀 페 이밍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중국계 화가다. 1960 년에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1980년에 프랑스로 이주하여 미술대학에서 서양 예술의 역사와 화풍을 익혔다. 그가 중국 에 머물던 시기는 문화대혁명 후기였다. 젊은 홍위병(급진 좌 파) 출신이던 그는 주로 선전, 선동용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대륙풍의 미술 형식에서 벗어나 서양의 섬세한 회화 기술을 도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특징인 빠른 작업 속 도, 주제를 중시하는 점, 직설적인 표현 등을 보면 중국에서 익힌 기법과 과거의 전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사진)로마의 빌라 메디치에서 개인전에서 만난 얀 페이밍 (Photo by Marie Clerin).

    밍이라고도 불리는(기억하기 쉽도록 지은 필명이다) 얀 페이밍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중국계 화가다. 1960년에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는 1980년에 프랑스로 이주하여 미술대학에서 서양 예술의 역사와 화풍을 익혔다. 그가 중국에 머물던 시기는 문화대혁명 후기였다. 젊은 홍위병(급진 좌파) 출신이던 그는 주로 선전, 선동용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대륙풍의 미술 형식에서 벗어나 서양의 섬세한 회화 기술을 도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특징인 빠른 작업 속도, 주제를 중시하는 점, 직설적인 표현 등을 보면 중국에서 익힌 기법과 과거의 전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로마의 빌라 메디치에서 개인전에서 만난 얀 페이밍 (Photo by Marie Clerin).

    지난 2000년 즈음부터 나는 얀 페 이밍(Yan Pei-Ming)의 스튜디오를 종종 방문하곤 했다. 그 는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그림에 애정을 보내는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귀한 시간을 나누고 편하게 작품을 감상하 도록 배려해준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 재 작업이 진행 중인 대형 캔버스다. (사진) 디종에 위치한 얀 페이밍의 스튜디오.

    지난 2000년 즈음부터 나는 얀 페이밍(Yan Pei-Ming)의 스튜디오를 종종 방문하곤 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그림에 애정을 보내는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귀한 시간을 나누고 편하게 작품을 감상하도록 배려해준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재 작업이 진행 중인 대형 캔버스다.
    (사진) 디종에 위치한 얀 페이밍의 스튜디오.

    얀 페이밍은 다른 중국 작가에 비해 한발 일찍 프랑스에 서 활동했다. 유럽 미술계에서 그의 작품과 해석은 매우 독창 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내 프랑스 화단의 스타로 떠올 랐다. 이제는 중국에서 산 시간보다 프랑스에서 지낸 세월이 더 길어졌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인인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작품은 마오쩌둥의 초상 화였다. 얀 페이밍은 이후에도 중국 인물들의 초상화와 사회 문제를 조망한 그림을 발표했다. (사진)파리 스튜디오에 설치된 작품 ‘교황 이노센트 10세(Innocent X)’.(2013)

    얀 페이밍은 다른 중국 작가에 비해 한발 일찍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유럽 미술계에서 그의 작품과 해석은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내 프랑스 화단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제는 중국에서 산 시간보다 프랑스에서 지낸 세월이 더 길어졌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신인인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작품은 마오쩌둥의 초상화였다. 얀 페이밍은 이후에도 중국 인물들의 초상화와 사회 문제를 조망한 그림을 발표했다.
    (사진)파리 스튜디오에 설치된 작품 ‘교황 이노센트 10세(Innocent X)’.(2013)

    하지만 프랑스 디종의 미술 대학에서 공부하고 1993년부터 다음 해까지 나폴레옹이 설 립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빌라 메디치(Villa Medici)에 체 류하면서 다채로운 동서양의 문화와 역사에 깊이 빠져들었고, 중요한 역사적 상황이나 장면이 포함되거나 암시하는 회화인 그랑 장르(Grand Genre)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런 그 가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담긴 빌라 메디치로 돌아와 라 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로마를 공통분모로 가진 15 점의 작품을 오직 이번 전시만을 위해 제작했다. (사진)카라바지오에게 영감을 받은 작품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성 베드로(La Crucifixion de Saint Pierre)’, ‘성 바오로의 개종(La Conversion de Saint Paul)’.(2015)

    하지만 프랑스 디종의 미술 대학에서 공부하고 1993년부터 다음 해까지 나폴레옹이 설립한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빌라 메디치(Villa Medici)에 체류하면서 다채로운 동서양의 문화와 역사에 깊이 빠져들었고, 중요한 역사적 상황이나 장면이 포함되거나 암시하는 회화인 그랑 장르(Grand Genre)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그런 그가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담긴 빌라 메디치로 돌아와 <로마>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로마를 공통분모로 가진 15점의 작품을 오직 이번 전시만을 위해 제작했다.
    (사진)카라바지오에게 영감을 받은 작품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성 베드로(La Crucifixion de Saint Pierre)’, ‘성 바오로의 개종(La Conversion de Saint Paul)’.(2015)

    “빌라 메디치에서 개인전을 여는 건 제게는 과거의 집으로 되돌아가 는 것과 같아요. 약 20년 전, 2년간 머문 바로 그 장소죠. 저 는 밤낮 가릴 것 없이 거기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또 그렸 어요.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와 빌라를 방문했던 (예술 세계의)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었지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오로지 그 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첫 번째 대규모 초상화 시리즈를 완성했어요. 그리고 유명한 중국 소설인 의 제목을 따서 붙였어요.”

    “빌라 메디치에서 개인전을 여는 건 제게는 과거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아요. 약 20년 전, 2년간 머문 바로 그 장소죠. 저는 밤낮 가릴 것 없이 거기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또 그렸어요.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와 빌라를 방문했던 (예술 세계의)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었지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오로지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첫 번째 대규모 초상화 시리즈를 완성했어요. 그리고 유명한 중국 소설인 <수호전(The 108 Thieves)>의 제목을 따서 붙였어요.”
    (사진)‘Funérailles du Pape’.(2015)

    암살 시도를 당한 요한 바오로 2세를 그린 ‘죽은 교황(Dead Pope)’, ‘트레비 분수(The Trevi Fountain)’ ‘영광 속의 폐허(Ruines du Temps Réel)’, ‘흔들리는 배 안의 람페두사 피난민들(Aube Noire)’ 등이 전시 되기도 했다. 또 이탈리아 영화를 주제로 한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의 (1945),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Pier Paolo Pasolini) 감독의 (1962) 같은 작품도 로마라는 주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사진)‘영광 속의 폐허(Ruines du Temps Réel)’.(2015)

    암살 시도를 당한 요한 바오로 2세를 그린 ‘죽은 교황(Dead Pope)’, ‘트레비 분수(The Trevi Fountain)’ ‘영광 속의 폐허(Ruines du Temps Réel)’, ‘흔들리는 배 안의 람페두사 피난민들(Aube Noire)’ 등이 전시되기도 했다. 또 이탈리아 영화를 주제로 한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Roma Cittá Aperta)>(1945),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감독의 <맘마 로마(Mamma Roma)>(1962) 같은 작품도 로마라는 주제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사진)‘영광 속의 폐허(Ruines du Temps Réel)’.(2015)

    특히 ‘알도 모로 시체의 발견(La Découverte du corps d’Aldo Moro)’은 그가 사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알도 모로(Aldo Moro)는 로마 대학의 법학과 교수이자 정치가다. 총리 및 기독교민주당 당수였으나 1978년 5월, 테러리스트 조직인 붉은 여단에 납치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종결되지 못한 채 음모 이론을 생산해내고 있다. ‘The Lead Years(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이탈리아 사회가 테러리즘으로 불안하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시민운동이 탄압 받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라 전체에 트라우마로 남은 이 사건이 수십 년 후 얀 페이밍의 작품에서 다시금 재현, 회자되고 있는 셈이다.

    얀 페이밍은 대표적인 스튜디오 작가다. 그는 가진 돈에 디종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아 스튜디오를 짓는다. 근사한 작업 공간에 욕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역사를 소재로 한 대규모 회화와 유명인 초상화 작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2000년대 초반, 개념 작가들은 직접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합한 제작사나 자신의 계획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장인들의 연락처가 담긴 전화번호부 책이 작가들의 작업실을 대치했지만, 얀 페이밍은 스튜디오를 끝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는 부지런한 예술 노동자이기도 하다. 관리직 사원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출근하듯, 작업실에 나가 하루도 빠짐없이 작업에 임한다. 회화라는 매체 자체에 엄청난 야망을 가지고 있기에 휴식이란 그에게 한가로운 소리다. 게다가 그가 초반에 주로 그리던 중국적인 소재와 주제는 얼마든지 세계적인 스토리와 역사적인 형상으로 발전, 적용될 수 있었다. 얀 페이밍의 회화는 전시 계획에 따라 기획되지만, 그 장소를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지리적인 구체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2004년부터 기존에 전시해온 명화에 현대미술 작가와의 협업 전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이 톰블리(Cy Twombly)가 천장화를 그리기도했고,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토니 크랙(Tony Cragg) 등도 참여했다. 얀 페이밍 역시 연락을 받았다. 기회를 잡은 그는 루브르의 상징인 모나리자를 소재로 삼았다. 모나리자가 전시된 바로 옆 전시실에 얀 페이밍이 다섯 개의 대형 작품을 선보였는데, 세 폭 제단화에는 모나리자 그림과 함께 배경에 해골이 흩어져 있는 상상 속 풍경을 그렸다. 다른 두 벽에는 임종을 앞둔 화가의 아버지가 있었고, 역시 죽음을 앞둔 듯한 작가의 자화상도 있었다. 그는 평생 미술관이라고는 가본 적도 없는 평범하고 이름 없는 노동자 아버지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관에, 그것도 가장 유명한 그림 옆에 모신 것이다. 역사를 개인의 기쁨으로 환원시킨 가족사이지만, 바로 이것이 미술관의 가장 훌륭한 정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는 공간인 것. 2009년에 열린 이 전시의 제목은 <모나리자의 장례식>이었다. 얼마 전에 얀 페이밍은 프랑스가 그 공로를 인정하는 시민에게 수여하는 상인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그는 영광을 아버지에게 돌렸다. “이 상은 제 아버지와 중국이라는 저의 뿌리에 바치는 존경의 표현입니다. 저는 세기의 인물을 표현해왔지만, 중국과 프랑스 모두에 발을 딛고 있는 시민이라는 인식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2012년 10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개인전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그는 이 전시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요약할 기회를 가졌다. 아랍의 역사적인 인물들과 현대사회의 문화, 정치를 테마로 한 작품을 발표한 전시의 제목은 <역사를 그리다(Painting the History)>였지만 그는 그 이상을 하려고 했다. 아랍 주요 인물의 초상화 옆에 다비드(David)의 ‘마라의 죽음(La Mort de Marat)’을 주제로한 세 폭 제단화를 전시한 것. 회색, 빨강, 검은색으로 그려진 그림이 원본 ‘마라의 죽음’을 둘러싸고 있어, 그 비극을 더 강조한다. 알려진 대로 ‘마라의 죽음’은 신고전주의자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작품으로, 피부병 때문에 자주 목욕을 하던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라는 시골 처녀에게 살해당한 사건을 주제로 한다.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며, 마라의 동지이기도 했던 다비드는 그 암살의 날을 기억하기 위해 이 장면을 그렸다.

    오래전부터 얀 페이밍은 명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유명 화가의 작품 세계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가 천착한 화가 중에는 고야(Goya), 벨라스케스, 카라바지오, 만테냐(Mantegna), 그리고 신화가 된 반 고흐(Van Gogh)가 있다. 얀 페이밍은 2015년 프랑스 아를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 협회의 초청을 받아 새로 꾸민 공간에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단순히 미술관이 아니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거장에게 초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 고흐의 유명한 풍경화를 정면으로 공략하는 대신 살짝 비켜나 다른 스타일로 접근했다. 그 유명한 고흐의 의자를 무릎 꿇고 기도 드리는 낮은 기도대로 탄생시켰고, ‘별이 빛나는 밤’은 무거운 남색 하늘 아래 전쟁터가 되었다. 반 고흐의 자화상을 그리는 대신 그의 젊은 시절 사진 두 장을 타원형 캔버스 안에 그려넣는 작업도 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얀 페이밍은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예술과 전쟁의 역사를 주제로 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때 회화 장르는 현대미술계를 호령했지만, 약간은 지난 유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얀 페이밍은 회화가 컨템퍼러리 아트 분야에서 생명력을 갖고 있음을 부단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리고 남다른 야심과 식지 않은 열정으로 매일 작업에 임한다. 그림은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비극과 고통을 완화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하는 그의 언어다. “저는 매일 스튜디오에서 텅 빈 캔버스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그 흰 표면에 표현할 수 있는 각종 인물과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제 그림은 수세기에 걸친 인간의 역사를 연결하고, 예술에 대한 저의 슬픔과 열정을 표현하는 저만의 방식입니다.”

    ※ 〈Yan Pei-Ming Roma〉전은 오는 6월 19일까지 로마의 빌라 메디치(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월요일은 휴무)에서 열린다.

      김승덕(‘르 콩소르시움’ 공동 감독)
      에디터
      윤혜정
      포토그래퍼
      André Morin © Yan Pei-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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