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고 다시 시작하는 필기와 요점 정리

우아한 독서로는 해갈 안 될 지적 욕망을 위해 나이 먹고 끊었던 필기와 요점 정리를 다시 시작했다. 이래서 선생님이 그렇게 노트 검사를 하셨나 보다.

우아한 독서로는 해갈 안 될 지적 욕망을 위해 나이 먹고 끊었던 필기와 요점 정리를 다시 시작했다. 이래서 선생님이 그렇게 노트 검사를 하셨나 보다.

빌 게이츠는 지난 1994년 경매에 나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36장짜리 노트를 3,080만 달러에 샀다. 자식을 낳는대도 서울에 집 한 칸 물려줄 형편이 못 되는 나는 대신 후손에게 물려줄 노트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360장도 넘는 빳빳한 스케치북 재질의 스프링 노트였다(내 손주의 손주의 손주는 얼마나 부자가 될 것인가!). 그런데 딱히 쓸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서 생전 안 하던 짓을 해봤다. 독서 노트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책상 위에 있던, 구입한 지 6년쯤 지난 이슬람 역사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나는 여태껏 이 책을 한꺼번에 열 페이지 이상 읽는 데 성공한 적이 없으나, ‘비장식적 모던 인텔리겐치아 스타일(가난한 인문계 대학원생의 자취방 스타일과 비슷하다)’이라는 나의 인테리어 컨셉에는 매우 잘 부합하는 것인지라 언제나 손 닿는 곳에 놓아두고 자린고비 굴비 먹듯 눈으로 탐닉하곤 했다. 그날 밤, 나는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와 초기 칼리프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나는 성적이나 취업 등 보상을 기대하는 학습과 순수한 지적 성장을 위한 독서를 완고하게 분리해왔다. 밑줄 긋고 메모하고 주석을 찾는 적극적이고도 절박한 책 읽기는 학생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인 줄 알았다. 여가로서의 독서라는, 시간이 남아도는 성인만의 특권을 딱딱한 저장 강박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학습 노트는 선생들이 강요한 습관일 뿐, 그저 술술 읽는 것만으로 정복 못할 책은 없으리라는, 나의 지적 능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도 한몫했다. 그 나태하고 건방진 선입견이 깨진 것은 당연히 빌 게이츠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때문은 아니다(설마, 진짜인 줄 알았나?).

함께 일하던 사진가가 여가 시간에 도서관을 드나들며 영어 공부를 한다는 말을 듣고 가벼운 혼란에 빠진 것은 여러 해 전의 일이다. “회화가 아니라 도서관에서 혼자 단어와 문법을 공부한다고요? 유학 가세요? 뉴욕? 런던?” “아니, 그냥.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나는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행하는 고차원적 활동에 쉽게 감동하는 편이다. 밥벌이가 아니라 취미로 하는 일이야말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이며, 업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추구한다거나, 보상 없는 정의를 실천하는 식의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같은 관점에서, 토플 성적이나 유학 같은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지적 유희로서 영어 단어를 외고 문법을 공부한다는 게 신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또 언젠가는 강남대로의 비즈니스 빌딩 화단에 앉아 영화 전문 서적에 코를 박고 내용을 다 씹어 먹을 듯 같은 대목에 대여섯번씩 동그라미를 치며 공부하는 동료 기자를 보고 감동한 적이 있다. 마침 가로등이 비쳐 그 광경은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숭고해 보였고, 동행은 내게 소곤소곤 물었다. “저거 설정이니?” “아닐걸요. 원래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멋지네.” “멋지죠.” “그래, 나도 뭔가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지는 오래됐다. 그러나 나의 두뇌는 역사와 철학과 문화, 예술에 관한 나의 지적 허영을 감당할 만큼 똑똑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학창시절부터 암기는 젬병인 데다, 잦은 마감으로 언어 감각이 목수의 지문처럼 닳아 희미해진 후로는 낯선 문장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으며, 멀티태스킹은 못하되 멀티 잡생각은 한 다스도 너끈한 뇌 구조 때문에 디테일은 차치하고 학자들의 노작에 담긴 논리와 구조를 대강이라도 파악할 만큼 책을 붙들고 있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슬람 역사책의 도입부를 열다섯 번 정도 읽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열여섯 번째 독서도 첫 문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런 책이 제법 많다. 나는 책을 읽고 나면 책등에 스티커를 붙인다. 보관할 것은 빨간색, 선물할 것은 파란색, 버릴 것은 노란색으로 표시한다. 그런데 버젓이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어도 전혀 읽은 기억이 없는 책이 태반이다. 때론 기가 인터넷과 기가 LTE 시대에 읽고 기억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아직 알파고가 학문과 예술을 통섭해 개별적인 지적 체험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일까지는 못하니까, 그런 건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갚지 않은 빚처럼 끝내지 못한 책의 무게에 짓눌려 늘 허덕인다. 그러다 올 초, 우연히 360장도 넘는 빳빳한 스케치북 재질의 스프링 노트가 눈에 띈 것이다.

당연히 그냥 읽어도 충분한 책이 있고 적극적인 공부가 필요한 책이 있다. 매우 지적인 외모를 가졌음에도(그런 얘기 자주 듣는다! 진짜다!) 실상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후자와 친해지려면 달리 왕도가 없다. 머리가 처지면 손발과 엉덩이를 써야 한다. 인용하기 좋은 멋진 문장 몇 개 베껴 적는 걸로는 충분치 않다. 고등학생 입시 공부하듯 노트를 만들고, 책의 구조도를 직접 그려보고, 내용을 요약하고, 주석을 달고,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는 동안, 그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열여섯 번째 독서에 이르러서야, 나는 방금 대체 무슨 문장을 읽은 건지 15초마다 한 번씩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지 않고도 그 책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산속을 헤매는 몽유병 환자처럼 책 속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새겨들을 필요 없는 소리다. 하지만 내게 이것은 꽤나 놀라운 경험이어서, 비록 내 손주의 손주의 손주가 3,080만 달러를 벌지 못하더라도 계속 노트를 만들어갈 가치가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인이자 영문학자 이하윤은 수필 ‘메모광’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쇠퇴해가는 기억력을 보좌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와 세상의 지식 사이에도, 호젓이 만나 오래 머물 별도의 방이 필요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