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보수적이고 콧대 높은 꾸뛰리에들에게 반기를 들던 패션계 이단아는 예순 살이 넘은 지금도 솔직하고 반항적이며 유쾌하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21 장 폴 고티에전〉으로 서울에 온 영원불멸 앙팡 테리블과 〈보그〉의 랑데부.

사진 속의 그는 늘 코미디언처럼 고약하고 익살맞은 표정이거나,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지나치게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다(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처럼). 그의 유니폼인 브르통 스트라이프 티셔츠의 줄무늬를 보고 있으면 주변이 뱅글뱅글 회전하면서 최면에 걸린 듯한 환각적 기분마저 든다.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에 대해 이렇듯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인상을 갖고 있는 건 나뿐인가?

누군가 동의한다면 76년부터 선보여온 고티에 컬렉션을 꾸준히 봐온 게 분명하다. 때로 도발적이고, 때로 성스러우며, 때로 터무니없이 우스꽝스럽다가도 어느 순간 얼마나 존경받아 마땅한 디자이너인가를 깨닫게 하는 지난 40년의 창조물. 패션사에 유일무이한 이 디자이너가 63세에 처음 서울을 방문했다. 캐나다 몬트리올 미술관의 제안으로 2011년부터 시작한 그의 패션 전시는 전 세계 8개국 11개 도시를 거쳐 마지막으로 서울에 안착했다. 아시아 최초이자 세계 투어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전시는 유년 시절의 기념품부터 그와 협업한 아티스트의 역사적 공연 영상, 순회 전시 기간 중 새로 추가된 컬렉션, 한국을 위해 특별 제작한 의상까지 추가돼 볼거리가 풍성하다. 전시 오프닝 행사로 2016 봄 오뜨 꾸뛰르 위주로 구성한 패션쇼가 열렸고, 이 화보는 전시 공개 직전 마무리 설치가 한창인 전시장 안에서 패션쇼 의상과 전시 의상 일부로 <보그 코리아>가 독점 진행한 프로젝트다.

촬영 시간이란 야금야금 늘어나기 마련이다.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가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오는 시간, 모델들이 에이전시 동료를 만나 가볍게 인사 나누는 시간 등의 1~2분이 쌓이고 쌓여 결국 몇 시간이 되고만다. 무슈 고티에의 콜타임도 이미 훌쩍 지났다. 그것도 무려 1시간! 그러나 시간 맞춰 내려왔던 디자이너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고 고티에 하우스의 팀원(전부 단 한 벌뿐인 오뜨 꾸뛰르 의상이라 그들이 직접 옷을 입혔고, 한 벌을 입히는데 두세 명이 동원됐다)들 모두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웠다. 그들은 전선에 앉은 새들처럼 삼삼오오 모여 흥미롭게 촬영을 지켜봤다. 그동안 만난 디자이너들은 30분 간격으로 짜인 빡빡한 스케줄에 따라 맹렬히 움직이거나 즉석에서 스케줄을 바꾸는가 하면, 기분에 따라 인터뷰 시간을 풍선처럼 쪼그라뜨렸다가 끝도 없이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가장 이성적이면서도 배려 깊은 대처법은 다음과 같다. 고티에 하우스 PR 디렉터 옐카 뮤직은 자상함과 엄격함을 겸비한 교감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촬영이란 게 늘 그렇죠, 뭐. 괜찮아요. 그렇지만 촬영이 5시에 끝나지 않으면 인터뷰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할 수 있어요. 다음 스케줄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답니다.”

그리고 5시 10분. 실제로 마주한 장 폴 고티에는 체구가 상당히 크고 백일몽을 꾸는 듯 살짝 졸려 보이는 눈매에 태평스러운 인상이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짓는 웃음은 꾸밈없이 다정하다. 누구든 그가 얼마나 따뜻하고 젠체하지 않는 사람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아첨하거나 칭송하는 말엔 반응이 신통치 않다. 어릴 때 당신을 좋아했다는 어쭙잖은 찬사를 늘어놓자, 갑자기 그는 뒤쪽에서 옷을 정리하는 스태프들에게 프랑스어로 지시를 내리는 척하며 말을 중단시켰다. 그리곤 다시 미소를 지었다. “실례했군요, 계속하세요.”

그렇지만 그의 컬렉션에 감도는 판타지 영화 같은 분위기는 상상과 현실의 경계선이 모호한 어린아이의 정신세계와도 분명 통하는 부분이 있다. 지난 1월, 그는 마레 지구의 고티에 하우스 쇼장을 80년대에 가장 핫했던 클럽 ‘르 팔라스’처럼 꾸몄고 그 시기를 직접 겪었거나 전혀 알지못하는 이들 모두 어딘가 다른 시공간에 온 듯 묘한 기분을 느꼈다. “원래는 전혀 다른 주제로 컬렉션을 준비하던 중이었어요. 70~80년대 펑크의 여왕이라 불리던 친구가 세상을 뜨고 말았죠. 그녀가 세상을 뜬 직 후, 그전까지 해온 몇 달 치 작업을 전부 엎고 모든 걸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의 이미지를 담기로 한 거죠. 전형적인 80년대 스타일로 당시 사람들이 즐기던 클러빙, 밤 문화를 담으면 하나의 꿈처럼 보일 것 같았어요. 당시에 클러빙이 어떤 식으로 유행했고, 어떤 여자들이 우리에게 영감을 줬는지 등등.”

에드위지 벨모르는 지난해 9월 말, 58세에 만성간염으로 인한 간부전으로 마이애미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고티에의 79년 제임스 본드 컬렉션 쇼에 모델로 서면서 그와 친분을 쌓았다. 짧은 크루 컷의 플래티넘 블론드(원래 머리칼은 완전한 검은색)를 고수한 중성적 매력의 그녀는 80년대 파리 밤 문화를 휩쓴 전설의 펑크 퀸이었고 음악, 문화, 패션계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무지막지한 덩치의 가드들과 함께 당시 파리의 스튜디오 54였던 라 팔라스 문 앞에 서서 누구를 들여보내고 누구를 돌려보낼지를 결정하곤 했다.

무슈 고티에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가 통념에서 벗어나는, 색다른 여자에게 매료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바꿔말하면 그의 주변에는 늘 특별한 여자들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영감을 준 첫 번째 여인은 할머니다. “할머니는 어딘가 특이했어요. 손에 자성 같은걸 갖고 있었죠, 치료 효과가 있는 바이오 에너지 같은 거요. 한번은 오렌지를 사다가 하루에 1시간씩 양손으로 쥐고 있었더니 일주일 만에 수분이 완전히 빠져 딱딱한 돌덩이가 돼버렸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남았죠. 영원히!” 그는 보이지 않는 오렌지를 두 손으로 쥐고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미용 치료사였고 집으로 찾아오는 동네 여인들에게 마스크 팩을 씌워놓고 점성술사처럼 시시콜콜한 가정사를 알아맞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도 알려줬다. “당시 난 아주 어렸지만 할머니는 내가 옆에서 그 모든 걸 지켜보도록 놔뒀죠.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할머니가 시킨 대로 해서 훨씬 아름다워진 그들을 상상해 그리곤 했어요.대부분 TV에서 본 마릴린 먼로와 비슷한 모습이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할머니에게 그 모든 것에 대한 도제 수업을 받았던 것 같아요.”

할머니의 도제 수업에는 TV 성인용 공연인 폴리 베르제르를 보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아홉 살 때 학교 수업 시간에 TV에서 본 무용수를 그리다가 선생님한테 들켰고, 선생님은 고티에의 등에 그림을 붙여친구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했다.“선생님은 내게 창피를 주려고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죠. 그동안 나를 따돌리던 남자아이들이 자기도 그림을 그려달라고 몰려왔거든요.” 외동아들인 고티에는 늘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기에 또래와 지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사건 전까지는 말이다. 야한 쇼 의상을 입고 춤추는 여자들을 그린 도발적 스케치는 아홉 살짜리 소년의 패스포트였다. “그림을 그리면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걸 깨닫게됐죠. 사람들이 내 그림에 감탄하는 걸 보는 게 즐거웠기에 더 열정을 쏟았고, 결국 이렇게 디자이너가 된 거예요!”

그의 기본적인 성향은 성장기 경험에서 축적되고 형성됐다. 시골 출신이라는 배경과 꾸뛰르에 대한 동경은 대중적인 거리 문화와 하이패션이 뒤섞인 파격적 스타일로 드러났고, 아이코닉한 콘 브라는 이미 프로토타입이 존재했다.“마돈나보다 먼저 콘 브라를 입은 건 나나예요!” 고티에의 부모님은 그가 장티푸스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물로 곰인형을 사줬다. 그는 여자아이들이 갖고 노는 인형을 갖고 싶었지만 남자아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이 시도하고 싶은 모든 걸 나나에게 실험했다.“할머니가 보던 잡지에 가슴 모양을 예쁘게 만들어주는 브라 광고가 있었죠. 50년대였고 그림 크기가 작아 나나에게 맞을 것 같았어요. 잡지를 동그랗게 오린 뒤 말아서 뾰족한 브라를 만들었죠.” 그는 나나의 스타일을 바꾸기 위해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붙이고, 예뻐 보이도록 눈두덩에는 녹색, 입술에는 빨간색을 칠했다. 60년대 초 벨기에의 파비올라 왕비가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을 때는 나나도 보두앵 벨기에 국왕과 결혼시키기 위해 작은 웨딩드레스도 만들었다.“나의 첫 뮤즈였으니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그렇지만 나나의 삶이 늘 순탄치만은 않았다. 나나의 배에는 어린 고티에가 집도한 심장 절개 수술 자국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고티에는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그 위치가 아닌데, 콘 브라가 심장 부위를 덮고 있어서 정확하지 않은 위치를 가를 수밖에 없었어요.” 재미있는 것은 그가 나나라는 이름의 곰인형을 남자로 지칭한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도 불가사의하다는 듯 잠시 생각에 빠졌다. “왜 그런 이름을 지어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때 난 고작 세 살이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맞아요. 나나는 여자이름이죠.”

콘 브라 외에도 장 폴 고티에의 대표적 디자인 모티브는 그가 아주 어릴 때부터 친숙하게 봐온 것들이다. 신비로운 염력을 지녔던 할머니는 늘 미망인처럼 검정 크레이프 베일을 쓰고 연어색 코르셋으로 허리를 바짝 조이곤 했다. 그는 76년도 데뷔 컬렉션을 준비하며 그 코르셋을 떠올렸다. “70년대의 젊은 여자들은 섹시해 보이는 데 매우 신경을 썼습니다. 그들의 위 세대는 여권신장을 주장하며 브라를 거부했기 때문이죠. 코르셋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섹시해 보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평범한 코르셋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아주 길게 연장해 드레스로 만들었죠.” 80년 가을 ‘하이테크’ 컬렉션에서는 학교 다닐 때 저걸 옷에 달면 어떨까라고 상상했던 책가방 잠금장치를 실제로 벨트와 레인 코트에 달기도 했다. 고티에 유니폼인 스트라이프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는 어린 그에게 푸른색과 흰색 줄무늬의 브르통 저지 톱을 입히곤 했는데, 성인이 되고 벼룩시장에서 프랑스 해군이 입던 빈티지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발견한 뒤부터 다시 주야장천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입기 시작했다.“그래픽 무늬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러다 프랑스 선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쿼렐리>를 보게됐고, 본격적으로 컬렉션에 포함시켰죠.” 그는 엄청난 비밀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몸을 숙였다. “최근에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답니다. 왜 남색과 흰색 줄무늬인 줄 알아요? 밤에 병사가 바다에 빠졌을 때 빛을 비추면 눈에 잘띄기 때문이죠. 삶이란 그런거예요!”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면 그에게 패션 디자이너라는 명확한 길을 제시한 건 영화다. 그에게 패션 디자이너라는 구체적인 꿈을 심은 건 자크 베케르의 영화 <파리의 장식>이다. 영화 내용은 이렇다.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주인공은 여자들을 영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 다음 냉혹하게 차버리는 나쁜 남자의 행태를 반복한다. 친구의 약혼녀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녀에게 버림받고 자살을 택한다는 비극적 결말. 영화의 어떤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느냐고 그에게 묻자, 몰랐던 세계를 훌륭하게 묘사한 대본이라고 답했다. “영화는 아주 아름다워요. 나에게 그건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패션쇼가 아니라 하나의 멋진 쇼였죠.‘24번, 베르사유의 오바드(아침 음악)!’라고 외치면 아름다운 여자가 드레스를 입고 걸어 나왔어요. 나도 저런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아한 여자들을 위해 옷을 만들고 그 여자들은 사람들 앞에 서 포즈를 취하는. 게다가 영화 속 모델은 실제로 여배우고, 그들은 연기하는 거였으니 만약 내가 패션 디자이너가 된다면 그 영화는 내 현실이되는 셈이었죠!”

실제로 그는 2012년 봄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 영화 속 살롱 쇼 방식을 그대로 차용했다. 배경음악 대신 프랑스어와 영어로 룩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쇼장에 울려 퍼졌고(마흔여섯 벌의 옷을 설명하느라 쇼는 20분이 넘게 걸렸다) 모델들은 손에 룩 번호가 적힌 카드를 들고 과장된 포즈로 관객 사이를 걸었다. 그 역시 쇼가 진행되는 동안 모델들이 걸어나오는 런웨이 입구에 서서 모델들을 점검했다.“나에겐 옷을 만드는 것 만큼 패션쇼가 중요해요.저게(옷걸이에 걸린 옷을 가리키며) 전부는 아니죠. 누군가 내가 만든 옷을 실제로 입고, 사람들은 그 옷을 보기 위해 모이고, 그리고 감탄하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어릴 때 그림을 그리던 것과 똑같아요. 거기서 더 발전했다고 할 수도 있죠. 패션쇼 없는 컬렉션은 전혀 흥미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진짜 옷,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선 보이는 게 최종 과정입니다. 사람들에게 도달하는 것이오.”

그는 숨 쉴 틈 없이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때론 A로 시작해 B를 지나 C를 향했지만, 사실 얘기의 종착지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인터뷰는 약속한 1시간을 채웠고 고티에는 그날 저녁 이태원에서 공연하는 프랑스 뮤지션 M의 공연을 보러 떠났다. 만약 패션계에서 더 이상 그의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시기가 온다면, 그건 패션이 단 1%의 환상도 허락하지 않는 무자비한 100%의 현실일 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