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중기와 함께한 숨 가쁜 ‘홍콩 누아르’ 24시에 〈보그〉가 동행했다. 송중기의 아주 사적인 아주 공적인 외출!

새벽 5시, 홍콩 소호의 텅 빈 골목. 어제 소나기가 휩쓴 자리엔 미풍만 남았다. 흑백사진처럼 어둠이 내려앉은 밤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붉게 달아오른 홍콩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구글 맵으로도 찾을 수 없었던 인기척 없는 이 골목은 정말이지 딴 세상이다. 적막을 깬 연이은 셔터 소리. 헐렁한 흰색 스웨트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폭신한 운동화를 신고 스냅백을 거꾸로 돌려 쓴 청년이 동행한 무리를 향해 카메라를 겨눈다. “다시 찍읍시다!” <보그>의 사진가? 배우 송중기다.

“우리 나가서 걷죠.” 밖으로 나온 건 배우의 요청 때문이다. 잠들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인데도 홍콩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이 무리는 일탈한 아이들처럼 신나게 거리로 내달린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는 007 작전을 방불케 한 고된 일정을 마친 <보그>팀에게 선물 같았다. 몇 시간 전까지 디올 옴므 수트로 말쑥하게 차려입고 수백 개의 플래시 세례를 받은 ‘바로 그’ 배우와 카메라를 들고 동분서주한 <보그> 팀이 무장 해제된 시간! 송중기는 디올 옴므 수트를 벗어 던지고 카메라도 내려둔 채 밤거리를 활보 중이다. “서른 살 넘기고 기분이 어땠어요?” 배우가 우리에게 묻는다. 기습 질문에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그가 말을 이었다. “군에 있는 동안 서른 살을 맞았거든요. 돌이켜보니 제 20대는 오롯이 연기와 함께였어요. 그래서인지, 제 서른의 시작은 연기가 고팠어요. 얼마나 연기하고 싶었는지 몰라요. 요즘도 그렇습니다. 피곤한 줄도 모르겠어요. 쉬고 싶지도 않아요. 연기는 군대에서 충분히 쉬었으니까.”

문득 송중기의 데뷔작 <쌍화점>의 호위 무사 ‘노탁’이 오버랩됐다. 왕을 지키던 어린 무사의 호기로운 눈빛은 8년 후인 지금도 그대로다. ‘국민 배우’로 불릴 만큼 정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여전히 연기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변한 게 있다면 서른을 막 넘긴 나이뿐이다. “신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슨 얘길 해도 연기로 시작해 연기로 끝났으니까요.” 그의 일행 중 누군가가 귀띔했다.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 스타일리스트와 경호원까지 일명 ‘송중기 사단’은 배우와 10년 가까이 동고동락 중이다. “오래될수록 좋은 것 같아요. 뭐든!” 이렇게 혼잣말한 뒤 한참 생각에 잠긴 송중기가 덧붙였다. “처음 함께한 순간을 같이 떠올릴 수 있잖아요. 처음부터, 함께 이뤄나가는 거죠.” 언뜻 그때가 떠올랐는지, 그가 매니저에게 달려가 어깨동무를 하곤 다시 스마트폰을 들어 우리를 찍기 시작했다.

우리가 송중기를 처음 만난 시간은 어제 아침 11시, 인천국제공항에서다. 새벽부터 출국장 횡단보도 앞은 까맣게 에워싼 카메라 부대가 취재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패션쇼 참석은 처음이에요. 게다가 수트를 입고 공항에 가는 것도 처음이죠. 긴장됩니다.” 슈퍼스타야말로 패션 브랜드 섭외 대상 1순위지만, 송중기는 자신의 본업이 그로 인해 훼손되거나 지나치게 자신의 이름이 남발되지 않도록 집중해왔음을, 그리고 이번 홍콩행 역시 신중한 선택이었음을 내비쳤다.

디자이너 크리스 반 아쉐의 초대로 디올 옴므 패션쇼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행 비행기에 타야 하지만, 과정이 쉽지 않을 듯했다. 늘 그랬듯 다른 경로로 입장해 조용히 출국할 수 있는데도, 오늘은 공항 앞 횡단보도에 내려 출국장에 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부대가 진을 치고 있으니, 이 또한 배우 송중기에겐 처음 겪는 일. 그 장면부터 <보그> 카메라에 담기 위해 함께 내린 결정이었다. 경호원들과 수속 리허설을 마치고 다시 횡단보도에 나서자, 문자메시지가 울렸다. “곧 도착합니다.” 비밀 지령이라도 받은 듯 주위를 둘러보곤 준비 태세에 돌입했다. 그래, 오늘은 ‘미션 임파서블’!

5분쯤 지났을까. 도착한 한 대의 차 문이 열리자 순식간에 모든 카메라맨이 송중기를 향해 내달렸다. 카메라를 고정해둔 몇 곳이 다른 취재진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일단 무리 속으로 돌격 앞으로! 송중기는 재빠르고 태연하게 자신에게 몰려든 수백 대의 렌즈 사이에서 <보그> 카메라를 재치 있게 찾아냈다(바로 그 순간! 그가 뭔가에 집중할 때 잡히는 미간의 주름이 포착됐는데, 당일 보도된 뉴스 중 ‘인상 쓴 송중기’라는 대목의 진짜 연유다). 수속 중 마주한 공항 관계자는 “내한한 할리우드 배우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보다 많다”며 취재 열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긴 <태양의 후예>가 끝난 후, 일주일 만에 눈앞에 등장한 유시진 대위 아닌가! 특전사 군복 대신 말끔한 수트 차림으로 빼입은 그에게 역대급 플래시가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당황한 기색 없이 더없이 침착한 이 배우는 오히려 스태프들이 다칠까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챙겼고, 앞에서 거꾸로 달리던 <보그> 카메라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살피기 바쁘다(사진가는 송중기의 한 걸음 앞에서 카메라를 겨눈 채 배우와 마주 보며 뒷걸음쳐서 달려야 하는 상황).

“괜찮으세요? 다치신 데 없죠?” 한바탕 카메라 부대와의 사투가 끝난 후 목덜미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사진가에게 맨 먼저 다가간 건 송중기다. “오늘 가장 힘드실 텐데, 걱정입니다.” 그뿐인가. 동분서주에 넋이 반쯤 나가버린 <보그> 에디터에겐 긴장을 풀어주려고 농담을 던졌다. 수트 차림의 송중기는 분명 영락없는 ‘유시진 포스’였으나, <성균관 스캔 들>의 ‘구용하’처럼 능청맞고 개구쟁이 기질이 다분한 채로.

비행기 탑승 후 눈을 붙이거나 영화 한 편을 보며 쉴 법도 한데 송중기는 뭔가를 계속해서 읽고 있다. 크리스 반 아쉐의 과거 인터뷰 기사다. “디자이너가 오늘 열릴 패션쇼의 수트 두 벌을 보내왔어요. 반년간 이 컬렉션을 준비했을 텐데, 저도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아쉐가 만든 옷을 입은 채 디자이너의 지난 컬렉션과 인터뷰 기사를 점검하는 모습은 단연 최고의 순간이다. 얼마 후 착륙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나오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뜬 눈치였다. 손가락 끝으로 팔걸이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며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오후 4시 30분, 홍콩국제공항. 30℃를 웃도는 무더위와 끈적한 공기가 이곳을 실감케한다. 먼발치로부터 “송중기!”를 연호하는 함성이 들렸다. “몇 번을 겪어도 늘 새로운 순간이에요.” 공항 안팎이 통째로 마비될 만큼 몰려든 취재진과 팬들에게 그는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송중기가 짧은 통화(<보그> 인스타그램 속 ‘셔터만 눌러도 화보’ 사진이 찍힌 바로 그 순간! 수많은 뉴스를 장식한 헤드라인, ‘송중기, 누구와 전화 통화했나!’의 주인공은? 바로 ‘어머니’다)를 끝내고 양쪽 구두끈을 다시 묶은 뒤, 경호원의 인솔하에 이동 차량이 대기 중인 지하로 출발. 아무도 없는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지금, 사진가 애니 레보비츠가 담았던 롤링스톤스의 투어 신이 우리의 머릿속을 스쳤다. 당대 슈퍼스타의 가장 화려한 순간을 기록한 것처럼 지금 이 순간도 그때처럼 기록되길!

1시간쯤 달려 도착한 호텔. 하버 뷰가 펼쳐진 창밖으로 느린 해는 수평선에 걸려 있었다. 송중기가 크리스 반 아쉐가 보내온 또 다른 수트로 갈아입고 새 단장을 마치면 디올 옴므 2016 F/W 컬렉션이 열릴 쇼 스튜디오(Shaw Studio)로 향해야 한다. 해가 저물자 사진가와 <보그> 팀은 23층 송중기의 객실 문을 두드렸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포즈와 각도는 있지만, 점점 사진가에게 저를 맡기게 돼요. 내려놓으니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사진으로 찾게 됐어요. ‘나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나?’ 하며 놀랄 때가 많으니까요.” 몇 번을 권유했음에도 음식을 먹지 않던 우리에게 어서 끼니를 챙기라며 피자를 떼어 손에 쥐어주며 그가 말을 이었다. “디올 옴므는 예전부터 좋아하고 즐겨 입던 브랜드랍니다. 특히 수트는 제 체형에 가장 맞았죠. 평소에도 수트를 즐겨 입다 보니 셔츠와 팬츠, 슬림 핏 재킷이 옷장에 가장 많아요. 가장 저답고 좋아하는 스타일이죠. 행커치프나 조끼까지 엄격히 갖춰 입은 신사복 형태의 수트는 아직 불편하지만요.” 그가 재킷을 벗으며 말을 잇는다. “2007년 그가 디올에 처음 오기 전, 그러니까 2005년에 시작한 ‘크리스 반 아쉐’ 개인 레이블도 좋아했어요. 그래서 더 꼭 만나고 싶어요.”

오후 11시, 쇼 스튜디오. 모든 손님이 착석한 쇼장엔 송중기의 빨간 수트처럼 온통 새빨간 조명이 농염하게 번져 있다. 맨 마지막으로 입장한 한류 스타와 디올 옴므 홍콩 관계자가 포토 월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객석 맞은편을 가득 메운 초대형 모니터를 통해 송중기의 모습이 생중계 중! 게다가 프런트 로에 앉자마자 홍콩 셀러브리티들과 해외 프레스들이 한류 슈퍼스타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바람에 쇼가 한참이나 지연됐다는 사실. 한껏 달아오른 쇼장에 가사라곤 본인의 이름 ‘크리스 반 아쉐’뿐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맞춰 아쉐의 청년들이 걸어 나왔다. 쇼가 끝나자 송중기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슴을 울려대는 사운드와 살아 있는 마네킹들의 ‘메리고라운드’를 처음 접할 때의 ‘첫 느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새빨간 풍선이 넘실대는 애프터 파티에서 만난 크리스 반 아쉐와 송중기는 블랙과 레드로 나란히 맞춰 입은 듯한 ‘트위닝 룩’으로 역시 가장 뜨거운 플래시 세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파티장을 빠져나와 이동 차량으로 향하는 길. 이로써 모든 공식 일정은 끝났다. 송중기가 차에 오르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이따 봬요.”

이제 홍콩의 새벽 5시로 되돌아갈 시간. 우리는 모두 무장 해제 상태로 소호에서 새벽 공기를 만끽 중이다. SNS도 안 하면서 사진은 왜 저렇게 쉴 틈 없이 찍는 걸까? <보그> 사진가와 걸으며 한참 동안 사진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더니, 아무래도 요즘 사진 찍는 재미에 빠진 듯하다. “이렇게 칠흑 같은 밤에도 사진 잘 찍는 방법이 있지!” 적어도 그는 지금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임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송중기와의 꿈같은 하루가 지났다. 해가 뜨며 시작됐고, 해가 지면서 끝난, 그야말로 일장춘몽 같은 홍콩 누아르(송중기의 스마트폰 속에 담긴 그날의 누아르 사진은 일주일 후, 셀렉과 수정 작업을 거쳐 우리에게 전송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