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중부 움브리아 주와 라치오 주 경계에 있는 치비타 디 바뇨레조.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된 절벽 위 고대 도시를 방랑하는 21세기 집시 소녀.

로마에서 1시간쯤 푸른 초원 위를 차로 달리다 보면 저 멀리 ‘죽음의 도시’로 불리는 치비타 디 바뇨레조가 눈에 들어온다. 구름 위에 떠 있는 듯 착각이 드는 이곳은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됐다. 아찔한 구름다리를 건너야 하기에 고소공포증이 있다면 이곳을 지날 때 무척 힘들 수 있다. 심지어 고지대의 매서운 바람까지 더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다. 하지만 아치형 돔처럼 생긴 마을 입구를 지나면, 아담한 듯 웅장한 두오모 광장이 펼쳐진다.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으로 날아온 듯한 기분. 나는 맨 먼저 노천카페에 짐을 내려놓고 뜨거운 커피부터 주문해야 했다. 4월 말인데도 온도는 영상 11℃. 전혀 예상치 못한 추위와 바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촬영 팀은 방 세 개를 렌트하며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인상 좋은 이태리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방 한 칸을 흔쾌히 내준 주인장은 털북숭이 강아지 ‘알렉’을 태운 채 스쿠터로 구름다리를 건너다니며 바깥세상과 교류(레스토랑의 음식 재료를 사오는 일이 전부)하는 게 하루 일과라며 수다를 늘어놓았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차량 통제구역. 그저 동네 사람들의 식재료 배달과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이륜자동차가 전부다. 우린 맨 먼저 교회를 배경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관광객(할아버지와 할머니 커플)들이 카메라 주변으로 모여들며 “Che Bèlla, Bellissima!”를 외쳤다. 너무 예쁘다고 눈을 못 떼던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들의 허락을 받고 모델 정호연과 기념 촬영까지! 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질 만큼 인적이 드문 이 마을에는 멋진 풍경을 병풍으로 한 근사한 집이 많았다. 시간도 천천히 흐를 것 같은 이곳에서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기 위해 마련된 별장이다. 구찌의 디렉터인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별장도 이 건물 중 하나. 절벽 위에 세워진 치비타에서 내려와 30분쯤 이동하면 오르비에토(이곳 역시 절벽 위에 세운 조금 큰 마을)에 도착한다. 이곳 역시 차량 통제구역으로 호텔 바우처가 있으면 두오모 광장까지 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푸니쿨라(산악용 트램)를 타고 마을로 올라가야 한다.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인상적인 이곳은 와인과 살라미가 특산품이다.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도 다양한 살라미 메뉴를 맛볼 수 있다. 우린 비바람을 피해(하루에 수십 번 바뀌는 변덕스러운 날씨) 동굴처럼 생긴 레스토랑에서 잠시 쉬었다. 인심 좋은 이태리 시골 사람들은 편하게 옷도 갈아입고 장비도 보관하라며 레스토랑 한쪽을 기꺼이 내줬다. 이곳에서 먹은 수제 파스타와 다양한 살라미, 질좋은 올리브 오일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바깥 기온은 영상 2℃와 10℃ 사이! 서울에서 여름용 옷만 챙긴 스태프들은 가져온 옷을 전부 꺼내 마구마구 껴입은 채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부서진 절벽 위에 아찔하게 지은 집과 저 멀리 움브리아 초원이 펼쳐지는 성곽, 아기자기한 화분으로 가꾼 계단, 예술가들의 화실, 해 질 녘 노을과 어우러진 교회 종탑 등등. 마을 아래에 깔린 자욱한 안개를 바라보고 있자니,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가 들렸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슬로우 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