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16.06.14

by VOGUE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휴식을 얻기 위해 일을 하는 건 고대 그리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지만, 요즘처럼 일하기 위해 휴식하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바쁘게 사는가?’는 삶의 방식과 일하는 방식의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가장 첫 번째 질문이다.

    휴식을 얻기 위해 일을 하는 건 고대 그리스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지만, 요즘처럼 일하기 위해 휴식하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바쁘게 사는가?’는 삶의 방식과 일하는 방식의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가장 첫 번째 질문이다.

    쿠바 아바나로 출장 가는 비행기 안. 이 기묘한 느낌을 해방감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파리까지 11시간, 다시 아바나까지 9시간, 총 비행시간만 대략 21시간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적어도 하루 동안 난 자유의 몸이라는 얘기다. 휴대폰이 유발하는 ‘과잉 커뮤니케이션’과 인터넷과 이메일이 야기하는 ‘정보 과부하’ 상태, 혹은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어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좋은 엄마 콤플렉스’까지, 모든 것에서 벗어난 무중력의 상태! 이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 고립의 시간 동안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어도 된다는 사실 자체다. 게다가 아바나는 호텔만 벗어나도 와이파이가 먹통이 되는 천국이란다. 브라보!

    물론 온전히 기쁘기만 하다면 그건 위선이다. 당연히, 막연히 불안하다. 이 불안은 양가적 감정의 피 튀기는 전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쿠바라는 신천지에 갈 기회를 얻었다’는 기대감, ‘칼럼 자료를 바리바리 싸왔다’는 수치심, ‘그렇지 않으면 마감을 제대로 못할 것’이라는 의무감, ‘모두가 부러워한 쿠바까지 가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죄책감 등이 저마다 센 척하며 날 이리저리 휘둘렀다.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할 때 멀미가 난 건 단순히 고도 차이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며칠 동안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그 결정을 미룰 수 없는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꼭 이런 달이면 써야 할 칼럼도, 조율해야 할 일도 유난히 많다.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휴식을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시간이 생겨도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우왕좌왕하다 일단 책을 꺼내 들었다. 독서 전문가 매리언 울프의 명언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는 곧 우리가 읽는 그것이며,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우리 자신의 정체가 형성된다.” 내가 트렁크에 대충 구겨 넣은 책은 울리히 슈나벨의 <휴식>, 브리짓 슐트의 <타임 푸어>,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울프의 말은 정확했다. 나는 ‘휴식’에 관한 책을 ‘시간에 쫓기는 상황’에서 ‘매우 부지런히’ 독파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 상태가 바로 나다. ‘바쁘다’ ‘정신없다’ ‘피곤하다’ ‘할 일이 많다’ ‘시간이 없다’는 최근 내가 가장 자주 내뱉은 단어. 체중은 4kg이나 빠졌다. 다행인 건 다이어트가 성공의 기미를 보인다는 거고, 불행인 건 내가 이 속도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는지, 어떻게 멈춰버리는지 경험적 데이터를 갖고 있다는 것. 바쁜 일상이 사람을 얼마나 쉽게 지치게 하는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둔감하게 만드는지도 겪은 나는 그러므로 “시간에 쫓겨서 삶이 힘든 이 현상을 OBL(Overwhelmed by Life)이라는 질환으로 불러도 무방하다”는 제안에 매우 동의한다.

    얼마나 정신없이 살고 있는지에 대해 무려 세 단락이나 할애하고 나니 새삼 궁금해진다. 대체 난 왜 바쁜 걸까? 싱클레어 루이스의 소설 <배빗>에 등장하는 조지 배빗처럼 시간 절약과 효율성이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인간이라서? 난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 오는 동안에 트위터를 들여다보는 걸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처럼 누군가가 내 시간을 훔쳐 멋대로 쓰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허술한 인간도 아니다. 일중독이라서? 난 새 달력을 받으면 가장 먼저 휴일부터 세어본다. 그런데도 늘 시간 관리를 잘못하고 있다거나 소중한 인생을 과연 이렇게 보내야 하는지 회의하는 이유가 뭘까?

    <휴식>을 쓴 과학 전문 기자 울리히 슈나벨도,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타임 푸어>의 브리짓 슐트도 공통적으로 스스로 ‘바쁜 삶’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매우 거대한 공통점을 가진다. 모든 걸 가진 어른이 방황하는 청춘에게 조언하는 식의 자기계발서와는 달리 매우 절실하게 설득한다는 것, 아이들이 다 자라서 미친 듯 바쁜 시기가 지날 때까지 행복한 삶을 미뤄둘 수 없다는 것, 쫓기는 삶은 내 육체, 정신, 인생, 세계, 나아가 아들딸들의 시대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사회, 문화, 과학, 정치, 역사를 탈탈 털어 증명한다는 것, 그리고 중요하게는 이런 삶의 원인을 단순히 어느 개인의 박약한 의지력과 급한 성격의 문제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울리히 슈나벨은 저마다 인생 속도를 끌어 올리는 가속화 시대와 한가지에 집중력을 방해하는 정보 홍수의 사회에서 ‘시간이 돈’이라는 규칙이 어떻게 불문율이 되었는지, 그것이 바쁜 삶으로 고착된 행태를 파헤친다. 현대에 들어 휴식을 무용의 시간으로 취급하지만, 휴식이야말로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과정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한편 브리짓 슐트도 쫓기는 삶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함을 밝히기 위해 전 세계를 종횡무진한다. 유명한 시간 연구가의 워크숍에 참여하고, 뇌 과학자들을 만나고, 시간 활용 학술 대회까지 누비고 다니면서, 이는 곧 삶을 지속하는 주요한 명제임을 각인시킨다. 더 나아가 국민의 건강, 가정의 행복, 산업의 번창, 경제의 건전성,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도 쫓기는 삶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쿠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적어도 ‘블로프트(Blorft)’의 상태에서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배우이자 작가인 티나 페이가 만든 이 형용사는 ‘실은 힘들어 죽겠는데 괜찮은 척하면서 일을 계속하고, 스트레스에도 무감각하게 반응한다’는 의미). 서울보다 13시간이나 느린 남미 대륙에 와 있다는 사실은 가장 강력한 최면제였다. 유서 깊은 호텔의 야외 카페에서 마시는 모히토는 더할 나위 없고, 바다, 하늘, 구름, 바람마저도 기막힌 행운으로 다가왔다. 다만 달력은 보지 말았어야 했다. 에디터에게 날짜란 ‘마감까지 남은 시간’의 다른 말. 마음이 급격히 바빠지고 행운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순간, 올드 카가 내뿜는 매연에도 불구하고 청정한 아바나의 공기와는 달리 나의 오롯한 순간은 상념으로 오염되곤 했다.

    브리짓 슐트는 그런 내게 예일스트레스센터 신경 과학자들의 말을 근거로 들어 정신 차리라 독려했다. 반복적으로 시간에 쫓기는 사람의 뇌에서 사고와 판단을 관장하는, 그러니까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전전두엽 영역이 눈에 띄게 쪼그라든다고 말한다. 맙소사! 매달 마감이라는 의식을 치러야 하는 나의 뇌는 과연 무사할까? 단 8주 동안 매일 조금씩 명상을 하거나 하루 27분 동안이라도 자기 신체의 느낌에 집중하기만해도 대뇌 회백질이 증가하여 뇌의 노화를 막을 수 있다는 하버드대학의 연구 결과는 반면 위로가 되었다. 문득 한 후배가 생각났다. 끼니도 거를 정도로 정신없는 마감 기간이면 더욱 맹렬히 필라테스 수업을 받곤 하던 그녀가 현명하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지향한다는 공통점보다 더 흥미로운 건 둘의 차이점이었다. 울리히 슈나벨은 바쁜 삶은 시간 관리 프로그램 따위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하고, 브리짓 슐트는 명상이나 심호흡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누구나 ‘휴식’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상반된 반응 혹은 해결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휴식은 자기만의 시간”이라 표현하는 울리히 슈나벨은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 헬가 노보트니의 말을 인용한다.

    “휴식은 나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사이의 일치를 뜻한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만나는 시간, 휴식의 본래 의미다.” 최고의 휴식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상태이며, 책상 앞에 있을 때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해답으로는 낮잠, 명상, 정보에 휘둘리지 않기, 이메일 자주 확인하지 않기, 혼자 있음을 즐기기, 행복한 친구를 곁에 두기, 일터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터득하기, 걷기, 호흡하기, 쓸데없는 욕심을 포기하는 현명함 등이 있다.

    왠지 시시해 보이나? 그렇다면 유명 휴양지로 떠들썩한 휴가를 떠나는 것보다 휴대폰, 컴퓨터, 텔레비전을 모두 끄고 방 안에서 온전히 쉬는 게 더 쉽다고 과연 단정 지을 수 있을까? 휴식은 버튼 하나 누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돈보다도 타성과 습관을 거스르는 훈련이 더 필요하다.

    반면 두 아이의 엄마이자 기자인 그녀는 휴식 자체보다 일, 육아, 놀이, 사랑 등 다채로운 시각에서 시간과 성과의 스트레스로 잘게 조각난 시간을 어떻게 이어 붙이고 ‘나만의 시간’으로 만들지에 집중한다.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재미있게 산다는 평범한 목표 아래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제 생활이 달라졌다고 선동한다. 그녀의 해답은 이렇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쁘지 않으면 완벽하다는 걸 인정하며, 집과 직장 어느 쪽에도 완전히 마음을 쏟지 못하는 애매한 감정을 정리하고, 자기 선택에 자존감을 가지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하며, 현실과 목표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우리 인생에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눈을 떠라! 그러니 주말에 번지점프를 하든 뭐든 하라!

    아바나에 머문 며칠 동안 ‘나는 왜 바쁘게 사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얻었다면 거짓말이다. 잘난 사람들의 해답은 가끔은 너무 가깝고, 가끔은 너무 멀다. 대신 내가 얻은 건 질문만큼 좋은 답은 없으며, 어쩌면 스스로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확신이다. “선배와의 식사 시간이 짧아진 데다 초초해 보여요”라고 말하는 후배를 만날 때만큼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다. “모든 일을 열심히 하려 하지 말고 생각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충고한 사진가 친구는 ‘완벽한 기사’와 ‘좋은 기사’의 차이점을 깨닫게 했다. 게다가 나의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발 책임감 좀 가져줄래?’라고 말할 정도로 릴랙스해봐.” 결국 이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긴장을 풀고 편히 쉬어. 그게 아마도 네가 세상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일 거야!”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꺼내 보지도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는 작은 단서를 머나먼 타국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에디터
      윤혜정
      포토그래퍼
      ANTHONY COTSIFA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