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가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현대인에게 잔혹한 주홍 글씨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 중 이만큼 거대한 신드롬을 일으킨 건 없었다. 그렇다면 상상력이 왜 이다지도 중요한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있었나? 우리가 몰랐던상상력의 가치.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현대인에게 잔혹한 주홍 글씨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 중 이만큼 거대한 신드롬을 일으킨 건 없었다. 그렇다면 상상력이 왜 이다지도 중요한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은 있었나? 우리가 몰랐던 상상력의 가치.

“예술가로 키울 것도 아닌데, 왜들 이렇게 상상력 타령을 하는 거야?” 오랜만에 모인 여고 동창들의 대화가 저마다 내 아이가 얼마나 ‘독특한 그림을 그렸는지’ ‘기발한 동시를 썼는지’ 하는 자랑으로 무르익을 무렵, 한 친구가 이 뜨거운 대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상력은 창의력, 크리에이티브와 함께 요즘 엄마들을 가장 흥분시키는 단어 중 하나다. 레고 수업도, 클레이 수업도, 심지어 바둑 수업도 ‘모범생’이 아니라 ‘상상력 넘치는 아이’를 지향한다고 홍보한다. 예의 ‘상상력 타령’은 아이들과 함께 ‘창의력 타령’으로 자란다. 내 아이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탐독해 날 깜짝 놀라게 해주었으면 하는 식의 엄마의 로망을 충족시키지 않아도 되는 어른들도 다를 바 없다. ‘크리에이티브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종용 받으니까. 창의력의 비밀을 파헤친 책이나 EQ개발서는 나왔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고 기업가, 교육자, 정치인들조차 ‘상상력이란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 신봉한다. 상상력이 성실함보다 우위를 점하면서 주눅 든 사람도 많아졌다.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현대인에게 잔혹한 주홍 글씨다. 과연 인류 역사상 한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 중 이만큼 빠른 속도로 신드롬이 된 것이 있었나?

상상력은 풍요로운 사고, 기발한 아이디어,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 뚜렷한 개성, 멋진 인간상으로 이어지는 공공연한 도식을 만들면서 필수 영양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다는 점에서 친구의 성난 이의 제기에 절반은 동의한다. 고백하자면, 내가 몇 년 전 목수 김진송이 쓴 책 <상상목공소>를 ‘상상력을 자극하는 놀이 100선’ 같은 도서만큼이나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도 책의 부제에 매혹되어서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는 데 실패했다. 끝내주는 묘안을 손쉽게 얻으려는 나를 발견하고는 남부끄러웠기 때문이다.“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다.” 이렇게 말한 피카소는 실제 죽을 때까지 장르를 망라한 숱한 작품을 쏟아내며 이를 증명했다. 단언컨대 목수 김진송은 피카소 못지않다. 그는 우연히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와 이야기를 목물을 통해 현실화한다. ‘움직인형’이라는 이름의 작은 나무 조각품은 어떠한 동력 장치 없이도 스스로 움직이는 체계를 가지는데, 동영상을 보여주면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부자를 위한 가구만 만들어도 될 솜씨 좋은 목수 김진송은 그러나 이런 장난감 같은 걸 만들면서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한다. 이는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같은 불세출의 문화 비평서를 쓴 그가 목수 일을 하게 된 계기와도 만난다. 이야기를 만들고(서사), 기계 장치를 연구하고(과학), 그걸 목물로 깎는(이미지) 그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의 결핍, 더 나아가 글쓰기와 목수 일 사이의 결핍을 상상으로 메운다. “상상력이란 경계와 분야를 넘나들 때 발생하는 혼란과 무질서를 즐기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사람이 상상력의 속성을 몇 가지 원칙으로 이론화하는 따위의 짓을 할 리는 만무했다.

목수 김진송은 각종 강연을 다니며 이 목물의 상상력이 어디서 나오는지의 질문을 매우 자주 받는다고 했다.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벌레를 만들 때는 벌레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벌레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벌레가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을 대단하고 특별한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작업하면서 느끼는 건, 상상력은 그저 감정이입의 능력, 공감력의 다른 말이라는 겁니다.” 흔히들 상상력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라고, 어떤 일을 걸출하게 해내기 위한 ‘능력’이라고 여긴다. 그런 상상력이 관찰, 이해, 공감으로 이어지는 ‘힘’이자 세상을 대하는 ‘태도’일 수 있다는 건 발상의 전환이었다.

일찍이 몇몇 이들은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통찰해왔다. “상상력이란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위인전에 적혀 있고, 소설가인 에이미 탄은 TED 강연에서 “추억이 상상력을 자라게 한다”고 말하며 유명세를 치렀다. 특히 ‘상상력의 대모’라 불리는 조앤 롤링은 상상력이 가져다준 일신의 영달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썩 달리 보인다. “상상력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릴 수 있는 인간 고유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발명과 혁신이 만들어지게 돼요. 이렇게 틀림없이 변화하는 능력 안에는 우리가 타인에게 공감하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녀가 “고의로라도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인간은 공포 속에서 괴물을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건 이것이야말로 요즘 세상에서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말 아닐까?

올해 칸 영화제는 80세의 거장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안겼다. 평생 약자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며 ‘칸이 존경한 남자’가 된 그는 역시나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다. 영국의 복지 제도에서 소외된 병들고 나이 든 노동자와 그가 만난 싱글 맘의 이야기에는 팍팍한 삶의 풍경과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지문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이 노인네 특유의 못 말리는 희망적 단서와 연대의 온기가 영화를 떠나지 않은 덕분에, 각국에서 온 관객들은 함께 울고 웃었다. 켄 로치는 수상 소감으로도 또 한 번 기립 박수를 받았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중략)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다른 세계 또한 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특히 “가난이 너의 잘못이라고 하는 건 잔인하다”던 그의 말에서는 기시감이 느껴져 위로가 된다. 서울의 봄, 강남역에서 그리고 구의역에서 포스트잇의 물결과 함께 울려 퍼진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외침. 칸의 특수에 발맞춰 국내에서도 개봉할 텐데, 유라시아 대륙 건너편에 사는 다니엘의 사연을 대할 때 가장 필요한 건 영화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타인과 공감하고, 내 곁의 타인을 인식하는 힘, 상상력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비자도, 서비스 노동자도 아닙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람이며, 시민입니다”라는 대사에서 ‘다니엘’을 ‘나’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 것, 그것이 켄 로치의 진짜 저력이라고 생각한다.

상상력의 또 다른 의미가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권리’라 한다면, 영화나 소설 등의 존재 가치 역시 전형적인 통념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하다.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문학적 상상력이 법 체제와 가치,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함으로써 ‘대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자조적인 ‘문학 무용설’에 적극 반대한다. <커커스 리뷰>의 평을 빌리자면 “누스바움은 소설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상상력을 넓히고, 나아가 공적인 삶이 요구하는 판단을 보다 잘 내릴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이는 ‘있을 법한 일들’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다양성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사실’을 넘어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재판관들이 판결 내리고 입법자들이 법을 제정하며 정책 입안자들이 다양한 인간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누스바움의 말은 우리 현실에서 꿈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어른들에게 왜 상상력이 필요한가에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타인의 삶이 어떨지에 대한 상상, 그 공감과 동일시의 경험은 우리를 맹목적인 추종자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는 ‘정치적 존재’로 이끌 거라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들의 말처럼 “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던 어떤 대상, 어떤 일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우리를 절망시킨 각종 범죄와 사고 현장에서 일어나는 추모의 열기를 두고 ‘SNS 세대의 적극적인 정치 발언’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정치가 사라졌다는 건, 혹은 사회가 정의와 평등의 가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상실감은 재벌 3세의 악행이나 검찰 조직의 비리로 점철된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학에서도, 서점에서도, 내 책장에서도 문학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되풀이될수록, 문학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한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의 디스토피아는 현실에 점점 가까워진다.

빅토리아 시대의 찰스 디킨스는 세태를 반영하는 드라마 작가 같은 존재였다. 그의 작품 <어려운 시절> 속 비쩌는 결국 괴물이 되어버렸다. 공감과 동일시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였다. 그를 만난 이상 스스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될 것인가, 괴물이 될 것인가(허구 속 인물들의 갈등 중 대부분은 아침으로 밥을 먹을 것인가, 빵을 먹을 것인가가 아니라 이 문제다). 당장 뉴스 페이지를 열어보라. 공감과 동일시가 사라진 자리에서는 정당한 분노와 밑도 끝도 없는 혐오가, 행위에 주목한 죄책감과 인격을 겨냥한 수치심이 악다구니 치고 있다. 그럼에도 혐오와 수치심이 이 세계의 하늘을 뒤덮어버리지 못하는 건 그 틈에서도 들려오는 작은 믿음, 진실된 연대의 목소리 때문이다. “인간을 존중한다는 것은 누구나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연약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문장을 기억한다면,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무명씨들이야말로 어떤 예술가 못지않은 상상력의 소유자들 아닐까?

결국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건 우리 삶이 탑을 쌓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가깝다는 것의 방증이다. 어떤 톤의 그림일지는 모르겠지만 다짐한 건 있다. 장래 희망이 ‘동네 미용사’라는 딸에게, ‘축구공’이 되고 싶다는 아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근사한 사람이 되기 위해’라는 헛소리를 하진 않을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