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몸

정신을 그러모으는 일은 몸에 집중하는 일과 비등하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는 작가들은 신체의 매 순간을 감각하는 가장 예민한 존재다. 이들이 보내온 네 개의 ‘몸에 대한 사유’는 네 개의 몸이 말하는 언어다.

정신을 그러모으는 일은 몸에 집중하는 일과 비등하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는 작가들은 신체의 매 순간을 감각하는 가장 예민한 존재다. 이들이 보내온 네 개의 ‘몸에 대한 사유’는 네 개의 몸이 말하는 언어다.

바이크 타는 몸

나는 바이크를 탄다. 꽤 오랫동안 즐겨왔다. 가지고 있는 바이크도 현재 세 대다. 많이 팔고 사고 했다. 최근 250cc 이상의 바이크를 타기 위해 꼭 필요한 ‘2종 소형’ 자격증을 땄을 때는 살면서 합격한 것 중 가장 기쁜 것 중 하나였다. 가족 몰래 새벽마다 면허시험장에 나가곤 했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 새벽마다 일 나간 가장도 많다고 한다. 좀 복잡하지만 나도 살려고 한 짓이긴 하다. 10대 시절부터 내가 타온 바이크는 거의 스무 대 정도 된다. 중요한 건 가정 형편과 상관없이 타고 싶은 바이크가 생기면 마음이 설레곤 했다는 것이다. 모의고사 시험지를 미리 본 것처럼 맘에 드는 놈을 보면 올라타고 싶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최근엔 가와사키 에스트렐라를 남양주의 커스텀 업체에서 입양해왔다. 검은색의 미끄러운 허리를 가졌고 엉덩이가 바짝 올라온 아메리칸 스타일이다. 에스트렐라는 스페인어로 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도시에서 에스트렐라는 많이 보기 힘든 명마이다. 원고 마감이 밀려오면 이놈의 안장 위에 한참 앉아 있다가 온다. 10대와 20대에 내가 여자 친구에게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마디였다 “뒤에 탈래?” 요즘은 바이크가 내게 그 말을 자주 한다.

바이크를 탈 때 내 몸은 바짝 긴장한다. 10대와 20대엔 주로 R차 일명 ‘뿅카’를 탔다. 속도감을 즐겼고 허리를 숙이고 코너링을 돌 때 지구를 당기는 원심력이 몸으로 빨려 들어오는 기분이 좋았다. 바이크를 안아서 끌어당기는 포옹은 사람에게는 없는 온도와 일체감이 있다. 그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들을 버리는 건 주로 나였다. 바이크를 너무 사랑해서 반려 동물과 사는 사람들처럼 엔진이 다 꺼질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가 안락사를 시켜준다거나 똥오줌을 흘릴 때까지 집에서 데리고 살지는 못한다. 일단 바이크는 방에 데려오기엔 덩치가 너무 크고 늙어서 기름을 밑으로 흘린다고 기저귀를 갈아줄 수도 없다. 묻어줄 땅도 내겐 없다. 다음 생에 건물주 아들로 태어난다면 죽은 바이크를 갈아서 납골당에 모셔보겠다. 바이크를 오래 타면 속도가 계기판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가장 짜릿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러 계기판을 고장 낸 오래된 바이크도 내겐 몇 대 있다. 바이크를 타고 다니면서 ‘위험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위험해서 바이크를 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바이크를 탈 때만 느낄 수 있는 몸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크를 탈 때 맛집 요리로도, 섹스로도, 신앙으로도, 창작으로도 건너갈 수 없는 세상에 다가갈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살고 싶은 세상을 한 뼘씩 만들어가는 거니까. 라이딩을 하고 돌아오면 늘 어딘가로 잠시 건너갔다가 돌아온 듯하다. 몸에 남아 있는 엔진의 떨림을 나는 사랑한다. 당신이 그 리듬을 이해하는 사람이면 우리는 어느 날 길에서 아슬아슬하게 좋을 것이다. 몇 번인가 자빠진 적도 있다. 고래잡이 어선 선장이었다면 백상아리를 만나 다리를 잃었거나, 좋은 목수라면 손가락 한두 개 정도는 안 보여야 폼이 난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몇 개월 병원 신세를 진 적은 많다. 살면서 지금까지 목발을 몇 번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도 고향 친구들 말처럼 사고로 아직 젓갈이 되어버리진 않았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젓갈은 참 좋아한다. 하지만 젓갈이 되어 거리에 누워 있는 몸을 생각하면 좀 밥맛이 없다. 언젠가 바이크를 왜 타느냐는 칼럼을 제안해온 적이 있다. 지금도 별로 생각이 바뀌지 않아서 상기해본다. “나는 언제나 속도보다 방향이 존중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여전히 사람의 심장 소리보다 바이크 엔진 소리가 더 익숙한 건 사실이다. 그건 내 삶의 슬픈 RPM.

요즘은 바이크 정비를 배우기 위해 수소문 중이다. 시간이 흘러서 노인이 되어도 바이크를 타고 싶은데 그때 방향은 존중되지만 속도가 안나면 폼이 안 날 테니까. _김경주(시인, 희곡작가)

 

아픈 몸

우리의 몸은 자주 병든다. 그간 나의 삶을 생각해보더라도 큰 병이 온 적은 없지만 무수히 많은 잔병이 내 몸을 지나갔다. 편도에 염증이 생길 때도, 인후나 후두가 붓는 날도 많았다. 몸에 헤르페스바이러스가 번져 고생하던 때가 있었고 그보다 더 자주 몸살이나 감기를 앓았다. 그에 비해 편두통은 1년에 한두 번 드물게 있었고 어린 날에 걸렸다는 폐렴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병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당뇨나 고혈압은 정해진 수치에 이르러야 병으로 진단받게 되는데 아직 정상 범위 내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수치가 점점 오르는 중이라면 그는 병의 전 단계에 있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이것을 미병(未炳)이라 부른다.

이 미병의 시기는 치료가 수월한 반면 우리가 스스로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이 꼭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보다는 사소한 마음의 결이 어긋난 데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것을 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넘기고 만다.

증상과 통증은 이제 미병이 끝나고 우리 몸에 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대부분의 장기와 기관은 통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위통이 시작된 후에야 위가 여기쯤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고, 아픈 곳은 허리인데 손발이 먼저 저려올 때 온몸의 신경이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에서도 다시 사람의 인연을 생각한다. 관계가 원만할 때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하고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한 사람이 부족하면 남는 한 사람이 채우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가 끝나고 나면 그간 서로 나누었던 마음의 크기와 온도 같은 것을 가늠해보게 된다. 이때 우리는 서운함이나 후회 같은 감정을 앓는다. 특히 서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연의 끝을 맞이한 것이라면 그때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후회될 만큼 커다란 마음의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

최근 며칠 사이에도 내 몸은 아팠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더 늦게까지 술을 마신 일상의 끝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된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고 뭔가 조금 고소하다는 생각도 했다. 동통과 고열과 갈증이 이어졌다. 특히 밤에는 유독 열이 더 많이 올랐는데 심할 때는 내가 누워 있는 방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손으로 어깨를 짚어보았을 때 이물감 같은 것이 들었는데 이때의 느낌은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를 짚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다른 사람이 내 어깨를 짚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깨어나면 아침 빛과 함께 누구인가가 여전히 내 어깨를 짚어주고 있을 것만 같았다. _박준(시인)

 

운전하는 몸

이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겁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서른다섯을 넘기면서부터 나는 몸의 능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운동은 당연히 몸의 영역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지만, 때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도 몸의 영역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운전이었다. 기둥 같은 기준점을 찾아내면 거기에 내 어깨를 일직선이 되게 만든 후… 남자는 내게 주차 공식을 알려주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공식에 너무 기대지 말고 감으로 해야 한다고. 언젠가 공식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올거라고. 왜냐하면 운전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감으로 하는 거니까. 몸에 칼자루를 쥐어주는 것은 영 어색하기만 해서, 나는 여전히 이것저것 계산하는 중이다. 해 지면 운전 금지, 출퇴근 시간대 운전 금지, 생리 중 운전 자제, 급박한 마감 중 운전 자제, 찜찜한 꿈꾼 날 운전 금지, 비 오면 운전 금지, 서울 진입 금지… 몸의 감각을 최대치로 활용하기 위해 만든 규제인데, 어찌 보면 몸을 믿지 못해 만든 규제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운전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다.

내가 운전하기 위해서는 일단 운전자가 아닌 상태로 목적지까지 답사를 다녀와야 한다. 걸으면서도 보행자가 아닌 운전자 중심의 사고를 하면서 말이다. 자동차의 신호를 보고 자동차의 마음으로 주차장 입구부터 출구까지 하나하나 따라 걷고, 급기야 최대한 차로 변경할 필요가 없는 효율적인 여정을 익혀두고야 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씩, 주행과 주차가 가능한 목적지를 거래처 트듯 늘려나가고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걸어서 30분 이내의 여정이 대부분이고, 행정구역을 넘어간다는 건 상상조차 차단하고 있다. 운전하기 전, 내게도 약간의 환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드라이빙 슈즈 같은 걸차 안에 구비해두는 거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워킹화를 신고 열심히 걷고 있다.

도로 위에서 나는 여러모로 약자의 위치에 있다. 왕초보, 경차, 여성. 도로가 정글이라면 덩치가 작은 차는 아무래도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존재한다. 덩치가 작은 차는 치타처럼 날쌔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코끼리나 사자 같은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덮치려들 테니까. 으르렁, 어디선가 경적이 울리면 나는 알아서 깨갱, 쪼그라든다. 세상 모든 경적이 나를 조준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도로 위에 출현하는 시간대와 구역을 고려하면 내 차 옆에 바짝 붙어 성별을 확인하려는 차를 만날 확률이 적지만, 그래도 주워들은 여러 이야기는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봐봐. 여자지? 김 여사 아니야? 기어코 어떤 차의 성별이 궁금해진 다른 차는 속도를 내서 그 차 옆을 가로지르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선팅된 차 안의 검은 실루엣을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거봐, 여자 맞네. 혹은 남자가 왜 저래?

오늘도 나는 걷고 있다. 내일 새로운 거래처를 하나 터야 하니까, 선보행 후주행의 법칙에 따라 걷고 있다. 브레이크가 발로 조절된다는 게 운전을 배운 이후 가장 쇼킹한 깨달음이었는데, 그 이전까지 어떤 시스템이 발로 조절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무릎에 힘이 풀려 조금만 느슨해져도 차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자동차의 본성은 멈춰 선 것보다 달리는 데 가까울 테지만, 여전히 발로 조절하는 브레이크라는 건 허술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견과류 씹듯 오독오독 힘주어 걷는다. 발의 감각을 좀더 믿기 위해 걷고 또 걷는다. 나의 절반은 인도에서 걷고 있지만, 또 절반은 차도에서 달리고 있다. 차도에 가 있는 그 절반이 부디 머리가 아니라 몸이기를 바라며. 걷고 또 걷고 있다. _윤고은(소설가)

 

집중하는 몸

뉴욕 헤럴드 스퀘어에 있는 메이시스(Macy’s) 8층 수영복 섹션 피팅룸의 조명은 굉장하다. 아웃도어, 오피스, 이브닝, 세 가지 모드가 있고 그 외에도 터치스크린을 통해 세밀하게 조도를 조정할 수 있다. 나는 벌거벗은 채, 터치스크린을 두드릴 때마다 달라지는 빛의 세례 속 달라지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크림색 페인트로 칠한 널찍한 피팅룸, 사방에 펼쳐진 거울과 플라스틱 옷걸이, 몇 벌의 수영복 그리고 나. 그게 전부다, 이 공간은. 나는 차례로 수영복을 걸쳐보고, 조명을 바꾸고, 돌아보고, 폰으로 거울에 비친 나를 찍어 친구에게 보내고, 다시 벗고, 입고, 가격표를 확인하는 동안 도착한 친구의 품평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보고, 항의하고, 반박하고, 다시 돌아보고, 수긍하고, 벗고, 입고, 반복하는 동안 물론 거기엔 여전히 오직 나뿐이다. 최근 내 인생의 최저점을 떠올릴 때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나는 모 백화점의 5층 구석방 올리브색 요가 매트에 등을 대고 누워 두 다리를 들어 올린 채로 내 배가 경련을 일으키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강사가 속삭인다. 오직, 자신의 몸에 집중하세요. 강사가 속삭인다. 스스로의 몸을 느껴보세요. 자, 나는 집중하여 느끼고 있다. 나의 근육 없이 말랑한 배가 경련을 일으키려는 사태를 목격하고 있다. 강사를 뺀 모두가 스스로의 뱃가죽에 집중하고 있는 이 순간, 주위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직, 경련 직전의 스스로의 뱃살에 집중하는 장면만큼 서글픈 게 있을까?

만족스러운 쇼핑을 끝내고 쇼핑몰을 가로지를 때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거울들, 온갖 거울에 비치는 나 스스로를 보며 적당히 카페인 기운에 돋우어진 나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동시에 그 만족감에 대해 해부를 시도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요즘은 세상에 오직 그런 만족감만이 존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오직 나에게 집중할 때 느껴지는 순간적 쾌락을 위해서 온 세상이 응원하는 듯한 기분만이 이 시대의 긍정적 요소 같다. 예를 들어 한때는 스트리트 패션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멋지게 차려입은 거리의 스타들을 발견하고 동경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니다. 더 이상 우리들은 타인들을 발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을 재발견할 뿐이다.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셀카다. 우리의 즐거움은 나, 거울, 거기 비친 나의 반영, 이렇게 세 가지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 눈에 비친 내 몸, 내 살갗보다 아름다운 것, 나를 사로잡고 집중케 하는 것은 없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해서 입고, 운동하고, 움직인다.

자신의 몸에 집중하라. 스스로의 몸을 느껴라. 그 다정한 명령 앞에서 나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기분이었다. 그보다 더 막막한 감정을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나 자신으로의 완벽한 회귀가 처방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끝이 아닌가. 만약 더 이상 스스로에게서도 구원을 찾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거울에 비친 완벽한 내 몸조차 지루해진다면,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 내 생각에, 요즘 사람들은 가장 슬플 때 셀카를 찍는다. 그리고 화면에 비친 자신을 보며 생각한다. 저렇게 예쁘고 완벽한 애가 왜 슬프지? 난 궁금하다. 스스로의 육체가 더 이상 위안이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신조차 버리게 될까? _김사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