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INTO ATELIER – ⑦ GREGOR HILDEBRANDT (그레고어 힐데브란트)

아틀리에는 한 예술가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동시에 한 인간의 열정과 고독, 자유와 욕망을 품은 일상의 통로이다.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보그〉가 파리, 브뤼셀, 베를린, 도쿄, 뉴욕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 10인의 작업실을 찾아 ‘오늘의 예술’을 포착했다. 예술가의 시공간에서 출발한 패션 모먼트는 동시대성의 또 다른 기록이다. ▷ ⑦ GREGOR HILDEBRANDT (그레고어 힐데브란트)

 

GREGOR HILDEBRANDT in BERLIN

 온갖 종류의 테이프가 산처럼 쌓인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의 아틀리에에서는 언제나 들리지 않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테이프로 만든 작품 앞에서는 누구나 춤출 준비를 해야 한다. 우아한 실루엣의 롱 드레스, 롱 글러브와 페이턴트 소재 롱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온갖 종류의 테이프가 산처럼 쌓인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의 아틀리에에서는 언제나 들리지 않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테이프로 만든 작품 앞에서는 누구나 춤출 준비를 해야 한다.
우아한 실루엣의 롱 드레스, 롱 글러브와 페이턴트 소재 롱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베를린 서쪽 교외의 오래된 맥주 공장, 독일 작가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의 아틀리에에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노래 ‘Dance Me to the End of Love’가 흘러나왔다. 사진가는 그에게 음악에 맞춰 모델과 춤을 추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했고, 완벽한 게르만족 체형을 가진 이 거대한 남자는 기다렸다는듯 모델의 손을 잡았다. 블루 셔츠에 서스펜더, 헤어스타일까지 꽤 멋을 부린 듯한 작가와 고딕풍의 헤어 메이크업으로 치장한 모델 지현정은 꽤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어쩌면 바로 뒤에서 훌륭한 관객, 목격자, 배경이 되어준 검은 빛깔과 윤택이 흐르는 네 폭짜리 그림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날 촬영을 위해 포장된 그림들을 일일이 꺼내 걸었다는 작가가 말했다. “이 작품 제목이 바로 ‘Dance Me to the End’예요.”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에게 음악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베를린 비엔날레 오프닝의 DJ로 활약할 만큼 음악에 조예가 깊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제목을 노래에서 따온 것이 심심찮게 많다. 데이비드 보위의 ‘Ashes to Ashes’, ‘펫샵보이스의 ‘Suburbia’, 독일 밴드 토코트로닉의 ‘Das Unglück Muß Zurückgeschlagen Werden’, 피터 가브리엘의 ‘Digging in the Dirt’ 등등 시대와 국경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음악이 그의 미술 작품으로 재생된다. 언뜻 말레비치의 추상화처럼 보이는 작품들은 모두 가사와 리듬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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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틀리에에서 가장 놀라운 풍경은 벽면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테이프였다. 오디오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바이닐 레코드까지. 친구나 지인을 통해 구한 것도, 예술 공부를 처음 시작한 스무 살 무렵부터 모은 것들도 있다. 그는 테이프 안에서 얻은 비닐 리본을 캔버스의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꼼꼼히 붙인다. 테이프를 붙이고 떼어내는 자리의 흔적을 이용해서 무늬를 얻어내기도 하고, 테이프 조각을 아예 바닥에 나열해 (춤추기 좋은) 마룻바닥을 만들기도 한다. 검은색, 갈색, 회색의 비닐 테이프는 곧 물감이 되고, 비닐의 광택은 무채색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테이프 밴드에 묻은 이물질(기억을 떠올려보면 이것 때문에 종종 재생이 중단되곤 했다)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낸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테이프는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음악이 된다.

음악은 곧 기록이다. 누군가의 기억 혹은 추억이기도, 시대정신과 감성이 각인된 역사이기도 하다. 무형의 산물인 음악 혹은 영상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거나 보여주기 위해서는 바이닐 레코드, 카세트 테이프, 오디오 테이프에 ‘새겨져야’ 한다. 컴퓨터의 성능이 알고 보면 이진법에서 출발하듯, 음악의 효능 역시 이 흔적에서 시작된다는 건 새삼 놀랍다. 작가는 이런 특성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구시대 유물이 된 이 저장 매체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부여한다. 이제는 구하기도 힘든 테이프들은 기억의 거울 역할을하고, 개인의 경험을 넘어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그것이 작가의 표현대로 ‘바로크 미니멀리즘’인지, ‘독일 레트로 아트’인지 쉽게 정의할 도리는 없으나, 분명한 건 창작의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찬 이 아틀리에만큼 그레고어 힐데브란트의 작품을 감상하기 이상적인 곳은 없다는 것이다.

롱 드레스와 하트 펜던트 목걸이는 샤넬(Chanel), 롱 글러브와 페이턴트 소재 롱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롱 드레스와 하트 펜던트 목걸이는 샤넬(Chanel), 롱 글러브와 페이턴트 소재 롱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프린지 장식 슬리브리스 드레스와 숄, 페이턴트 롱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꽃 모티브 귀고리와 골드 뱅글은 오렐리 비더만(Aurélie Bidermann).

프린지 장식 슬리브리스 드레스와 숄, 페이턴트 롱 부츠는 발렌시아가(Balenciaga), 꽃 모티브 귀고리와 골드 뱅글은 오렐리 비더만(Aurélie Bider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