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패션 궁정 7L. 패션 황제 칼 라거펠트 앞에 K 팝 왕자 GD와 한국 모델들이 샤넬 최신작을 입고 도열했다. 〈보그 코리아〉 20주년을 위해 거행된 K 슈퍼스타 포트레이트 예식.

칼 라거펠트의 7L은 센 강 왼쪽, 파리 7구의 에콜 데 보자르 주위로 구불구불 뻗은 골목길 중 하나인 뤼 드 릴(Rue de Lille)에 있다. 꽤 한적한 골목인 데다 파리의 흔한 서점처럼 생겨서 무심코 지나치기 딱 좋다.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카운터에 서 있는 직원 세 명은 손에 든 책에서 눈길조차 떼지 않는다. 추측건대 이들이 바로 라거펠트가 7L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고 버릇처럼 말하던 서점 직원 에르베와 카트린, 뱅상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카운터 옆으로 좁은 복도가 보인다. 그건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가는 킹스크로스 역 9와 3/4 플랫폼 같다. 전혀 특별할 것 없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니까. 도서관 사서처럼 고집스러워 보이는 직원들은 슬금슬금 그쪽을 향하는 우리를 여전히 개의치 않는다.

하얗고 좁은 복도는 개미굴처럼 이어진다. 몇 미터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넓은 공간이 등장하는데,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촬영 스태프들을 위한 간식거리(모델들을 위한 녹색 채소와 보기만 해도 목이 메는 곡물 비스킷)와 커피 머신, 오렌지와 자몽 주스, 찻잔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라거펠트의 집사인 프레데릭 구비(그는 라거펠트의 화보에 자신의 역할로 등장한 적도 있다)가 가운 차림의 이혜승과 최소라에게 주스를 따라 건넨다. 두 모델은 동그란 의자 위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토끼처럼 오이를 씹고 있다. “안녕하세요?(아삭아삭)”

그다음 공간은 칼 라거펠트의 개인 공간이다. 값비싼 가구와 멋진 인테리어,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을 기대한 모든 이들에게 실망을! 낡고 커다란 아크릴 책상 위에는 크고 묵직한 책들, 사진 액자와 익살맞은 미니미 칼과 베어브릭 피규어, 정체 모를 잡다한 것들이 도처에 흩어져 있다. 책상 위에 꽂힌 작은 테이블 모양의 조명(원래는 작업실 테이블에 꽂혀 있었다)만이 공상과학영화에서 본 듯한 기묘한 푸른빛을 발할 뿐이다. 또다시 짧고 좁은 복도를 지나면 그 유명한 7L 스튜디오에 도착한다. 익숙한 듯 낯선 이 장소는 예상보다 더 낡고, 기묘하고, 고딕풍 분위기가 감돈다. 사방 벽은 온통 책 더미. 예전에는 투명했을 뿌연 유리판들이 천장 중앙에서 하늘을 향해 뿔 모양으로 솟아 있다. 그 창을 통해 늦은 오후의 자연광이 스민다. 스무 명은 거뜬히 앉을 만한 커다란 소파에는 수주가 할아버지처럼 안경을 코끝에 걸친 헤어 스타일리스트 샘 맥나이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떤 대화를 나누기에 저토록 진지한 걸까.

개미굴 복도는 스튜디오의 대각선 모서리로 이어진다. 작업실 안에서는 스타일리스트와 그의 어시스턴트들이 어제 막 공개된 샤넬 F/W 컬렉션을 꼼꼼히 체크하며 행어에 정리 중이다. 성희는 폴짝폴짝 개미굴 같은 공간을 휘저으며 뛰어다니고, 개미굴의 끝인 메이크업 룸은 이미 스태프 10여 명으로 포화 상태다. 부분 가발을 정성스레 손질 중인 어시스턴트 한 명, 모델 현지의 머리 손질에 여념이 없는 또 다른 어시스턴트 한 명. 동네 아줌마 같은 매니큐어리스트 애니 에란도니는 구부정하게 앉아서 지혜의 손톱에 누드 톤 네일 래커를 정성스레 바르고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찬찬히 들여다보니 메이크업 아티스트 톰 페슈의 개구쟁이 같은 얼굴도 보인다.

7L에서 칼 라거펠트와의 촬영이라니. 아시아 최초로 칼 라거펠트의 사진을 커버에 싣는 기획은 <보그 코리아> 20주년을 위해 올 초부터 비밀리에 진행된 특급 프로젝트였다. 샤넬을 통해 라거펠트에게 화보 촬영을 제안하고, 쇼 바로 다음 날 어느 유명 매체보다 먼저 따끈따끈한 컬렉션 룩을 공수하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 톱 모델 군단(수주, 박지혜, 김성희, 최소라, 이혜승, 신현지)과 우주 대스타인 지드래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초대형 프로젝트. 애초에는 화보 촬영과 대면 인터뷰가 패키지로 진행됐지만, 독재자 라거펠트는 촬영 당일 단칼에 인터뷰를 거절했다(“농(Non)”). 당황스럽긴 했지만, 올해 팔순(그는 지난 2013년 <파리 마치> 인터뷰에서 그동안 미스터리에 싸여 있던 자신의 진짜 생일이 1935년 9월 10일이라고 밝혔다)인 디자이너가 93벌로 구성된 성대한 컬렉션을 발표한 바로 다음 날 10컷이 넘는 화보 촬영에 인터뷰까지 한다는 건 상당한 강행군이다. 샤넬 PR 담당자가 기적이라는 듯 말했다. “사실 누구도 무슈 라거펠트가 이 스케줄을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호텔 팔라초 펜디 오픈 행사 때문에 그는 내일 아침 일찍 로마로 떠나야 하거든요.”

오기 직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림미술관에서 슈타이들 전시를 준비하던 때였다. 칼 라거펠트에게 전시와 관련된 절차를 승인 받아야 했는데, 전시 담당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가서 기약 없는 대기 상태로 이미 며칠을 보낸 후였다. 남부 휴양지로 이동했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따라갔고 결국 5분 미팅을 했는데, 직접 만난 것 자체가 영광이라며 매우 만족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칼 라거펠트와의 1시간짜리 대면 인터뷰가 20분으로 줄어들고, 그다음엔 전화 인터뷰로 바뀌고, 결국엔 시차 때문에 새벽에 국제전화로 질문 다섯 개에 대한 짧은 답을 듣고 끊어야 했다는 사연 반 인터뷰 반의 어느 해외 매체 기사도 기억났다.

“그가 왔어, 그가 왔다고!” 누군가 칼 라거펠트의 도착을 알리자, 시간이 정체된 듯 지루한 공기만이 흐르던 스튜디오에 긴장감이 돌았다. 여기저기 늘어져 잡담을 나누던 스태프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샤넬 글로벌 PR 담당자가 패션계의 독재자에게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하자, 국가 원수를 맞이하듯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일렬로 헤쳐 모여 정중하게 악수를 나눴다. 가까이서 본 그는 체격이 건장하고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꼿꼿하다. 사실 반듯하다기보다 살짝 허리를 뒤로 젖힌 채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발을 옮긴다. 새하얗게 파우더(정체는 클로란 드라이 샴푸)를 뿌린 꽁지 머리, 짙은 선글라스, 런던의 힐디치앤키(Hilditch&Key)에서 맞춤 제작한 풀 먹인 하이칼라 셔츠, 디올 옴므 또는 지방시의 검정 재킷, 스키니 진, 마사로의 검정 악어 부츠.

그리고 듣던 대로 독재자는 독재자였다. 그가 도착한 순간부터 스타일링, 헤어, 메이크업의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그의 의견에 따라 진행됐다. 처음 우리가 의도한 건 <보그 코리아> 특유의 한국 정서가 담긴 스타일링을 <더 리틀 블랙 재킷> 사진집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것. 그러나 촬영 전날 야심 차게 최신작을 선보인 디자이너는 어떠한 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를 원했다. 결국 우리는 파리로 떠나기 전날, 밤새 러기지 두 개에 꾸역꾸역 담은 한복과 고쟁이, 버선, 비녀, 떨잠을 한 번도 쓰지 못한 채 고스란히 가져와야했다.

그런들 어떤가! 1996년 여름, 당대 최고의 슈퍼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는 진태옥, 지춘희, 이영희, 트로아 조의 꾸뛰르 드레스를 입고 <보그 코리아>의 역사적인 첫 커버를 촬영했다. 그리고 20년 후인 지금,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 모델들이 샤넬 룩 차림으로 커버를 장식하기 위해 7L에 모였고 칼 라거펠트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 그리고 현장에서 매몰차게 인터뷰를 거절한 그는 며칠 뒤 서면 인터뷰의 답변을 보내왔다. 냉소적인 듯 유머가 섞인, 고매한 듯 현실적인 패션 독재자의 답변은 재기 발랄하다. 곱씹을수록 의미를 더하는 패션 천재의 말, 말, 말.

VOGUE KOREA(이하 VK) <보그 코리아> 촬영에서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요?
KARL LAGERFELD(이하 KL) 샤넬 2016 F/W 컬렉션의 정신.

VK 당신은 좋아하는 사진가로 슈타이켄, 스티글리츠, 캐세비어 등을 꼽은 적 있죠. 그렇다면 당신과 가장 유사한 취향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사진가는 누구인가요?
KL 지금은 또 다른 시대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어빙 펜, 리처드 아베돈 등 많은 사진가들을 좋아하죠. 그렇지만 그 둘 중 누군가와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군요.

VK 당신의 사진 스타일을 정의한다면요?
KL 내 사진 스타일은 매주 자주 바뀌는 편이죠. 나는 변화를 좋아하고, 패션 피플인 데다 다른 기술, 다른 스타일을 좋아하거든요. 나는 한 가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VK 개인적으로 당신의 사진에서 종종 정물화 같은 인상을 받곤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KL 나쁘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델들을 펄쩍 뛰게 하는 데엔 재능이 없으니까.

VK 사진을 “다른 사람은 놓칠 수도 있는 순간의 포착”이라고 정의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KL 내게 있어 사진이란 절대 돌아오지 않는 “영원한 1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VK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고 소셜 미디어에는 즉각적으로 찍어 올린 사진이 넘쳐나죠. 어떤 사진가는 이런 경향이 사진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합니다.
KL 그런 흐름이 사진의 질을 위협할지는 잘 모르겠으나, 사진가들의 재능을 위협할 수는 있을 것 같군요.

VK 한 번도 찍어본 적 없지만 언젠가 꼭 한 번 찍어보고 싶은 대상(Objects)이 있나요?
KL 비록 내 사진이 정물화처럼 보이더라도 나는 사물(Objects)보다 사람 찍는 걸 더 좋아합니다.

VK 당신은 “더 이상 사진가로서의 관점 없이는 삶을 볼 수 없다”고 말한 적 있는데, 사진가로서의 관점이란 어떤 건가요?
KL 사진가들은 주위를 다르게 봅니다. 한순간의 이미지로 보죠. 만약 그 순간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미 너무 늦은 겁니다. 한 번 지나간 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VK 컬러보다 흑백 사진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나요?
KL 질문에 앞서 그건 내 스타일입니다.

VK 추하게 여겨지던 것에서 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KL 16세기 말 크리스토퍼 말로(엘리자베스 1세 시대 대표적인 영국 극작가)는 “비율적 기묘함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VK 오늘날 사람들은 코코 샤넬보다 칼 라거펠트로 샤넬을 인식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샤넬의 이미지는 뭔가요?
KL 코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샤넬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됐죠. 그렇지만 근본은 여전히 코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VK 이번 샤넬 컬렉션은 클래식한 동시에 이모지 프린트와 액세서리 같은 동시대적 코드를 포함하고 있죠. 컬렉션에 대해 좀더 듣고 싶습니다.
KL 허울뿐인 설명보다 <보그 코리아>를 위해 촬영한 내 사진들이 컬렉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려주길 바랍니다.

VK 우리는 다양한 매체와 거리에서 샤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봐왔죠. 당신 또한 컬렉션을 통해 당신의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샤넬을 재해석하는 가장 혁신적 방식은 뭔가요?
KL 그게 바로 내가 매 시즌 오뜨 꾸뛰르와 정규 컬렉션을 통해 시도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오늘날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거죠. 그렇지만 나는 샤넬의 정신을 좋아합니다. 결국은 그게 회사의 이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