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Another Vogue – 20인과의 인터뷰

2021.07.08

by VOGUE

    Another Vogue – 20인과의 인터뷰

    지난 20년 동안 숱한 아티스트를 뮤즈로 삼아온 <보그>는 이달 ‘Another VOGUE’라는 테마 아래 뮤즈에게 주체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아티스트 20팀에게 ‘보그’ ‘패션’ ‘트렌드’ ‘서울’ ‘20’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와 함께 작품으로 지면을 가득 채워달라는 러브콜을 보냈다. 기꺼이 <보그>의 컨트리뷰팅 에디터가 된 아티스트 20팀은 각자의 방식으로 키워드를 해석했고, 촉감도 모양도 향기도 다른 스무 가지 작품을 보내왔다.

    캡처

    “트렌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해요? 올해 트렌트 컬러는요?” 흔쾌하게 작업에 임해준 이선미는 안경알을 재료로 작품을 만든다. 모든 창작은 사람 얘기이고 안경알 하나하나는 사람을 대신한다. 몇천 개씩 손수 엮은 안경알은 풍선, 항아리로 다시 태어나고, 조명을 켜면 각기 다른 굴절률을 가진 안경알은 저마다 다른 그림자를 드러낸다. 올 초 이선미는 세월호 참사 2주기 추모 작업으로 ‘SOS 0416 (SOS Please Help Us Save the SEWOL Ferry)’과 ‘바람무리’를 선보였다. 6개월 넘게 고된 작업에 매달려 연등 304개를 만들었다. 연등은 추모 리본으로도, 이승에서 저승으로 안내하는 나비로도 보인다. ‘SOS 0416’은 SOS를 바코드로 형상화한 작업이다. “제 작업을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모두들 힘내라!’예요. 작업을 진행하며 저 스스로 위로를 많이 받았기에 보는 사람들 마음에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업합니다.” 이선미는 ‘내 머무름 자리’를 구성하고 있는 안경알 하나하나를 <보그>를 발행하는 국가로 연결지어 환상적인 빛을 밝혀주었다.

    감정의 서사를 추상적인 설치와 회화를 통해 풀어내는 작가 강서경은 유닛 단위로 헤어져 있던 작품을 ‘Another VOGUE’를 위해 다시 소환했다. 작업실의 크기 때문에 작품을 쪼개기 시작했으나 불안과 균형이 반복되는 작가의 작품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도 하다. 강서경은 평소 조선시대 ‘정간보’로 작품 세계를 설명한다. “우물 정은 그리드 시스템입니다. 정간보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 공간 안에 가사와 음악과 리듬이 응집되어 엉켜있기 때문입니다. 균형을 잡고자 함은 작업의 시스템이기도 하고 제가 지향하는 작업의 방식이기도 해요.”

    키워드 다섯 개를 회화로 표현해준 작가는 조송이다. 그녀는 깊이와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강렬한 먹그림을 그린다. 그림에서 사용하는 컬러는 세 가지를 넘지 않는다. 먹을 물에 희석해서 30번, 40번 덧발라 완성한다. 그림은 상당히 어둡지만 내용까지 우울하지는 않다. ‘외출하기가 귀찮은 어느 신생아의 초상’ ‘내 슬픔을 생선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등 그림의 제목부터 웃음이 나온다.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주목하지 않던 지점을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끄집어내어 비틀기를 시도한다. “그림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죠. 다만 제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해 질 녘 새벽이나 깜깜한 바닷가에 있어요. 밝게 해보려고도 했는데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제 안의 재미를 찾고 있어요.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의 주제는 인간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에요. 박제된 동물, 고사상 돼지머리 같은 것이죠.”

    조송의 반대 지점에 있을 것 같은 작가는 노상호다. 그의 그림은 전날 채집한 이미지와 이야기로부터 나온다. “하루 동안 나에게 들어왔던 정보가 다음 날 그림으로 믹스되어 나오는 형태예요. 무엇을 경험했느냐에 따라 문체나 그림풍이 바뀔 때도 있어요. 돌이켜보니 네 가지 형태로 정리되더라고요. 그로테스크한 동화풍 이야기, 미스터리극, 여성화자 중심의 달콤한 사랑 얘기, 90년대 말 지지리 가난한 초등학생 얘기.” 네 자아는 서로 충돌하고 협업하기도 하며 노상호의 그림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매일 일기를 쓰듯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그림이란 반드시 캔버스 위에서 보여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SNS, 자수, 단행본, 전시, 앨범 재킷, 제품 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얘길 해도 각자 다르게 기억하잖아요. 변형된 상태로 기억하는 게 재미있어요.” 노상호는 티셔츠에 자신의 세계를 마치 브랜드 로고처럼 수놓았다.

    일상 속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하는 데 능한 작가군이 있다면 일러스트레이터다. 최근 몇 달간 <보그>를 구독한 독자라면 마치 미술관에서 튀어나온 듯한 김참새의 그림을 기억할 것이다. 크레파스로 쓱쓱 그린 듯한 그림은 무채색 마음에 알록달록한 감성을 전해줬다. 얼마 전 그녀는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외롭고도 외롭고, 슬프고도 슬프다’라는 주제로 감정에 대한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려고 해 요. 화두는 역시 감정에 대한 것이라서 제 그림의 색을 유지하며 같은 맥락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담은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김참새는 ‘보그’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의 초상화 같은 그림을 8월 달력에 담아 보내왔다.

    키워드를 미각으로 풀어낸 건 셰프 최현석과 믹솔로지스트 박성민이다. 1,000개가 넘는 레시피를 개발하여 ‘크레이지 셰프’로 불리는 최현석 셰프에게 레시피 개발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화두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영감을 위한 영감으로 시작된 창의적인 요리에 골몰했다면 지금은 많은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요리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 “요리 하나 만드는데 30~40번씩 테스트를 해요. 많은 경험을 했고 나이가 든 거죠. 가끔은 철없던 그때가 그립기도 해요. 요즘은 한국적이면서도 글로벌한 입맛도 담고 싶어서 집착에 가깝게 메뉴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휴대폰 메모장에는 신중한 변화를 위한 메모가 가득하다. 창의적인 칵테일을 무기로 국제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믹솔로지스트 박성민이 주력하는 것도 ‘어떻게 하면 맛과 향으로 감동을 줄 수 있을까’다. 그가 운영하는 바 ‘르 챔버’는 손님의 기분, 취향 등을 물어서 풀코스처럼 술을 제공하는 ‘오마카세’를 운영한다. 조향학원까지 다니며 맛과 향을 탐구한 그는 <보그>를 위한 시그니처 칵테일을 내놓았다.

    ‘VOGUE’라는 글씨를 영감의 소재로 삼은 아티스트는 그래픽 디자이너 강구룡, 힉 스튜디오 서희선과 정지훈, 서예가 김정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널리스트로 청춘 스튜디오 아트 디렉터를 맡고 있는 강구룡은 디자인을 말하고 이야기하는 문화를 만들어왔다. “포스터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매체예요. 압축적이고 단순합니다. 움직임이 없고 소리를 낼 수 없으며 만지기 전까지는 촉감도 전달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한 장의 이미지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보는 사람도 보는 데 몇 초 이상 걸리지 않습니다. 한 장의 이미지로 길 가는 사람을 멈칫하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뻐요.” 강구룡이 보내온<보그>포스터에 구구절절 덧붙여야 할 설명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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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힉 스튜디오의 서희선과 정지훈은 타이포그래피를 주인공으로 그래픽 작업을 진행했다. 투박하고 가공되지 않은 느낌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그들의 작업에서는 오히려 핵심이 잘 묻어났다. 서예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글씨를 쓰기 시작한 김정호는 캐릭터를 접목해 글씨를 쓴다.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다는 그의 작업실에는 피규어가 가득한데 캘리그래피를 할 때면 캐릭터들을 떠올리며 글씨를 써 내려간다. 《육룡이 나르샤》, 《관상》 등 사극에 등장한 그림과 손글씨 중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다.

    서예가 김정호가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화두를 던졌다면, 한국화가 김현정과 도예가 유의정은 과거와 현재를 공존케 한다. 김현정의 그림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피자를 우적우적 씹고 오토바이를 타고 당구를 치는 여자가 등장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지만 단아하고 조신해 보이는 대상이 그 행동을 보여줄 때 쾌감은 더해지고 공감 지수는 높아진다. 그림 속 여자는 김현정 작가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그림은 21세기 풍속화가 된다. 사이트를 개설해 누구나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하고 강연에 수시로 나가며 동시대에 다가서는 그녀는 조만간 네이버 그라폴리오에서 연재도 시작할 예정이다.

    도예가 유의정의 작품 중심에는 ‘경계’라는 키워드가 있다. 박물관에서 유물을 실제에 가깝게 복원할 때 그는 그 경계를 오히려 훤히 드러내 보인다. 복원하는 부분을 금으로 칠해버리거나 브론즈 조각처럼 작업을 하는 등 새로운 이미지를 채워 넣는다. 나이키, 애플 등 브랜드 로고나 미키 마우스, 키티 등 캐릭터를 도자기로 굽고, 전통적인 도자기에 브랜드를 문양처럼 새겨 넣는다. 유의정의 도자기는 ‘과거와 현재의 구분 지점은 어디인가?’ ‘조각인가 도자기인가?’ ‘입체인가 평면인가?’라고 묻는다. 미래의 유물을 만드는 그의 작업에 ‘<보그>의 20주년’이 상징적으로 담겼다.

    사진가 원범식은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는 직접 건축물 사진을 촬영하고 콜라주 작업을 통해 새로운 ‘건축 조각’을 만든다. 도예가가 흙으로 도자기를 빚듯 그는 건축물 사진을 재료로 건물을 짓는다. 같은 시간대에 지어진 건물, 책에서 언급한 건물 등 주제를 가지고 작업하지만 제목은 넘버로만 매겨져 재료를 눈치채는 건 쉽지 않다. 컴퓨터 작업으로 뭐든 만들 수 있는 세상이지만 원범식은 직접 촬영한 사진만 사용하고, 한 번 사용한 사진은 재사용하지 않는다. 작가의 다큐에 가까운 우직한 접근은 초현실적 건물의 실제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사진가 바른의 사진에도 현실은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담긴다.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호적인 요소를 들어낸 ‘Behinds: The other Things’ 시리즈, 매일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한 사진을 겹쳐 익숙하다는 의미에 의문을 던진 ‘Familiar Scene’까지 그의 사진에는 레이어가 쌓여 생긴 이미지가 있다. 경험에서 출발해 세상에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더없이 기발하고 경쾌하다.

    1년 7개월 전 이창은, 김형일, 송온민은 대기업을 제 발로 빠져나와 ‘대단한 이야기’이자 ‘대단한 거짓말’이 될 수 있는 슈퍼픽션을 차렸다. 그리고 양재동 한복판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프레디’와 ‘닉’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생로랑 클리퍼, 영화 《킹스맨》 브리프케이스 등 패션 아이템을 먼저 정하고, 이런 옷을 입는 사람은 어떤 성격일까 추론해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이들은 <보그>라는 이미지를 골드로 표현했다.

    웹툰 《여탕보고서》로 여탕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만천하에 ‘보고’한 작가 마일로는 마감을 1등으로 마친 우등생이었다. 마일로 작가의 그림은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 간결한 선 안에 핵심과 재미가 바글바글하다. 작품을 그냥 단순히 재미있게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마일로의 최근 관심사는 사모예드 강아지이고 차기작 연재는 연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칼럼 청탁 혹은 인터뷰 요청으로 생각하고 평화롭게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작품 의뢰임을 깨닫고 느낌표 같은 반응을 보인 작가는 소설가 편혜영과 시인 유희경이다. 덤덤하고 담담하게 감정을 담아내는 유희경 시인은 ‘축시’라는 파일명으로 <보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의 언어로 보내왔고, 첫 소설집 《아오이 가든》부터 《사육장 쪽으로》, 《재와 빨강》를 거쳐 최근작 《홀》까지 스산한 기운이 가득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힘을 말해온 소설가 편혜영은 전작과 사뭇 다른 단편소설을 보내왔다. “회전목마는 완만한 속도로 천천히, 빛과 음악과 함께, 바람이 느껴질 정도의 속도로 올라갔다 내려가지만, 결국에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관성에 충실한 것들을 보면 애틋해집니다. 회전목마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어느 하나의 장르로 정의하기 힘든 카 더 가든 음악에 대한 후기에는 유독 “듣다가 잠이 들었다”는 평이 많다. 카 더 가든이 <보그>를 떠올리며 작곡한 사운드에도 특유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무드가 가득하다. “늘 사람들을 신나게 하고 싶은 욕심에 음악을 만들고 있으나 의도대로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최근에는 오래된 신시사이저 Juno-106을 사용해 음악을 만들고 있는데 어떻게 이 소리들을 제 음악에 잘 매치시킬 수 있을까가 최대 관심사입니다.” 반면 《언프리티 랩스타 2》에서 올드 스쿨을 선보이며 다른 참가자들을 압도한 트루디는 ‘보그 스타일’을 정의하며 솔직한 가사와 비트를 보내왔다. 그녀의 가사에 비트를 더해준 건 더 콰이엇이다. 앨범 준비로 눈코 뜰 새 없는 그녀가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말해준 소감은 심플했다. “좋아하니까요.” 그 마음 하나를 기대하며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아티스트들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을 게재하는 것으로 우리는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Another VOGUE’는 아티스트의 영감의 주인공이 된 시간의 기록이다.

    에디터
    조소현
    포토그래퍼
    HWANG IN WOO, CHA HYE KYUNG, COURTESY PHOTOS
    일러스트레이션
    조성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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