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딴따라

요즘 연예인들의 ‘눈부신’ 활약을 보며 문득 이들 존재의 전신이 궁금해졌다. 예술가와 딴따라 사이에서 이들은 어떻게 ‘스타’라 명명되었을까? 근대를 산 연예인들의 행보는 스타 중심의 요즘 대중문화계에 뜻밖의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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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Stars)을 지상으로 데려오고 싶어 하는 욕망이 이 시대의 경향 중의 하나”라는 에드가 모랭의 말처럼, 인기 연예인을 지칭하는 ‘스타’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이미 사용되었다. ‘인기 배우’나 ‘인기 가수’ 같은 표현도 이 시기에 보편화되었다. 대중 미디어를 혈관과 근육 삼아 스스로를 증식하는 대중문화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특히 이 시기에 유성기(축음기)의 도입과 보급은 신식 가요를 필두로 한 대중문화의 유행에 큰 역할을 했다. 영화와 연극이 대중의 호기심과 관심을 부추겼지만 감상으로 그친 반면, 대중가요는 레코드를 통해 사람들의 일상에 더욱 깊숙이 침투했다. 문화의 직접적 소비와 향유가 본격적인 시대라고나 할까. 또 영화나 연극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최신식 문물이던 것과 달리 대중가요는 늘 불러오던 민요의 연장 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친근했다.

일상에 새로운 노래가 들어앉음과 동시에 신문과 잡지 역시 오늘날처럼 인기 가수들을 다루어 대중의 열광을 부추기고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1935년 잡지 <삼천리>에 실린 ‘인기 가수의 예술, 사생활, 연애’는 오늘날의 기사들 중 수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스타 사생활 엿보기’의 고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연예 산업 역시 193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음반기획사가 존재했고, 가수 선발부터 음반 제작, 홍보 등을 담당했다. 각 음반사는 전속으로 가수를 비롯하여 작곡가, 작사가를 두었다. 유명 대중 예술인을 영입하는 것은 이윤과 직결되었기에 쟁탈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케 레코드의 지점장 이철은 우연히 이난영(1916~1965)의 목소리를 들은 후, 이미 태평 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기로 한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별건곤>지 1933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 ‘레코드의 열광 시대’를 보면, 오케 레코드의 모든 직원들이 변장하고 밤중에 태평 레코드를 포위했고, 심지어 자동차로 추격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전속 계약 제도를 잘 몰랐던 황금심(1922~2001)이 오케 레코드와 빅타 레코드에 이중 계약을 하면서 오케와 빅타의 싸움은 법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엄친아 가수’라는 말은 오늘만 있는 게 아니었다. 1930년대에도 가수들의 ‘스펙’을 기준 삼아 가수를 분류하기도 했다. 그중 1930년대 초반을 주름잡았던 강석연(1914∼2001)과 이애리수(1910~2009)는 ‘배우 가수’로, 1930년대 중반의 인기를 휩쓴 이은파(?~?), 선우일선(1919~1990), 김복희(1917~?), 왕수복(1917~2003) 등을 ‘기생 가수’로 불렀다.

지금의 아이돌이 예명을 쓰는 것처럼 예명을 쓰기도 했다. ‘방랑가’로 히트 친 강석연의 본명은 강부연이었다. 유명세를 떨친 여성 연예인이 권력가나 재력가와 혼인하며 제2의 인생을 사는 것도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왕수복은 해방 후 북에서 공훈배우에 올랐고, 남편인 경제학자 김광진과 합장되어 북한 국립묘지인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당시 기생 가수들은 지금의 아이돌과 같았다(기생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기생의 존재를 빼놓고 그들의 주요 종목인 전통 예술의 보존과 일제강점기의 연예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부디 오해 마시길). 1934년 <삼천리>의 ‘평양기생학교 구경’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3년제의 평양기생학교가 나온다. 가수 데뷔까지 최소 2년에서 5년 이상의 연습생 시절을 거치는 오늘날을 떠올리면 된다. 당시 재학생 수는 250명. 10대 초·중반의 여학생들은 가곡, 시조, 가사, 전통 춤과 같은 전통 예술(국악)은 물론 전통 회화, 국어, 산술 등을 배웠다. 유학생 출신의 인텔리와 고위 관직자를 상대하기 위해 일본 노래와 신식 가요까지도 섭렵했다. 이러한 수련 과정을 거친 권번(기생학교) 출신들은 이른바 ‘준비된 연예인’이었다. 물론 기생 가수가 가수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으나, 권번의 수업은 그들이 대중가수로 활동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대중이 인기 연예인을 ‘우상’과 ‘상품’으로 대하는 양면적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여성 가수에게는 성녀(聖女)와 요부(妖婦)의 이미지가 강요되곤한다. 외모와 이미지가 중요하며, 남성 중심주의의 사회에서 대중은 여성 스타에게 순결과 요염, 청순과 섹시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게다가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성 상납을 비롯한 성 관련 문제는 여성 연예인을 괴롭히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1934년 이면상 작곡의 ‘꽃을 잡고’를 취입하여 이름을 알린 선우일선은 1935년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투표 결과 왕수복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삼천리> 잡지에 게재된 ‘가희의 예술, 연애, 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설움을 토로했다.

“기생이 아니 되고 레코드 가수만 되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기생 생활이란 지긋지긋합니다. 한편은 손님이고 이쪽은 상품 모양으로 노래와 춤을 파는 팔린 몸이 되다 보니까, 저편 분들은 저의 자유까지 합하여 가진 듯싶고 이편은 그 반대로 아주 무능자가 된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당당한 여인으로 누비던 무대를 뒤로하고, 소속사와 마찰도 감행하며 결혼하는 아이돌 가수를 보면, 선우일선의 한숨은 당시 연예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이 시기에 유입되고 성장한 연예 문화는 지금과 하등 다를 게 없어 보인다.

1900년 후반 즈음 시작된 일제강점기의 신문물과 대중문화 연구는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어느 순간 비슷한 풍경과 만나는 것이다. 1930년대의 경성에 자동차와 인파가 밀려다니고,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쇼윈도를 기웃거리는 남녀들은 서양 패션 잡지를 사거나 영화배우 사진을 걸어놓고 스타들의 스타일을 흉내 내며 재즈가 있는 카페에서 칵테일을 즐겼다. 이런 궁금증에는 <모던 보이>(2008), <암살>(2015), <아가씨>(2016) 등의 영화가 일부 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구의 초점이 당시의 유행과 대중문화로 맞춰지고, 사료 또한 일상을 담고 있는 잡지와 신문이 되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점잖은 예술가’들이 ‘딴따라’로 나오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재즈 연주자가 홍난파(1898~1941)라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는 클래식 음악을 조선에 유입한 점잖은 선구자였고, 가곡 ‘봉선화’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였다. 1927년 본인의 재즈 밴드를 이끌고 서울 YMCA에서 재즈 공연을 가졌다는 자료가 발견되기 전까진 말이다.

사실 당시의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 예술가와 연예인의 구분은 오늘날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대중 예술도 라디오, 유성기(축음기)와 같은 대중 미디어가 닿는 범위까지만 효력이 있었지, 그 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대중 예술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부 계층에 한정된 것이었고, 그 안에도 민요 같은 전통 음악과 서양 노래로 대변되는 신문명이 혼재해 있었다. 1930년대 기생 가수들의 열풍에는 당시 사람들이 대중가요처럼 취급하던 민요의 창법과 그 맛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서구식 현대 춤을 조선의 전통 춤과 접목시킨 신여성 최승희(1911~1967)는 무용계에서 선구자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에펠탑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파리 샤요 국립극장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독 공연을 가진 때가 1938년 6월이었으니, 한마디로 춤으로 세계와 소통한 여인이었다. 월북 예술가라는 이유로 금기시되던 그녀의 이름은 1988년 해금과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대중문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1935년 일본 아사히 신문의 비타민 광고는 물론 연필, 축음기, 제과, 화장품 등의 모델로 활동했다. 라이벌이었던 무용가 배구자(1905~2003)가 민요 음반을 취입하자, 1936년 콜롬비아 레코드는 최승희에게 ‘이태리의 정원’과 그녀의 자작곡 ‘향수의 무희’를 취입하게 했다. 그녀는 시대가 낳은 최고의 ‘딴따라’였다.

음악에 홍난파가 있었다면 문학에는 임화(1908~1953)가 있었다. 그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서기장으로 이념의 날을 세웠고,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다. 1930년대 조선문단을 향해 이식문화론(利殖文化論)을 외쳤던 그는 영화 <유랑>(1928)과 <혼가>(1929)에 배우로도 출연했다. 문단에서는 ‘조선의 랭보’였고, 영화계에선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문사 임화’에 가려져 있던 ‘딴따라 임화’가 발견되면서 영화학계가 그를 주시하기도 했다.

요즘의 예술가는 ‘쉽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연예인은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대중과의 소통만이 미덕이 되었고 소통해야 한다는 강령이 전부다. 예술과 연예에 대한 감각이 한 몸에 공존하던 ‘딴따라’들이 그립다.

기생과 기생 가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안에는 현재의 여성 가수와 걸 그룹의 전사가 보인다. 그리고 홍난파, 임화, 최승희의 존재에서는 오늘날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을 오가는 존재의 전신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그런데 그들도 순수 예술가로서 대중 예술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움직였다기보다는 당시 이 땅에 새롭게 등장하는 소비 주체인 대중을 향하겠다는 자세로 예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여러 루트와 제 스스로 접속했을 테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청중과 미디어의 조종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고, 청중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위해 자신의 가치관을 수정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자가 예술가의 자세라면, 후자는 연예인의 자세다. 이와 같은 사료를 분석하고 지금의 시대와 비교해보면 저들은 어려운 예술도, 쉽고 재미난 예술도 모두 소화해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시대는 어떠한가. 어려운 예술은 어려운 대로 나름의 성역을 만들어놓고 보호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예술가는 ‘쉽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연예인은 ‘더 많은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대중과의 소통만이 미덕이 되었고, 소통해야 한다는 강령만이 전부다. 특별한 수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화가라고 자칭하다 말썽을 일으키는가 하면, 아이돌의 패션과 스타일이 시립미술관을 가득 채운다. 그러다가 순수 예술의 눈치가 보일 때는 팝아트라는 장막을 쳐버린다.

예술가는 연예인 병에 걸렸고, 연예인은 예술가 병에 걸린, 감염과 전염의 요즘 시대, TV나 무대를 보다 보면 예술과 연예에 대한 감각이 한 몸에 공존하던 과거가 떠오른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그들이 어느 면에 있어선 ‘딴따라’라 할지라도, 새로운 문물을 낳는 신(新)인류로서 역사에 남은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