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그늘

여름은 끝났다.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있지만 그보다 두려운 건 예측 불가능한 변덕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재앙은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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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름이 좋다. 햇살과 잎사귀와 그림자의 그러데이션, 가벼운 옷차림, 값싼 여름 과일, 긴 휴가, 해수욕, 심지어 땀이 나서 끈적한 몸과 타인의 살냄새도 좋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지만 나는 태양이 내리쬐면 아무에게나 입 맞출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야자수가 자라는 나라에서 매일 오후 러닝셔츠와 팬티만 입고 평상에 드러누워 망고를 까먹으며 시에스타를 즐기는 삶은 나의 오랜 꿈이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 덕분에 말 설고 글 선 동남아로 은퇴 이민을 갈 필요도 없이 앉은자리에서 소원 성취하게 생겼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무덥던 열여섯 해 중 열다섯 해가 2000년대에 있었다. 나머지 한 해는 1998년이었다. 그게 2015년 자료고, 이제 2016년이 추가될 것이다. 대지의 여신이여, 나에게 아보카도씨를 내려주소서! 아니 구아바가 좋을까? 아무튼 제주도에 과수원을 사러 떠나기 전에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들뜬 마음을 안고 기후변화센터에 들러 몇 가지를 물었다. 실내 온도가 무척 높은 곳이었다.

“폭염과 혹한의 연관성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폭염으로 고위도의 빙하가 녹으면서 중위도의 해수 온도가 내려간다는 것이죠.” 기후변화센터 한빛나라 커뮤니케이션 실장은 제주도 아보카도 농장을 향한 나의 열정에 빙하 녹은 물 같은 것을 끼얹었다. “지구 온난화의 실체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학술적 논의가 끝난 단계입니다. 산업화 이후 130여 년간 지구의 온도는 0.85℃ 상승했고, 주요 원인은 인위적인 온실가스 때문이라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온실가스 배출량의 78%는 화석연료 및 산업 공정으로부터 발생한 이산화탄소 때문이고요. 그런데 그 결과는 단지 폭염만이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보다는 ‘기후변화’라고 표현하는 편이 문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기억이 났다. 비가 지긋지긋하게 많이 온 2012년 여름 막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헌터 부츠를 샀는데 그 후 몇 년 내리 가뭄이 들어 아직 개시도 못했다. 그해 겨울은 또 끔찍하게 추웠는데, 나는 또 미련하게 버티다 시즌 말미에야 발목까지 오는 캐나다구스 패딩을 샀고, 그 후 2년 동안 입을 일이 없었다. 그게 다 내가 박복한 탓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폭염, 한파, 가뭄, 홍수 등 각종 기상 이변이 모두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어쩐지 올겨울에는 캐나다 오리들에게 감사할 일이 아주 많을 것 같다.

산업화 이후 0.85℃ 상승이라니, 36℃ 폭염의 끝에서 듣기엔 미미한 수치다. 하지만 2006년 발간된 영국 경제학자 니컬러스 스턴의 <스턴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평균 기온이 1℃ 오르면 영구 동토가 녹아 캐나다와 러시아 등에서 건물과 도로가 파괴되고, 적어도 10%의 육상 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하고, 최소 30만명이 설사, 말라리아, 영양실조 등 기후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며, 5,000만 명이 물 공급을 위협받게 될 것이다. 알래스카에서 8km 떨어진 사리셰프라는 섬에서는 이미 동토가 녹아 건물이 파괴되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이주를 고려하고 있다. 그런데 마을 주민 전체가 이주하는 데 약 1억8,000만 달러의 비용이 발생하는 터라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2014년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자료에 따르면, 지금처럼 인류가 화석연료 펑펑 쓰고 에너지 낭비하면서 온실가스와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경우 2100년 지구의 온도는 산업화 이전 대비 3.7~4.8℃까지 상승할 수 있다. 지중해 사람들이 물 부족에 시달리고, 아프리카 사람 8,000만 명이 말라리아에 걸리고, 해안가에 사는 3억 명이 침수 피해를 겪고, 북극 툰드라의 절반 정도가 사라지고, 대서양의 열염분 순환과 계절풍의 방향이 교란될 수 있는 수치다. 북극곰은 애초에 멸종했을 것이다. 만약 5℃까지 올라가면? 뉴욕, 런던, 도쿄도 수몰될 수 있다. 제주도 아보카도 농장인들 무사할까.

뭔가 대단히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열대기후도 좋고 야자수도 좋지만 북극곰도 정말 좋아한다. “우리가 뭘 할 수 있죠?” 나의 우매한 질문에 한빛나라 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시민들이 텀블러 쓰고 자전거 타는 거 좋죠. 하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어요.” 중요한 건 정부와 기업이다. 2015년 12월,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조약인 ‘파리협정’이 체결되었다. 1997년 만들어진 교토의정서는 선진국만 참여한 것이지만 2020년부터 이를 대체할 파리협약에는 195개국이 참여했다. 이로써 지구는 ‘신기후체제’에 접어들게 될 것이다. 최종 목표는 2100년까지 산업화 이전 대비 온도 차를 2℃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다. 한국은 202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 전망치 대비 37%를 감축하기로 했다. 에너지 집약형 산업에서 저탄소 산업 위주로 경제 구조를 재편하고 신재생 에너지를 확대하는 등 사회 전반의 변화가 불가피하다. 전기차 보급을 위한 세제 혜택처럼 피부에 와 닿는 사소한 변화도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37%라는 감축 목표치에 대해 환경계는 아직 부족하다, 산업계는 그것도 버겁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럴 때 여론에 묻고 싶어도 문제에 대한 인식 자체가 높지 않은 실정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홍보는 지구 자신이 가장 잘해주고 있다. 우리는 시베리아보다 추운 겨울과 동남아보다 더운 여름을 한 도시에서 겪었다. 이 별은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시한폭탄으로 변하고 있다. 환경은 후손에게 빌려온 거라기에 떼어먹고 치울랬더니 웬걸, 부채 상환일이 앞당겨진 셈이다. 지구여, 내 관심을 모두 가져요. 열대 과일은 동남아에, 북극곰은 북극에, 그리고 우리는 이 별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