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 또는 KTX 안에서

부산비엔날레 전시장 전경.

부산비엔날레 전시장 전경.

지금 광주비엔날레,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16, 부산비엔날레에서는 1년 동안 감상해도 모자랄 정도의 방대한 예술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예술과 미술, 종합 예술 무대와 관광, 작가와 관객이 한 몸이 되는 비엔날레 풍경에 대한 단상.

사라 헨드렌, ‘끼어든 경사로’, 2016, SeMA.

사라 헨드렌, ‘끼어든 경사로’, 2016, SeMA.

2016년 가을, 서울과 광주 그리고 부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는 비엔날레의 이름은 모두 길고 단번에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이를 공통점이라고 부른다면 너무 손쉬운 판단일 것 같다. 그러나 한 번씩 입안에 바람을 넣어 불러보기로 한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2016은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부산비엔날레는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 11회를 맞은 광주비엔날레는 자신을 ‘제8기후대(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로 부른다. 시인, 12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자, 철학자 등 제목에 붙은 레퍼런스만으로도 몇 문장을 쓸 수 있을 만큼 출처와 각주가 풍성하다.

케망과 레훌레레 ‘구멍의 미래를 동사로 기억하기’, 2012, SeMA.

케망과 레훌레레 ‘구멍의 미래를 동사로 기억하기’, 2012, SeMA.

세 비엔날레는 공통적으로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되거나 흩어지는 배움의 방식을 다룬다. 일일이 참여 작가와 작품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비엔날레를 앞두고 이뤄진 렉처와 워크숍, 부대 행사에서 각각의 비엔날레가 문제 삼은 것은 미술과 사회를 둘러싼 ‘힘’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세 개의 비엔날레는 20세기와 21세기 초의 비엔날레가 가졌던 방법론이 이제는 더 이상 예전만큼 탱탱한 효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공히 인지하는 것 같다.

아키히코 다니구치 ‘빅 브라우저 3D’, 2016, SeMA.

아키히코 다니구치 ‘빅 브라우저 3D’, 2016, SeMA.

예술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한자리에 쫙, 이렇게 전 세계 작가들의 이름과 시간을 빌려 오픈에 맞춰 만들어야 하는 종합 무대에 올라서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근원적인 질문을 주제로 삼아 타인과 피자를 8등분해 함께 먹는 화합의 분위기가 도출된 곳이 많다. 특히 광주비엔날레와 미디어시티 서울은 도시의 ‘지금’보다 도시의 ‘과거’ 혹은 더욱 시급한 존재 조건으로서의 ‘미래’를 불러낸다. 현재를 살기 위해 더 극렬하게 대화 상대가 되는 것은 미래다.

이미래, ‘무너지는 것들-나의 가장 과격한 꿈 속에서’-1, 2016, SeMA.

이미래, ‘무너지는 것들-나의 가장 과격한 꿈 속에서’-1, 2016, SeMA.

광주, 서울, 부산에서 열리는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의 수를 합치면 거의 수백여 점에 이른다. 이 작품 전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러니까 영상 작품이 적절하게 플레이되고 그 버튼을 누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력이 작가와 큐레이터 못지않게 움직였는가 하는 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올가을 이 세 비엔날레는 생산력에 있어서 만큼은 가히 포화 상태에 도달하는 경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도라 가르시아,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 2016, 광주비엔날레.

도라 가르시아,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 2016, 광주비엔날레.

오프닝을 찾은 전세계의 미술 관객들은 KTX를 타고 광주와 부산을 찍고 서울 한복판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안으로 투어와 관람을 겸하는 발걸음을 옮긴다. 모두가 이동 중이며 모두가 바삐 발걸음을 움직인다. 관객이 작가가 되고, 흡사 작가가 다른 비엔날레의 관객이 되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