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환한 빛을 가득 머금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빛을 내주는 배우. 박신혜가 내딛는 걸음마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이야기가 피어오른다.

“잉여 인간이었어요.” 드라마 <닥터스>를 홀가분하게 떠나보내고 달콤한 휴식에 젖어 있겠거니 던진 질문에 돌아온 대답이다. 샤넬의 앰배서더로 <보그> 카메라 앞에 선 박신혜에게서는 한낮의 쿠바 같은 선명함이 있었다. “드라마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많이 바빴어요. 밀린 광고 촬영하고 드라마 MT 갔다 오고 바로 미국 다녀오고 또 광고 촬영하고… 이제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드는데 어디서부터 다시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요. 모든 일이 힘들고 귀찮아서 부모님과 골프 치러 나가는 거 외에는 움직이지도 않았어요. 막상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내가 뭐하고 있지?’ 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니까 외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하얗게 불태웠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박신혜는 드라마 <닥터스>에서 천재 의사 유혜정 역을 맡아 상처를 품은 불량 학생에서 사명감 있는 의사로 성장하는 과정을 군더더기 없이 그려냈다. 교복은 여전히 어색하지 않았고 의사 가운은 썩 잘 어울렸다. 그녀의 특화 영역이 된 ‘돈 많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받는 캔디형 여주인공’의 삶은 평소 브라운관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되곤 했다. <닥터스>에서 직업인, 손녀, 동료, 애인으로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동시다발적 역할을 온전히 보여준 박신혜는 삶의 민낯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여자 주인공이 끌고 가는 드문 드라마였고 그래서 부담감도 있었어요. 래원 오빠가 뒷받침을 잘해주셨고 김영애 선생님께서 예뻐해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욕심을 되게 많이 부린 작품이었어요. 제 욕심으로 스태프들이 힘들어하니까 힘 나게 해주고 싶어서 더 열심히 하고 그러다 보니 체력도 빨리 소진되고. 스태프들 반응이 별로인 날은 서운해하기도 했어요. 욕심이 절 많이 지치게 한 것 같아서 반성도 많이 했어요.” 욕심은 결국 연기였다. 이 장면에서는 어떤 감정과 어떤 느낌일까 고민을 내려놓지 않았다. “감독님, 작가님과 이렇게 통화를 많이 한 작품은 처음이었어요. 상대 배우와 이해한 부분이 서로 다르면 그걸로 계속 통화하는 거예요. 수용도 했어야 했는데 아닌 건 끝까지 아닌 거 같아서 고집을 많이 부렸죠. 내 목소리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좀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구나 후회되기도 해요. 이번 작품은 잔잔하게 여운이 오래가네요. 그래서 여전히 좀 힘들기도 하고요.” 우리는 한순간도 변화하지 않을 때가 없고,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변화는 부지불식간에 쌓여 한순간 급상승한다. 그 순간 부는 바람은 시원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애정의 대상자에서 벗어난 박신혜가 보여준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소문난 체육인이자 에너자이저로서 갈고닦아온 몸 쓰는 실력은 조폭 10여 명을 때려눕히는 액션 신에서 시원하게 등장했고, 나이 불문, 국적 불문의 상대 배우와 번쩍이고야 마는 ‘케미’는 아홉 살 차이 나는 김래원을 만나서도 변함이 없었다. “학교 선배님이세요. 연기를 워낙 잘하시니까 기대서 가야지 했어요.(웃음) 처음부터 오빠랑 해서 너무 좋다고, 든든하다고 말했어요. 오빠도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이랑 연기가 오랜만이라 잘해주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속마음을 처음부터 털어놓으니까 현장이 편안했던 거 같아요.” 덕분에 우리는 <동갑내기 과외하기> 이후 실로 오랜만에 진심으로 맺어지길 응원하게 되는 스승과 제자 커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박신혜의 트렌디 드라마가 한류를 몰고 왔다면 <닥터스>는 어르신 팬층을 몰고 왔다. 박신혜는 가락시장에 소라 먹으러 가서 어머님들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가장 많이 받는 배우가 됐다. 물론 이 인기에는 야무지게 곱창을 굽고 토마토 깍두기를 담그고 농사일을 척척 해내던 <삼시세끼> 출연도 한몫을 했다. 고깃집에 가면 스태프들 고기를 척척 구워준다는 경험담이 속출하는 가운데 박신혜는 손사래를 쳤다. “어떤 날은 손도 안 대요. 먹기만 하고. 하지만 익숙해진 거 같긴 해요. 한 손으로 고기 먹으면서 한 손으로 고기 뒤집고 있고. 헤헤”

박신혜는 ‘인성 좋은 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배우이기도 하다. 아침저녁으로 미담을 만들어냈다는 오충환 PD의 증언을 비롯, 작품을 같이 한 배우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배려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닥터스> 촬영 현장에는 용준형, 이홍기, 서효림, 옥택연 등 그녀를 아끼는 지인들의 밥차가 하루가 멀다고 도착했다. 커다란 눈망울이 뿜어내는 선한 이미지, 그동안 연기한 캐릭터들의 씩씩한 성격, 동료들의 증언, 잇따른 기부에 대한 뉴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확신하게 되는 반듯함은 박신혜라는 배우에 대한 하나의 ‘상’을 형성한다. 최근 살이 빠진 모습으로 드라마에 나오자 팬들이 소속사에 항의했다는 에피소드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기대하는 지점을 명확히 알려준다. 적이 없는 친근한 이미지는 그녀에게 안전지대를 제공하기도 하고 엄격한 잣대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작품을 한 배우들과 인연을 이어가는 건 오랜만에 연락해도 어제 만난 것처럼 지내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남에 대해 선입견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요? 글쎄요, 전 열등감도 있고 키 크고 옷발 잘 받고 비율 좋은 친구들 보면 질투도 해요. 소심해서 남한테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눈치 보고 스트레스 받는 경우도 있고요. 예전에는 사람들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거 같아요. 요즘은 내 일을 잘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여기까지 얘기한 박신혜는 눈꼬리를 아래로 떨어뜨리며 물었다. “우리 떡볶이 먹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서울 3대 떡볶이를 사왔거든요. 떡볶이가 식고 있는 게 너무 슬퍼서요.”

그래서 요즘 그녀의 관심사는 ‘자신’이다. 인간 박신혜는 무엇을 좋아하고 언제 가장 행복한가. 타고난 운동신경과 뭐든 빨리 배우는 감각 덕분에 두 줄 가까이 나열할 수 있었던 취미도 자기 검열 중이다. “영화 <침묵(가제)>을 찍을 때는 저 자신을 좀더 관찰해볼 거예요. 지금은 한창 캐릭터를 잡아가고 있어요. ‘전사’를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인물의성장 배경 같은 걸 혼자 생각해보고 인물관계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거예요. 무엇보다 이 영화는 최민식 선배님과 함께 한다는 게 너무 영광이에요.” 곧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영화 <침묵>은 재벌 약혼녀가 살해된 사건을 놓고 벌어지는 법정 스릴러물로 박신혜는 변호사 역할을 맡았다. “그동안 장르를 가린 적은 없어요. 그냥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으니까요. 드라마는 주로 주인공 역할이라 제가 주체적으로 끌고 가고 스태프들과 호흡이 좋은데 영화는 그럴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 현장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고 스크린으로 좀더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었어요.” 화자가 아닌 관찰자 입장으로 박신혜는 이 사건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본다. “너무 순진해서 바보 같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감정선이 변해가는 모습이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심리 변화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요.” 배우마다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박신혜는 공부하듯 다가가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 인물이라면 어떤 표현을 할까? 절반 이상 생각해가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배우한테 받는 느낌을 더해서 연기해요. 저에겐 상황에서 주고받으면서 생기는 감정이 가장 커요.”

박신혜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을 보면서 가슴 설레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심리를 제대로 다룬 작품에 마음이 쏠린다. 영화 <이끼>, <곡성> 얘길 하며 두 눈을 반짝이고 <7년의 밤>이 너무 기대된다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공포물은 무서워서 잘 못 봐요. 스릴러는 심리에 대한 얘기가 많으니까 무서워도 귀 막고 온몸을 쥐어짜며 보는 편이죠.(웃음)” 다음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는 박신혜는 영화 <형>의 유도 코치다. 형(조정석 분)이 동생(도경수 분)을 도와주려는 한 장면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동생이 너무 자신 같아서 들어간 영화다. 배우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게나 다양하다. 자신의 연기를 보고 울고 웃었다는 얘길 들었을 때 가장 뿌듯하고, 봉사 활동을 하고 기부하는 소중한 일에 팬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는 그녀의 말은 물보다 더 투명한 진심일 것이다.

한동안 나의 컴퓨터 배경 화면에는 박신혜의 사진 한 장이 저장되어 있었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좀 다른 감정이었는데, 지금이라도 당장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그녀의 눈이 좋았다. 짝사랑의 순간이든, 지구가 함락당하는 순간이든 구심점을 찾은 느낌. 희망이든 절망이든 이제부터라는 느낌. 촬영이 끝나고 박신혜가 자리를 뜨자 해 질 녘 쿠바 같았던 공간이 다시 대한민국 용산으로 돌아왔다. 다음 이 시간에는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그녀의 걸음마다 이야기가 피어오른다.